10월 23일, 눈 앞에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가는 초록색 전철을 바라보며
오늘은 ‘지도’씨라 부르겠어요. 안녕 지도씨? 그 이름과 긴히 얽힌 아이템 몇 가지를 찾아냈거든요. 방정리를 하다 ‘지도’를 찾았어요. 어쩐지 이 물건은 귀하의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하게 하는 마중물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건내주는 김에 손편지로 레터를 적어봐요.
함께 담은 지도는 몇 해 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샀던 건데, 서울을 바라보는 지도 두 점은 낮과 밤의 대비가 뚜렷해서 들고 왔어요. 시간을 대비시킨 창작자의 상상력이 마음에 들었어요. 어떤 지도는 동네 구석구석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 섬세한 시선에 마음을 뺏겨버렸답니다. 가끔 나는 지도를 방바닥에 펼치거나, 마스킹 테이프를 이용해 지도를 잠시 벽에 붙여 바라보곤 해요. 그러면 기운을 잃고 비실대는 상상력이 갑자기 좋아진다거나. 신선한 감각이 불쑥 솟구치는 걸 느껴요. 귀하게 모셔놓고 쓸만한 물건은 아니지만, 이따금 펼쳐 읽을 만치의 쓰임새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요즘 성수동 서울숲으로 오피스를 옮긴 뒤로 만족스러운 루틴을 보내고 있어요. 서울 동북부는 낯선 공간이지만, 이곳을 거점 삼아 알려지지 않은 서울의 진풍경과 서울 어딘가에서 일회적으로 나타났다 모습을 감추는 아우라를 잔뜩 흡수하는 듯해 기분이 좋은 요즈음입니다. 따릉이를 타고 달리면 그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요. 자전거에 탑승한 나의 육체는 영화감독이 배우들의 몸짓을 역동적으로 붙잡기 위해 선택하는 ‘달리-캠’같아요.
이를테면 봉준호 영화의 달리기 장면 처럼, … 괴물에게 뺏긴 딸을 찾기 위해 한강변 괴물을 추적하는 송강호네 가족, 그들과 나란히 달리는 ‘달리-캠’ 처럼, 어디론가 분주히 나아가는 낯선 이들과 숨을 헐떡이며, 새롭게 마주한 서울 동북부의 지형지세를 사랑하는 일에 푹 빠져있답니다.
그러다 보면 지도를 이리저리 살펴볼 수밖에 없어요.
잠수교 한복판에서 오늘은 어떤 길로 나아갈지 고민하며 스마트폰에 손가락을 얹어 지도를 빙글빙글 돌립니다. 퍼뜩 섬광처럼 스친 옛 말, 프랑스여행에서 사귄 친구가 내한한다면, 따릉이를 태워 서울의 파사드를 보여주고 싶다던 ‘지도’씨의 말을 떠올리고 말았답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ㅎㅂㅎ
아마 이 편지가 도착할 무렵이면 한 학기의 절반을 통과하는 셈인가요? 중간고사를 무사히 넘긴 그대에게 박수를 ~_~/ 이맘때 거닐었던 캠퍼스는 쌀쌀맞은 바람이 불던 기억이 있어요. 덕분에 도서관에 심어진 나무와 풀잎은 서울숲 보다 빨리 단풍이 들 것 같습니다.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서울 땅의 잎사귀가 우리의 마음씨를 부드럽게 간지럽히길 바라며.
10월 23일, 통유리로 바깥이 훤히 보이는 6층 사무실에서
눈 앞에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가는 초록색 전철을 바라보며
성수동 화양연화맨 씀
P.S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지도를 받은 지도씨는 서울지도 두점을 쏙 빼닮은 소설을 한 편 지어냈다. 성수동 화양연화맨은? 그도 그런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동교동에 잠시 머물렀다가 지금은 서초구와 강남구를 가르는 어느 빌딩 건물 4층에 머무른다. 그는 여전히 자전거 안장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전보다 서울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