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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Feb 04. 2021

브랜드 에디터 1년 차는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낼까?

눈 덮인 기와지붕을 보고 와송을 떠올리다

1.
나는 에디터. 의뢰인이 청탁한 주제에 알맞은 콘텐츠를 짜기 위해서 글과 씨름하는 사람이다. 문서 파일을 열면, 거기에 여러 장의 이미지와 간단한 기획안이 적혀있다. 마케터의 기획안과 디자이너가 토스한 이미지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메시지를 짜는 것이 나의 일이다.


모니터  마우스 커서가 한참을 제자리에 멈춰 깜빡인다. 어떤 메시지는 망한 연애편지처럼  시간을 붙잡아도 답답하기 짝이 없고, 어떤 글은 삼십  만에 훌훌 써내리기도 한다. 보통 후자는 그대로 장원급제한다.


가끔은 스스로 화들짝 놀라 자빠질만한 메시지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것은 패션 브랜드보다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를 다룰 . 추상적인 아트 비주얼보다는 리얼한 풍경을 바라볼 . 필자인 내가 물리적 실감을 가진 상태일 . 내가 경험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떠오를 , 좋은 메시지를 짜는 편이다.



2.
눈 내린 기와집을 보고서 수초 안에 메시지를 떠올린다.


기와에 착 달라붙은 와송을 묘사하며 운을 튼다. 우리가 겨울 한복판에 서있다고. 이렇게 추운 날 밥들은 잘 챙겨 드시냐고. 날도 추운데 기왕이면 우리 집에서 식사 든든히 챙겨먹고 가시라고.


.

.

.


기와에 달라붙은 와송이 걱정될 정도로
시린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뜻한 온기가 필요한 요즈음
잘 차린 바상에 수저 한 숟갈 떠서
목구멍을 뜨숩게 덥히고 가세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상차림으로 여러분을 맞이하겠습니다.


어느 레스토랑의 인스타그램 콘텐츠 원고가 삼분 만에 완성됐다. 이번 콘텐츠는 반응도 좋다. 게시물에 찍힌 하트아이콘은 이번달 BEST3 안에 들어간다. 모든 메시지를 이렇게 쑥쑥 짜낼 수 있다면, 매일매일 사람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3.
이런 말 한마디 던졌다고 곧바로 사람들이 행동을 옮기진 않을 것이다. 코로나 2.5단계에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까지 나아가 고봉밥을 먹고 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꺼낸 대상에게는 불가해한 호의가 싹트지 않을까? 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브랜드를 보고 사는 세상. 단 한 명, 단 일 초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SNS에 지극정성이다. 브랜드 하는 사람들은 그런 호의 덕에 돈을 벌고. 사람들은 이런 불가해한 호의 안에서 관계를 살찌운다.


4.

이런 말, 이런 마음 씀씀이는 내가 올 가을 나주의 오래된 기와집에서 받은 따뜻한 환대와 1박 2일을 머무르며 감각한 풍경이 있기에 가능했다. A경험에 덧댄 B경험이 나를 진짜 종갓집 장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나의 메시지는 감도 높은 경험에 기반한다. 한국문화를 공부한 얄팍한 지식과 고택체험에 얽힌 사적인 감정이 더해져 탄생한 메시지다. 나의 메시지는 고택 사람들의 아우라를 모방하는 키치다. 무언가를 영원히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며, 그것은 내 안에 잠재된 여러 가지 가능성이기도 했다.


여행 이튿날, 동행한 친구보다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이곳 사람들의 흔적을 열심히 살펴봤더랬다.
100년 넘은 기와집에 달라붙어 와송, 따로 화분에 옮겨 심었던 와송이 아직 잘 자라고 있을지 궁금하다.

5.
브랜드 에디터로 생활하면서 스스로 납득하고,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의 메시지를 짜냈던 건 신기하게도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였다. 좋은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일관성 있는 성격을 캐치하고, 그들이 세상에 내밀고자 했던 메시지를 가다듬는 것으로 직장인 2년 차를 보냈다. 타인의 무언가가 '나'라는 존재를 경유해 구현됐을 때, 나도 살고 남도 살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치 있게 사는 길을 딱 하나로 좁힌다면, 결국 '경험의 허구적 재현'뿐인 걸까.

6.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쓰는 건 내겐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경험한 바에 상상력을 보태, 그것을 그럴싸한 메시지를 펼치는 건 비교적 쉽다. 이런 게 탁월한 재능일까. 하면 할수록 즐겁고, 상상력을 부채꼴 모양으로 펼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다니. 세상 아직 살만하구나. 이런 것으로 입에 풀칠하며 사람 구실 하면서 살아갈 수는 있구나.



P.S
새로 판 명함에 '에디터'라고 적은지도 어느덧 1년. 브랜드 에디터로서 사는 게 맞는지 선뜻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좋은 것의 좋은 점을 전하는 일은 너무 보람찬 일이어서 조금 더 옳은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와 혹시 비슷한 일을 하고 계십니까? 앞으로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놀라운 피드백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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