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기원, 김희선
: 노동의 디스토피아적 귀결, 그러나 그것이 허구적인 서사물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치밀하고 잔인하다. 이야기는 이중으로 구성된다. 첫번째는 노동의 디스토피아적인 귀결을 연대기적으로 노출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의 창조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기자('앤더슨')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전자의 이야기는 서사의 축을 이루며 후자의 이야기는 서사의 목적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이 세계에 대한 조롱이라는 점에서 결국 하나의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아무리 아동노동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시대였다고는 해도,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공장주들이 자기 소유의 공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모른 척하며 지내왔다 해도, 그렇게 신문에 대서특필된 이상 뭔사 조치를 취하긴 취해야 했다. 본보기로라도 토마스 굿맨을 처단해야만, 마치 그런 흉악한 일은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 분노하여 들고일어난 런던 시민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단 뜻이다. 결국 굿맨의 공장은 폐쇄됐다. 경시청에서 직접 나온 기마경찰들이 공장 문을 열고 유황과 가죽 냄새에 절어 있는 창백한 얼굴의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카메라를 든 채 서 있던 앤더슨은 일렬로 걸어나오는 아이들 중 하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쁘지 않니? 넌 이제 해방이야. 그러나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한동안 둘러보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21쪽
노동은 언제나 노동자를 소외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그것은 맑스가 지적한 바와 같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자 그 누구도 이러한 지점을 생각하며 노동에 임하지는 않는다. 노동의 과정에 포섭된 개인주체는 기능적으로만 출현할 뿐, 그 이상의 목적성을 허락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때문에 잔인한 장면이기도 하다. 축구공을 만들어내는 공장에 대한 연대기적 서술에서 등장하는 아동노동의 실태는 모든 공장에 대한 상징으로 읽히는 동시에 현대의 노동시장에 대한 조롱으로 읽히게 된다. 지금 여기의 문제로 환원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아동노동은 끝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새벽이 되어 육지 쪽부터 서서히 세상에 밝아오기 시작했을 때, 앤더슨은 카메라와 촬영 장비를 재빨리 가방에 챙겼다. 그걸 본 통역이 다가와 어부의 말을 전했다. 잠시 후면 항아리 안에 든 문어들을 낚아올릴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벌써 가려고요? 앤더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급한 일이 생겼거든요. 늙은 어부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서둘러 떠나는 기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항아리를 하나씩 건져올리기 시작했다. 외인 거주지에 있는 숙소로 돌아온 앤더슨은 트렁크 가장 안쪽에 소중하게 넣어뒀던 '토마스 굿맨' 축구공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쓰고자 하는 것,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그러면서 동시에 진짜를 가짜처럼 보이게도 하는—스토리를 만들려면 사진이 필요했으니까. 만약 사진만 있다면 아무리 기이한 이야기일지라도 진실이 된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 26쪽
하지만 노동문제의 반대편에 '토마스굿맨Ⓡ'이 '굿맨 앤드 박 볼 컴퍼니'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 구술이 존재한다. '토마스 굿맨'이 만든 회사의 축구공이 '박흥수'의 증조부에게 어떻게 전해졌으며, 이것을 기점으로 '박흥수' 자신이 회사에 대한 얼마만큼의 관련성을 자지고 있는지에 대한 자아적 구축이 주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 내부의 서사를 들여다보면, '박흥수의 조부'와 '토마스 굿맨'의 축구공은 실상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일한 관련성의 증거라 할 수 있는 한 장의 사진마저도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사 자체가 구축하고 있는 사실성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박흥수'라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조롱으로 읽힌다. 더 나아가 그럴듯한 이야기를 추출하던 소설적 흐름은 돌연 그 호흡을 멈추는 것으로 읽는_존재에게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구술되지 않은 역사, 사실, 사건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안에서 읽는_존재는 다시 한 번 더 이 서사를 읽어내게 되는 것이다.
간담회가 끝나면 박흥수는 사람들을 바로 옆에 있는 공장으로 안내했다. 얼마 전 새로 지은 그 공장은 이번에 처음으로 모두에게 공개되는 것이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거대한 규모라든가 최첨단 설비들의 메탈릭한 광채에 놀라기 전에 먼저, 내부에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잡지나 다큐멘터리에 많이 나오던 광경—히잡을 쓴 여자들이나 작은 아이들이 각각 앞에 둥근 공을 하나씩 놓고 손으로 가죽을 꿰메고 있는—을 기대했던 그들은,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건 세상이 바뀌기 전의 일이지요." 증조부를 기리기 위해 배경 음향으로 틀어놨다는 파도치는 소리와 갈매기 끼룩대는 소리에 섞여 박흥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기계가 이 모든 일을 해냅니다. 그들은 정교하고 치밀한데다 지치지도 않아요. 이들 덕분에 우린 최고의 공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멋진 신세계 아닌가요? 잠시 후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어딘가에 설치된 영사기가 오른쪽의 넓고 하얀 벽면에 수평선과 배를 비췄다. 그리고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배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마침내 벽 전체를 뒤덮는 그림자가 되는 것이었다. - 39쪽
비로소, 진정한 귀결은 위의 장면에서 이뤄진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의 서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노동의 과정에서 거세된 노동자의 존재성은 명확하게 보인다. 지금 이곳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무인시스템의 구축(일부 거대 프렌차이즈 매장으로부터 시작된 무인계산기계KIOSK의 형상은 거대한 화면과 그 위로 선별적으로 떠오르는 메뉴_이미지를 통해 일방적인 의사과정을 합리화할 뿐 아니라, 정동_노동 혹은 감정 노동에 종사하던 서비스 업종의 노동자를 손쉽게 대체할 수 있는 반인격적 모델이라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 무인계산기계의 형상에 대해 오래 논하는 것은 본 소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 있을 것이다.)은 노동의 과정에서 인간존재를 절대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읽는_존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미지로만 호명되는 '뱃고동 소리'같은 것들은 인간존재를 상기시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가 계급 '박흥수' 개인의 기형적인 향수일 뿐이다. 결국 이 디스토피아에서 출구는 완전히 봉쇄된다.
: 진실은 무엇으로 보증되는가. 나아가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대상의 진실성을 무엇으로 보충할 것인가. 이미 자기자신과 동일시해버린, 그래서 자기자신의 자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인물, 혹은 사건의 참됨을 무엇으로부터 보장받을 것인가. 이것은 고스란히 실존의 문제가 된다.
자기회귀 혹은 동어반복의 사슬 안에서 이야기는 무한으로 확장되고 그것에 따라 진실의 가능성 역시 무한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무한으로 확장된 진실 그 자체는 진실성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무한한 진실이 가능하다는 가정은 진실 자체의 단일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진실일 수 있다면 그것은 진실일 수 없는 무엇이 되는 셈이다.
『스테판, 진실 혹은 거짓』의 진실성을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이 부분에 주목했다. 그들은 콜먼이란 이름을 가진 예비역 중령에 대해 수소문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콜먼의 손녀를 만나 이제는 고인이 된 그 남자가 남긴 단 한 권의 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 55쪽
적어도 세 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스테판 켄달 고디가 한국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에 대해서 말이다. - 61쪽
'세 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말은 그 이상의 어떤 것도 가능한 동시에 그 중 그 무엇도 사실성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일 것이다. 그럴듯한 현실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문법상, 위와 같은 기술은 소설의 약점을 고스란히 자인하는 서술로 작용한다. 쓰는_존재가 거짓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읽는_존재는 읽어낸다. 그리고 읽는_존재 역시 그 이야기가 거짓말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 이야기의 예술성(이 논의에서 예술성과 진리의 가능성은 동등한 의미망을 형성한다. 예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유일성이 아니었던가. 예술은 카피_본이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유일하고 즉시적이며 우연적인 예술_행위의 산물로서 홀로 존재할 뿐이다. 진실의 가능성 역시 그 사건 자체의 일회성, 유일성, 즉시성, 우연성으로부터 약동하기 시작한다.)을 보증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과 가까운가, 하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구조망 안에서 읽는_존재는 위와 같은 서술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이야기의 동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서술,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두번째 버전에선 모든 것이 일종의 사기극으로 마무리된다. 몇몇 연구자들은 좀 다른 방향에서 책의 진위를 의심했다. 그들은 『스테판, 진실 혹은 거짓』이 여러 유명한 회고록의 짜깁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하긴, 실제로 그 책이 마이클 잭슨의 잘 알려진 전기에서 제목을 차용한 것은 거의 분명했다. - 66쪽
가장 독특한 것은 세번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거기서 스테판 켄달 고디의 이야기는 모두 허구다. 사실 스테판은 그저 좀 쉬고 싶어서 자메이카의 휴양지로 떠났을 뿐이다. 그런 다음 누군가가 나머지 이야기를 상상해냈다. 아마도 한 26세 청년에 의해 버려진 종이 묶음의 저자였을지도 모를 그 상상력 풍부한 인물은, 어느날 갑자기 인기를 끌기 시작한 <월드 피스> 시리즈의 작곡자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한다는 점에서 사라진 힙합 스타를 떠올렸고, 그 중간에 모타운과 올림픽, 한국, 루크 스카이워커 등등의 시의적절한 키워드를 군데군데 배치했을 것이다. - 67쪽
세 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통해 읽는_존재는 '스테판 켄달 고디'와 '<월드 피스> 시리즈'를 둘러싼 어떤 사실에도 기댈 수 없게 된다.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는 보여주는 것이다. 왜, 서사는 이 지점으로 무한한 총력을 기울이는가. 서사는 자신이 진실이 아니라고 온 힘을 다해 부르짖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하지만 이 세번째 버전엔 또다른 뒷이야기도 존재한다. 그건 바로, 힙합 스카 스테판 켄달 고디가 LMFAO를 해체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사라지지도 않았으며 그저 평생 신나게 춤추며 파티를 벌이는 어떤 우주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선 그의 아버지인 베리 고디 주니어도 한국과 별다른 관련이 없으며 <월드 피스>라는 기이한 명상음악이 아이튠즈 차트 정상을 휩쓸지도 않는다. 물론 왕년의 힙합 스타가 극동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영어 강사 생활을 한 적도 없고, 모든 것은 완벽하게, 정상적으로—그러니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대로—돌아간다. - 68쪽
읽는_존재는 이미 알고 있다. 현실세계의 LMFAO는 해체되지 않았으며 '스테판 켄달 고디'는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완벽하게, 정상적으로'라는 기술에서 알 수 있듯이 무한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진실의 총량은 어느 순간에 이르러 스스로 폭발하거나 소거되고야 만다. 다중세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 이 서사에서 무한으로 늘어나는 가능성들은 어떤 것에도 사실성을 보증하지 않은 채 잊히기를 택한다. 그저 라디오의 채널을 바꾸는 것으로, 주파수를 바꾸는 것으로 이야기의 존재는 아예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이다. 서사에 대한 가장 암울한 버전의 현실이 채택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씁쓸.
: 영생을 얻은 존재들과 그렇지 못한 부류의 존재들이 혼재된 세계, 멀지 않은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인 구축은 낯설지 않다. 특히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신체로부터 한정적으로 보장받는 사이보그_신체의 상상은 흔히 마주쳤던 SF적 그 무엇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생성되는 개념적 차이, 그리고 그 개념적 차이가 공고하게 만드는 계급 구조에 대한 인식은 날카롭고 공포스러울 따름이다.
48조는 개정된 차별금지법의 핵심 조항이었다. "어떤 이유로도 타인에게 그의 생물학적 나이에 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라는 이 조항을 골자로 하는 차별금지법이, 사실은 점점 더 영생에 가까워져가고 있는 극소수의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법에 따르면 누군가가 타인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육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상대의 외적 상태뿐이었다. 그리고 영생을 얻은 자들이 인공피부과 새로 바꾼 맞춤형 장기들 덕분에 점점 더 젊어지고 있을 때, 나 같은 인간, 그러니까 암시장용 싸구려 피부도 구할 수 없는 자들은 점점 더 늙어가기만 했던 것이다. - 119쪽
멀지 않은 미래의 지점, 나이와 삶을 구매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세계가 시작된다. '나'는 그 안에서 안타깝게도 가난한 존재이다. 그래서 늙은 신체를 유지하며 겨우 살아나가는 것만이 허락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욕망의 대상은 단 하나, 젊음이 된다. 파츠, 단위로 구성되는 신체의 교체는 삶의 지속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 세계에서 자아는 그 어느때보다 협소해진다.
그와 동시에 부의 정도를 기준으로 차별적으로 획득되는 새 신체의 사실성은 새로운 지점을 형상화해낸다. 개념적 차이를 발생시키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권력과 부를 확인하는 시스템은 비단 소설적 허구로 머무르지 않는다. 읽는_존재가 포함되어 있는 지금 여기의 세계 역시도 그러한 구조로 되어 있는 까닭이다. 불안은 밤처럼 짙다.
정착할 수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그들은 서서히 약탈자로 변해갔다. 적어도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랬다. 물론, 그자들이 빼앗아간 게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마침내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게 됐다. 혹은 두려워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국경의 안쪽에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 즉 두려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됐고, 국경에 긴장이 감돌았다. - 120쪽
계급과 부의 수준에 따라 갱신되는 신체의 이미지는 불안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소설 내부의 세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새로운 수준의 공포를 개발해내고, 그것의 전유와 분배를 통해 개별주체들을 옥죈다. 계급의 수단으로 동원되는 '전쟁'은 그 자체의 목적성을 상실한 채 잉여의 삶들을 사막, 황무지로 내몰아가는 것으로 유지된다.
공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개별주체의 불안을 자극하고, 그것으로부터 계급과 상징질서의 안정성을 도모하는 것은 비단 소설세계 내부만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이미 읽는_존재 역시도 이러한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밤'이 선사하는 점진적이고 영원할 것만 같은 공포는 이미 여기의 일이다. 멀리 떨어진 소설세계만의 판타지적인 상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디스토피아는 바로 여기,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적들은 과연 언제 사라질 것인가. 벌써 두 세기가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전쟁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세상은 이미 전쟁중이었는데, 그게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적이 누구인지 무엇을 약탈하는지 신경끄는 이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 거지같은 전쟁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우린 그저 여기서 제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 129쪽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벌써 출장소 앞엔 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 플래카드, 피켓 등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불안과 의혹에 빠져 있었고, 알레한드로라는 낯선 청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다른 존재 앞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 끔찍하고도 기괴한 외계인에 관한 수많은 괴담, 영화, 소설이 그걸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 212쪽
결국 알레한드로의 난민 인정 신청은 거부당하고 말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문을 나서는 과테말라 청년에게 심사관 대리가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아직 이의 신청 절차가 남아 있기도 하고…… 어떻게든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테니까요. 희망을 가지라고요."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소용없는 일로 여겨졌다. 생각해보니, 과테말라시티의 쓰레기산 인근에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후의 모든 운명을 예고하는 전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지구 위 어딜 가도, 그리고 만에 하나 이곳, 생전 처음 발을 딛는 아시아의 낯선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해도, 그는 영원히 거대한 쓰레기산과 그 사이를 휘감으며 흐르는 폭포수같은 썩은 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어떻게 보면 그가 쓰레기산에서 살았던 게 아니라, 쓰레기산이 그의 내부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알레한드로는 대기실의 딱딱하고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그는 그들 안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는 건 무엇일지 궁금했다. - 213쪽
'알레한드로'와 '박흥수'의 경험은 쉽게 외부사람들에게 그 진실성을 확인받지 못한다. 그들의 체험이 신비로워서일 수도 있으나, 보다 중요한 지점은 그 체험의 비사실성과 환상성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알레한드로'라는 인물이 원래 외부의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부부'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서사의 줄기는 그들의 신비로운 경험과 출현에 방점을 찍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사의 목적은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흔히 읽는_존재가 알고 있는 <파이이야기>같은 형식의 서사물과는 다른 목적지를 향해 이 소설을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알레한드로'라는 인물이 도망쳐 나온 '과테말라시티'의 '쓰레기산'을 주목해본다면 더욱 명징해질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하나의 탈출기인 동시에 탈출해온 탈주양/속죄양을 새로운 영토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방인 서사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상기되는 2015년의 '쿠르디'를 기억한다면 이야기 자체의 결은 더욱 명확해지며, 이 상황에서 외부사람들이 '알레한드로'의 경험을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이중의 포획망을 구성한다는 것 역시 확실해진다.
체험의 진실성, 사실성의 문제는 전자의 문제다. 그 체험이 과연 과학적으로 사실적으로 믿을만 한가의 판단 여부를 가리는 것은 소설 후반부의 삽화로 해결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두번째 지점에 존재한다. 이중의 포획망 중 후자, 즉 외부인_이방인에 대한 정주민_정착민의 인식성은 전혀 다른 문제점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억압과 배제의 형식으로 구조화된다. '난민'에 대한 인식과 배제의 형식은 결코 낯선 서사만의 것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된 이 지점에 대한 인식을 읽는_존재는 무엇으로 해야만 하는가. 서사는 진득하게 묻고 있을 뿐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다 말고, 난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뒤로 돌아섰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홀로그램 우주: 실전편』의 속지를 펼쳐 물리학자에게 내밀었다.
"저어…… 아까 말한 그 날짜, 적어주시겠어요? 배와 사람들. 내가 모르고 있는게 뭔지, 그리고 우리가 망각해가는 것이 뭔지, 알고 싶어서요."
그는 볼펜을 꺼내더니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일곱 개의 숫자를 천천히 적어나가는 것이었다. - 258쪽
기억의 반대편에 망각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망각은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과정인 것만 같다. 망각이라는 처리과정이 부재한다면 자아는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지만, 나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각은 언제나 나의 편이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읽는_존재'나 '우리'같은 허명을 벗어내고 나는 나에게 묻는다. 정말 망각은 자아의 편일까.
그것은 나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약藥과 같은 것이자, 나의 삶을 어느때보다 병들고 가난하고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서사는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 2014년 4월 16일의 기억을 망각해가는 자연스러운 삶의 패턴에 순종하고 있는 나에게 온갖 물리학적 첨단과 예술가적 파괴력을 동원해서 말을 건넨다. 서사는 서스펜스와 추리를 통해 한 존재의 죽음을 압도하고 있는 비밀로 나아가는 동시에 예술가적 파괴력이 점철된 지하의 공간을 그려냄으로써 나를 소설 내부의 세계로 이끈다. 내 손길을 잡아채는 강렬하고 단호한 손길에서 어떤 간절함 같은 것마저 읽힌다고 평한다면 나는 너무 과장하는 것일까.
과장은 무엇인가. 서사에서 과장은 무엇을 담지하고 있는가. 바로 그것은 진심 아닌가. 감정의 양태를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강렬해진 진실의 파형은, 읽는_존재인 나와 맞닥트려 나의 세계를 박살내고 나의 자아를 조롱하며, 나의 자아가 가진 형편없이 약한 부분을 물고 늘어진다. 그럼으로써 독서의 전 과정은 파괴로 점철된다. 읽는_존재를 완전히 폐허로 내모는 것이다. 소설가, 쓰는_존재가 꿈꾸는 지고의 목적지일 그곳에, 나는 당도하고야 만다. 진심에 압도되고 나의 무력함에 손을 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