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예전부터 사랑은 성애 아니면 숭고한 희생으로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의 사랑은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성애만으로 격렬하지도 않고, 숭고한 희생은 일상에 끼어들 틈이 없다. 지극히 평범해서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 갸웃거리게 되는 정도의 감정을 품고 일상의 존재,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초라하지도 비범하지도 않다. 지극히 평범하고 보통의 정도로 아름답다. 내밀한 사랑은 언제나 평범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볼 뿐이다. 그 얼굴의 평범함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 얕은 한숨같은 사랑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듣지 못하는 자를 듣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한다. 이렇게 말하면 기적의 어느 순간 같지만, 레이먼드 카버는 이 전환의 찬란한 순간들을 과장하거나 섣불리 숭고화하지 않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사건의 연속 내부에서 인물은 변화하고, 그 변화가 담지하는 고뇌의 순간들은 결코 숭고하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인, 변화의 순간. 그럼에도 아름다울 수 있는 비_숭고의 스위치. 켜뒀던 텔레비전을 끄는 순간부터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책장을 펼치는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들이 수식이나 과장을 덜고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나'와 아내인 '프랜'은 '버드'의 저녁시사에 초대되어 '버드'와 그의 아내인 '올라'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나'와 '프랜'이 마주치는 사물들, 대상들, 타인들은 모조리 이상한 느낌을 환기할 뿐이다. 낯설게 두드러지는 자아 외부의 형상들은 '나'는 물론이고 '프랜'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 하다. 천천히 이어지는 기다림과 식사시간,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낯선 존재들 사이에서 '나'와 '프랜', 즉 '우리'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꿈을 꾸게 된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낯설고 이상한 소망을 말이다. '새 차'나 '좋은 집'이 아닌 욕망은 '나'와 '프랜'에게 있어 낯설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왜, 이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소설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꿈이 생겨나는 어떤 지점의 낯선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그 어떤 가치판단이나 실마리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소설은 돌연 입을 닫는다. 해줄 말은 여기까지라는 듯.
읽는_존재는 처음에 당황을, 차례로 어떤 인상의 연속을 감각하게 된다. 보통의 소설에 기대하는 당연하다시피한 담론들의 부재가 주는 생경한 감각에 놀라는 것이 처음이고, 소설이 심드렁한 말투로 그려내는 신비한 광경들이 머릿속에 오래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놀라움이 다음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그려졌다거나하는 외부적인 사실들이 아니다. 읽는_존재의 내부에 어떤 풍경들이 잔여물로, 찌꺼기처럼 남았다. 이 지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프랜이 머릿칼을 빗질하는 저녁이면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는 없지만 꼭 갖고 싶은 것들을 소리 내어 말하곤 했다. 새 자동차를 가질 수 있다면, 같은 게 우리가 소원 삼아 말했던 일들 중 하나다. 또 두 주 정도 캐나다로 여행을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반면에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 중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없었던 건, 우리가 한번도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낳겠지, 라고 서로 말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우리는 미뤄두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미루기만 하겠지, 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어떤 밤에는 영화는 보러 갔다. 어떤 밤에는 그냥 집에서 TV를 봤다. 때로 프랜이 뭘 수워오면 우리는 나란히 앉아 남김없이 먹었다. - 14쪽
일상적인 풍경이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다. 두 사람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두 사람의 다른 욕망들을 충족하기 위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함께 소망할 수 있는 욕망들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 일은 자질구레하거나 남루하지 않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생기는 여유와 나른함이 두 사람의 욕망을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마당에는 아기용 그네 세트가 있었고 포치에는 장난감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나는 집 앞에 차를 바짝 붙인 뒤, 시동을 껐다. 우리가 난데없이 끔찍한 울음소리를 듣게 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집에 아기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아기 우는 소리라기엔 너무나 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프랜이 물었다.
그때, 콘도르만큼이나 몸집이 큰 녀석이 날개를 펄럭이며 나무 위에서 덮치듯 날아와 자동차 바로 앞에 내려앉았다. 녀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긴 목을 자동차 쪽으로 돌리더니, 고개를 곧추세우고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하느님 맙소사." 내가 말했다. 나는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핸들을 꽉 잡은 채 그놈을 바라봤다.
"세상에, 저 새를 두 눈으로 보는 건 난생처음이야." 프랜이 말했다.
물론, 우리는 둘 다 그 새가 공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단어를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 새는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더니 다시 끽끽대는 그 울음소리를 냈다. 녀석이 몸을 부풀리자, 처음 내려앉았을 때보다 몸집이 두 배 정도는 커보였다.
"하느님 맙소사." 내가 다시 말했다. 우리는 나가지 않고 앞좌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새가 조금 앞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더니 녀석은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뒤, 몸에 힘을 주었다. 그 밝고 야성적인 눈동자는 여전히 우리에게 고정돼 있었다. 그놈의 꼬리가 올라갔다. 꼬리는 접었다 펴는 부채와 비슷했다. 그 꼬리로부터 다채로운 무지개 빛깔들이 뿜어져나왔다.
"하느님." 프랜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는 내 무릎 위로 손을 뻗었다.
"하느님 맙소사." 내가 또 말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 새는 그 괴기하고도 구슬픈 울음소리를 한 번 더 냈다. "메이오, 메이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깊은 밤, 생전 처음 그런 소리를 듣게 됐다면, 아마도 나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고, 혹은 야생의, 위험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18쪽
하지만 이 나른한 풍경과 완만한 소망들은 낯선 공간, '버드'와 '올라'의 교외에 위치한 집에서 산산히 부서진다.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두 사람이 차창을 통해 처음 본 대상이 그 지점을 명확하게 전달한다. 꼬리깃털을 펼친 '공작'의 이미지는 지극히 환상적인 동시에 지극히 사실적인 양식으로 그려지기에 동화적이라거나 아름다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지나치게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된다.
올라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그녀는 화면을 바라봤다. 올라는 루트비어를 마셨고, 그 이상 할 말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치과의사, 기술이 좋았나봐요." 프랜이 말했다. 그녀는 TV 위에 있는,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그 이빨을 다시 바라봤다.
"대단했죠." 올라가 말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몸을 돌리며 "보세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우리에게 치아를 한 번 더 보여줬는데, 도무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버드는 TV쪽으로 가서 치형을 집었다. 그리고 올라 쪽으로 가서 그걸 올라의 뺨에 들이밀고 말했다. "교정 전과 교정 후."
올라는 손을 뻗어 버드가 쥔 치형을 받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그 치과의사가 이걸 가지려고 했어요." 그녀는 무릎 위에 치형을 잡아놓고는 말을 계속했다.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지요. 그건 내 이라고 의사한테 따끔하게 못박았어요. 그랬더니 사진을 찍어놓더라구요. 그 사진을 잡지에다 실을 생각이라고 하던걸요." - 25쪽
'치형'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와 '프랜'에게 익숙한 풍경일 'TV' 위에 올려진, 낯설고 생경한 '치아 석고 모형'은 현실을 아주 색다른 결로 치환시키는 동시에, TV를 보는 구체적이고 익숙한 행위마저 낯선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공작'의 존재가 그러했던 것처럼, '치형'이 주는 이미지 역시 일상을 파괴하는, 도드라진 (자아 아닌)어떤 것이다. 타인은 사건으로 돌출한다던 들뢰즈의 말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자아라는 작고 협소하고 연약한 존재가 타자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와 마주쳐서 변화하는 이 과정은 충분히 사건 그 자체이다.
읽는_존재 역시 하나의 자아로 살면서 자신을 파괴하며 밀고 들어오는 낯선 타자의 존재를 감지한 적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온전히 자아를 이전의 모습과 다른 형질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며, 이 경험 자체가 어떤 분수령으로 지각되는 바람에 사건이 자아에게 영향을 미친 것인지, 아니면 타자의 존재가 자아에게 영향을 미친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 경우도 많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읽는_존재는 '공작'의 날카로운 울음 소리나 울퉁불퉁한 '치형'은 분명한 타자로, '나'와 '프랜'의 자아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주는 그 무엇이 되었음을 안다.
집 뒤쪽에 있는 방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걘 아니겠지." 올라가 버드에게 말하곤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 아기야." 버드가 말했다. 그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우리는 아무 소리 없이 서너 바퀴 남은 자동차 경주를 지켜봤다.
한 번인가 두 번인가 그 아이가 우는 소리, 집 뒤쪽 방에서 울려퍼지는 작으면서도 신경에 거슬리는 그 울음소리가 들렸다. - 27쪽
우리는 접시를 모두 비웠다. 그때 그 빌어먹을 공작이 내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 그놈은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잇었다. 지붕의 널판을 밟고 다니는지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났다.
버드가 머리를 흔들었다. "곧 조용해질 거야. 제풀에 지쳐서 금방 잠들 테니까." 버드가 말했다. "저기 어디 나무에서 잠을 자거든."
그 새는 한번 더 울음소리를 냈다. "메이오!"하는 소리.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달리 할말이 뭐가 있겠는가. - 30쪽
소리, 소리들은 비가시적이다. 시각적인 정보에 의지해 살아가는 '나'나 '프랜'의 자아는 출처를 확인할 수 소리들에 의해 비형질절이고 비확정적인 상태에 내몰리는 것이다. 이 짧은 소설이 기획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자아의 완전한 무너짐과 그것으로부터 촉발되는 새로운 자아의 형질에 대한 형성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과 물음의 연속은 결국 자아 자체를 비확정적인 상태에 머무르게 함과 동시에 무한한 변형 가능성을 가진 형상으로 바꿔버린다.
아기는 올라의 무릎에 서서 식탁 주위에 앉은 우리를 둘러봤다. 올라는 살찐 다리도 선 아기가 앞뒤로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손을 움직여 허리를 잡았다. 장담하건대, 그렇게 못생긴 아이는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못생겼는지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내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병이 있다거나 기형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못 생겼을 뿐이었다. 엄청나게 큰 붉은얼굴에 툭 튀어나온 눈, 널따란 이마와 비대한 입술. 목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없었고 살찐 턱은 서너 겹에 달했다. 턱의 주름은 귀밑까지 이어졌고 두 귀는 민둥머리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손목도 온통 살투성이였다. 팔과 손가락에도 피둥피둥 살이 붙어 있었다. 못생겼다는 말조차 녀석에게 영예로울 정도였다. - 34쪽
버드와 올라의 집에서 보낸 그날 저녁은 특별했다. 특별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내 인생이 여러모로 썩 괜찮다고 느꼈다. 내가 느낀 걸 프랜에게 말하고 싶어서라도 나는 어서 둘만 있고 싶었다. 그 저녁에 내게는 소원 하나가 생겼다. 식탁에 앉아서 나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열심히 생각했다. 소원이란 그날 저녁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것, 혹은 다시 말해 그날 저녁을 놓아버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원은 실제로 이뤄졌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내게는 불행이었다. 하지만, 물론, 당시에는 그걸 알 도리가 없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건가, 잭?" 버드가 내게 물었다.
"뭐, 그냥 생각." 내가 대답했다. 나는 그를 보며 웃었다.
"멍한 생각." 올라가 말했다.
나는 그저 웃다가 머리를 저었다. - 40쪽
두 사람이 가지게 된 새로운 욕망은 지극히 일반적인 형태의 가족 단위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변화를 기도한다. 일반적인 문법이 아닌 양식으로 쓰인 소설이 일반적인 형질의 가족을 향한 욕망을 촉발시킴은 가족 자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희일까. 하지만 이는 올바른 해석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나'의 술회에서 그 지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나'와 '프랜'이 유희의 일종으로 욕망의 목록을 이어 말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아이'에 대한 욕망은 유희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라는 타자는 욕망의 형태로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기인하는 특정의 타자로 도래했으며 '나'에게 '불행'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결국 소설은 가족에 방점을 찍지 않고, 자아의 확장과 변형, 그리고 그 과정이 꼭 긍정적인 지대를 향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보여줄뿐이다. 책은 이제 막 처음의 소설을 보였을 뿐이다.
노동하는 존재는 노동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자본을 획득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노동의 과정 자체가 노동자의 자아를 보증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의 과정에서 배제된 노동자는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는 동시에 벌충할 수 있을까. 오래 생각해도 대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멀쩡하던 냉장고가 작동을 멈추고 자신 내부에 보존하던 음식물들을 훼손하는 모습은 소파 위에 널부러진 노동자 '남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토탄 구덩이' 속에서 발견된 미라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과 중첩되며 '남편'이 감지하는 불확정적인 현재에 대한 답답함과 공포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제 길게 이어질 소파위에서의 삶은 충분히 비극이리라.
해고된 다음날에는 실업수당 수속을 밟아야 했다. 그는 시내에 있는 주 정부 사무소로 가 지원용지의 빈칸을 채우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봤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분야든 그렇지 않은 분야든 일자리는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몰려든 남녀들이 관해 샌디에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땀이 흘러 내렸다. 그날 저녁, 그는 다시 소파로 돌아갔다. 그는 하루종일 소파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이제 어떤 일자리도 구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가끔은 일자리가 있을까 해서 사람을 만나러 나가기도 하고, 두 주에 한 번씩은 서류를 작성하고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소파에 있었다. 소파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샌디는 생각했다. 그는 거실living room에서 살고 있다고. 이따금 그는 그녀가 식품점에서 가져온 잡지를 훑어 보기도 했다. 그녀가 북클럽에 가입해 공짜로 얻게 된 두꺼운 책을 들여다 보는 그의 모습도 꽤 자주 볼 수 있었다. '과거의 미스터리'라던가. 그는 두 손으로 그 책을 들고서 지금 읽고 있는 문장에 모든 걸 빼앗긴 사람처럼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살펴보면 페이지는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늘 같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마도 제2장 정도쯤일 거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한번은 샌디가 그 책을 들고 그가 읽던 페이지를 찾아본 일이 있었다. 거기에는 네덜란드의 어느 토탄土炭 구덩이 속에서 이천 년 만에 발견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페이지에는 사진 한 장이 같이 있었다. 그 사람의 이마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얼굴은 평온했다. 그 사람은 가죽 모자를 쓰고 한쪽으로 누워 있었다. 그 사람의 손발은 오그라들어 있었지만, 그외에는 그다지 끔찍한 데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책을 조금 더 있다가 그 자리에 다시 놓았다. 남편은 쉽게 손이 닿을 수 있도록 소파 앞에 있는 다탁 위에 책을 놓아뒀다. 빌어먹을 놈의 소파! 그녀로서는 다시는 그 소파에 앉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옛날에 그 소파에 누워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그녀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59쪽
만약 남편이 외상을 입었거나 병에 걸렸다면, 그러니까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그 비슷한 경우였다면 분명히 견뎌냈을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안다. 그랬다면, 그가 소파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해도 거기까지 음식을 갖다줬을 것이며 숟가락으로 입에 떠다 먹일 용의도 충분히 있었다. 그건 순애보적인 느낌도 다분히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 젊은데다 몸도 건강한 그녀의 남편이 화장실에 갈 때나 아침에 TV를 켜고 저녁에 TV를 끌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소파를 차지하고 있다는건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 한번을 빼고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친구, 그러니까 이십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다던 삼촌을 둔 그 친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 61쪽
비극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앤'과 '하워드'의 아들인 '스코티'가 자신의 생일에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음주 월요일에 있을 아들 '스코티'의 생일을 위해 주문했던 케이크는 자연스레 '앤'의 기억속에서 사라진다. 비극은 그 어떤 약속이나 합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약속의 잊어버림, 일시적인 망각은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형질로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정말 큰 비극은 '빵집 주인'은 이들 부부에게 닥친 비극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침해당했다는 이유로 이들 부부에게 악의 섞인 전화를 걸 수도 있다는 사실이리라. '스코티'의 생사가 선을 타고 넘실거리는 동안 쉴새없이 울리는 신경질적인 전화벨 소리는 '앤'과 '하워드'에게 소통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동시에 세계로부터 주어진 비극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시발점이 된다.
타인의 고통은 언제나 피상적인 층위에서 머무른다. 그것이 이 세계의 유일한 비극이다. '스코티'에게 닥친 사고 역시 부모인 '앤'과 '하워드'에게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앤'과 '하워드'에게 주어진 비극이 '의사'나 '간호사'로부터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부터 빵집이라는 공간으로 향하며 이 비극은 자그마한 삶의 희망을 노출하는데, 그 양상이 사뭇 간절해서 읽는_존재에게 잔상이 오래 남는다. 좋은 소설이 담지하는 협소한 희망, 과대하게 포장하지 않은 위로의 서사는 이렇게 잔인한 양식으로 구축된다.
그녀는 빵집 주인에게 자신의 이름, 앤 와이스와 전화번호를 불러줬다. 월요일 아침에 오븐에서 막 꺼낸 케이크가 준비될 텐데, 아이의 파티는 그날 오후에 열릴 테니, 시간은 충분했다. 빵집 주인은 쾌활하지 않았다. 예의상 주고받는 가벼운 대화도 없이 둘은 최소한의 말만, 필요한 정보만 교환했을 뿐이다. 그 사람 때문에 불편했고, 그녀는 그게 안 좋았다. 그가 한 손에 연필을 쥐고 계산대로 몸을 숙이는 동안, 그녀는 그의 허접한 용모를 살피며 빵장사가 되는 일 말고 그의 삶에서 다른 걸 해보기라도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녀는 애엄마에 서른세 살이었고 그녀가 보기에 모든 사람들, 특히 그녀의 아버지뻘 정도로 늙은 빵집 주인의 나이라면 이런 케이크와 생일파티의 특별한 시기를 지나온 자식들이 있을 게 분명할 것 같았다. 자신들 사이에는 그런 게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그녀에게 퉁명했다. 무례한 건 아니고, 다만 퉁명했다. 그녀는 그와 친해지려고 애쓰는 일을 포기했다. 그녀는 제과점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 길고 육중한 나무 탁자 한쪽 끝에 알루미늄으로 만든 파이 팬들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탁자 옆에는 선반이 텅 비어 있는 철제 보관함이 있었다. 또 거대한 오븐도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컨트리 웨스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92쪽
얼마 지나지 않아, 하워드가 깨어났다. 그는 다시 아이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 뒤, 창가로 걸어가 앤의 곁에 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주차장을 빤히 쳐다봤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제 그들은 서로의 가슴속까지도 느끼는 듯했다. 마치 걱정을 많이 하다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온몸이 투명해진 사람들처럼. - 105쪽
'온 몸이 투명해진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앤'과 '하워드'는 비로소 제대로 소통할 수 있게 된다. 하나의 동일한 비극을 경험하는 동안 자아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 하나의 경험 내부에서 조우했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마주침의 형상은 사랑, 성애라기보다는 차라리 동지애에 가깝다.
'스코티'라는 어린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묶인 공동체의 일원인 '앤'과 '스코티'는 일상과 유리된 공간인 병원 내부에서 '스코티'에게 주어진 비극의 실마리를 찾으려 고군분투한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유일한 과제는 '스코티'의 삶이 유의미한 형태로 다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을만한 근거를 찾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이라는 공간은 그 무엇도 확정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어쩌면 과학이나 의학의 영역 바깥에 있는 일이기도 하며, 무수한 우연의 반복과 겹침으로 만들어지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약속할 수 있는 영역은 생각보다 협소하다.
그녀는 외투를 입고 선 채로 잠시 의사가 정확하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가 한 말 말고, 그의 말 이면에 어떤 뉘앙스나 어떤 암시가 있었는지 따져보며. 그녀는 의사가 몸을 수그리고 아이를 진찰할 때 조금이라도 표정이 달라진 게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아이의 눈꺼풀을 들춰보고 숨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태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던 의사의 얼굴이 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났다. - 108쪽
때문에 '앤'과 '하워드'에게 '의사'의 말은 언어 자체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언어의 뒤에 존재하는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뉘앙스나 어떤 암시'를 기억하려는 두 사람의 집착은 언어를 불신하는데서 머무르지 않고 언어 자체의 무용함을 증명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간다.
소설이 언어를 통해 구축되는 예술 장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 이 지점이 얼마나 큰 슬픔을 담지하고 있는지, 읽는_존재는 순간 아득해진다.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두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의 형상은 최근의 많은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비극은 어쩌면 동일한 형상으로 도래해, 각기 다른 형질의 고통을 창출하는 무엇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자아가 언제나 이 비극 앞에서 절대적으로 무력하리라는 뼈져린 예감이다.
다시 앤은 여전히 자신을 지켜보는 여자애를, 그리고 머리를 수그린 채 이제는 두 눈을 감은 나이든 여자를 쳐다봤다. 앤은 그 입술이 소리없이 움직이며 말을 만드는 것을 봤다. 그 순간 앤은 무슨 말이냐고 너무도 묻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종류의 기다림이라는 상황에 처한 이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도 두려웠고, 그들도 두려웠다. 다들 그런 공통점이 있었다. 그녀는 그 사고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다. 스코티가 어떤 아이였는지 그들에게 더 얘기하고, 또 사고가 월요일, 그러니까 그 애의 생일에 일어났다는 것을, 그런데 그 애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 110쪽
의사는 그들을 따라 병원 현관까지 걸어갔다. 사람들은 병원으로 들어오거나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 오전 열한시였다. 앤은 자신의 두 다리가 너무나 천천히, 거의 마지못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마땅히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병원에 있는 게 더 옳은 일인데, 닥터 프랜시스는 자신들을 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차장을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병원 현관을 돌아봤다.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요." 그녀는 말했다. "이렇게 놔두고 갈 순 없어. 안 돼." 그녀는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듣고는, 흘러나오는 말이라는 게 고작 TV 프로그램 같은 데 보면, 폭력이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넋이 빠진 사람들이 쓰는 그런 따위라는 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말을 원했다. "안 돼"라고 그녀는 말했고, 어떤 이유에선가 축 늘어지던 흑인 여자의 머리통이 떠올랐다. "안 돼." 그녀가 다시 말했다. - 118쪽
다시 한 번 언어는 부정된다. 비극 앞에서 유효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언어의 자리를 대리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앤'의 뇌리속에서 이내 다시 부정된다. 그 어떤 것도 아픔을 표상할 수 없다는 이 엄청난 비극에 대한 자각은 예술성을 떠나 견디기 어려운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읽는_존재가 떠올리는 유사한 사건들의 총합은 결국 이 세계가 자아 하나하나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는지에 대한 분노나 경멸로 이어지기 쉽다.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 과연 답은 존재할 수 있는가.
"아마도 제대로 드신 것도 없겠죠."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먹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가 말했다. - 127쪽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읽는_존재는 다시 한 번 희망의 가느다란 존재에 귀기울이게 된다. 따뜻한 '빵집'이라는 공간 내부에서 '앤'과 '하워드'는 어떤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고 위로받게 된다. '스코티'는 다시 살아날 수 없지만, 삶은 잔인하게도 계속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 무엇으로 세계의 지속성을, 이 세계의 영속성을 미약하게나마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 이렇게 오는 것이다.
이 알콜중독자의 삶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중독이라는 것을 유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은 천천히 묻는다. 그 무엇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그'는 아내 '이네즈'와 별거하는 상태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알콜중독자이기 때문이지만 그들의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다보면 '그'는 '이네즈'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귀지'를 빼내는 두 사람의 작업은 섬세하고 일견 희극적이다. 하지만 언제든 다시 막힐 수 있는 귀처럼, 두 사람의 행위는 순간적인 처방에 불과하며 영원한 소통의 가능성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설은 나즈막히 말함으로써 비극의 결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비극일 이 소설 앞에서 읽는_존재는 독서의 행위를 잠시 멈춘다. '그'가 가진 관계의 불가능성과 소통의 불가능성은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인간다움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는 읽는_존재 모두가 '그'와 다르지 않다. '귀지'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영원히 중단시킬 그 어떤 방법도 가지지 못한 나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이다. 이제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가난해졌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얼마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작은 식탁 의자에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그는 스스로 샴페인으로만 절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샴페인마저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제 모든 게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왔을 때, 그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에 쏟은 물건들 중에서 담배 하나를 끄집어냈다.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그녀는 창가에 서서 거리를 바라봤다. 그녀가 뭐라고 말했지만, 그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말을 그치고 난 뒤에도 그는 뭐라고 말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든 그녀가 재차 말하는 걸 그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담뱃불을 껐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댄 채,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지붕이 그녀의 머리에 닿을 듯 가까웠다. - 165쪽
이미 돌아온 이네즈는 오븐 앞에 서서 작은 팬에다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그가 있는 쪽을 힐끔 바라봤지만,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 너머 창문 밖을 바라봤다.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가더니 부리로 깃털들을 다듬었다. 새소리를 냈는지 어땠는지, 그로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지만, 그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 했어?"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더니 오븐 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큰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고, 이번에는 그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욕실에다 뭘 감춰놓았더라."
"줄이려고 애쓰는 중이야." 그가 말했다.
그녀가 뭐라고 말했다. "뭐라고?" 그가 물었다. "뭐라고 한 거야?" 진짜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 167쪽
그는 머리를 돌리더니 아래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그는 새로운 시각에서 방에 있는 물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옆으로 누웠다는 사실만 빼고 그전에 바라볼 때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더 숙여." 그녀가 말했다. 의자를 붙들고 중심을 잡으며 그는 더욱 머리를 낮췄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그의 인생에 들어찬 모든 사물이, 그 방의 한쪽 멀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귀속으로 들어가는 따뜻한 액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선 그녀는 행주를 들고 귀에 갖다댔다. 잠시 뒤, 그녀는 그의 귀 주위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턱과 두개골이 맞붙는 지점의 말랑말랑한 살을 눌렀다. 그녀는 귀의 윗부분에 손가락을 대고 손끝으로 여기저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는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이 거기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십 분은 족히 지났을 것 같았다. 그보다 더 오래였을지도 몰랐다. 그는 여전히 의자를 잡고 있었다. 가끔가다 그녀의 손가락이 옆머리를 누를 때면 그는 그녀가 부은 따뜻한 오일이 귓속의 관 안에서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누르는 방식에 따라 머리 안에서 나지막하지만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169쪽
'미스 덴트'에게는 비밀이 있다. 하지만 곧이어 다른 비밀이 등장한다. '노인'과 '그녀'의 등장은 '미스 덴트'의 비밀과 중첩되어 더욱 위태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두 그룹('미스 덴트'/'노인'과 '그녀')의 비밀은 '대합실'이라는 공간 내부에서 중첩되지만 단 한 번도 발설되거나 공유되지 않는다.
이 기묘하고 서슬퍼런 장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공기만이 멤돌고 있을 뿐 그 이상의 구체적인 사실은 제시되지 않는다. 분위기, 압도하는 분위기의 연속 속에서 결국 읽는_존재는 알게 된다.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자명하고 다소 상투적인 사실을 말이다. 이제 비밀은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이 된다.
미스 덴트 역시 시선을 시계로 돌렸다. 대합실에는 언제 기차가 도착하고 출발하는지 알려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기다릴 준비가 돼 있었다 충분히 기다리면, 기차가 오긴 올 것이고, 그리하여 그 기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 207쪽
미스 덴트는 핸드백을 들고 벤치에서 일어나 음수대로 걸어갔다. 그녀는 음수대에서 물을 마신 뒤, 돌아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노인은 담배를 다 피웠다. 그는 담뱃대에 남은 꽁초를 바라보다가 벤치 아래로 떨궜다. 그는 손바닥에 대고 담뱃대를 한 번 두들긴 뒤, 주둥이 부분에 바람을 한 번 불고는 담뱃대를 다시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는 그도 미스 덴트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여인과 함께 가만히 지켜봤다. 미스 덴트는 정신을 차리고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녀로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핸드백에 권총이 있다는 말로 시작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날 초저녁에 한 남자를 죽일 뻔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 213쪽
그들은 진하게 화장을 한, 장미꽃 색깔의 니트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인이 계단을 밟고 기차에 올라타는 것을 봤다. 그녀 뒤로 여름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은 채 핸드백을 움켜쥔 아가씨가 올라왔다. 그다음에 기차에 오른 사람은 노인으로 아주 천천히, 나음대로 위엄을 갖춰 움직이고 있었다. 노인은 백발이었고 하얀 크라바트를 매고 있었지만, 신발이 없었다. 승객들은 당연히 이 세 사람이 동행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이 밤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이 행복한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승객들은 살아오는 동안 그보다 더 희한한 일들도 봐왔다. 그들도 잘 알다시피 세상은 별의별 종류의 일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이 일은 예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이 세 사람이 통로를 걸어 자기 자리를 잡는 동안—여인과 백발 노인은 서로 나란히 앉았고, 핸드백을 든 아가씨는 몇 자리 뒤쪽에 앉았다—,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생각으로 이어가지 않았다. 대신에 승객들은 역을 바라보며 그 역에 기차가 서기 전에 저마다 빠져들었던 생각, 그러니까 저마다의 문제들로 돌아갔다. - 215쪽
'미스 덴트'와 '노인', '그녀'는 각기 다른 비밀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기차 안의 타인들에게는 같은 그룹으로 인식된다. 두 그룹은 뭉뚱그려져 하나의 비밀을 가진 존재들이 되었다가 이내 중요하지 않은 불특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기차 안에 앉은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존재들인 동시에 다른 승객들과 하등 다를바 없는 풍경의 하나가 되어버린다. 일반적인 서사가 인물과 그 인물이 품고 있는 비밀에 의해 추동되는 것과 반대로, 이 소설은 비밀을 황무지의 영역으로 치환하며 마무리된다. 그 어떤 비밀도 특별할 수 없다는 치욕적인 서사의 항복선언은 전혀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내포한 채로 어두운 철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타인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사실, 대부분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지향점은 여타의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타인의 등장은 언제나 소통의 가능성과 함께 온다. 그것은 타인과의 소통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 없이는 그 어떤 이야기의 가능성도 협소해지는 까닭이다. '굴레'라는 이름을 단 이 서사 역시 마찬가지의 전철을 밟아간다. 하지만 분명 이 소설은 여타의 소설들이 보증하는 방법과는 다른 양식으로 서사를 완성해나간다.
나는 그들이 박스와 여행가방과 옷가지를 부리는 걸 바라본다. 홀리츠는 가죽끈이 늘어진 뭔가를 나른다. 한 일 분쯤 지났을 무렵, 나는 그게 말굴레라는 걸 알아챈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뭘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그래서 금고에서 그랜트를 꺼낸다. 이내 돈을 넣었다가 다시 꺼낸다. 미네소타에서 온 지폐들이다. 다음주 이 시간에는 이 돈들이 어디에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라스베이거스에 있을지도 모른다. 라스베이거스라면, TV에서 본 게 내가 아는 전부다. 겨우 손톱만큼만 알 뿐이다. 이 그랜트 중 한 장이 와이키키 해변이나 다른 어딘가로 간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마이애미나 뉴욕 시티로. 뉴롤리언스로. 마르디 그라에 이 돈 중 한 장이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지폐들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이 지폐들이 원인이 되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그랜트의 훤칠한 이마에다 잉크로 내 이름을 쓴다. 마지. 나는 활자체로 쓴다. 모든 지폐에다가 쓴다. 그의 짙은 눈썹 바로 위에. 돈을 쓰려던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마지가 누구야? 그들은 그게 궁금할 것이다. 마지가 누구야? - 263쪽
관계의 가능성, 소통의 가능성은 일말에 제거된다. 오직 '나'가 새로운 타인으로부터 전해받는 것은 돈일 뿐이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지폐의 형상은 그 어떤 특이한 지점도 형성하지 않는다. '나'가 그 타인들에게 느끼는 감정의 양상 역시 피상적인 수준으로밖에 유지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서사는 다른 방식으로 약동하기 시작한다. 관계의 가능성이나 소통의 가능성이 아닌 전혀 다른 지점의 발화양식이 움트는 것이다. 그것은 '나'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양식이다. 타인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인물의 모양새는 한없이 작고 협소하다. 그리고 서사 역시 그렇게 한정된다.
그녀는 다시 손을 내게 맡긴다. 그녀는 아직도 말할 게 남아 있다. "옛날에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상담교사가 상담실로 오라고 하더라구요. 모든 여학생들과 한 번씩 그렇게 면담시간을 가졌죠. '너는 꿈이 뭐니?'라고 그 여자가 묻더라구요. '십 년 뒤에 네가 어떤 모습일 것 같니?이십 년 뒤에는?' 열입곱 아니면 열여덟이었어요. 애였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 상담교사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 됐을 거에요. 늙었다고 생각했죠. 늙은 여자야, 라고 혼자 생각했어요. 그 여자의 인생은 이미 반이 지나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모르는 뭔가를 나는 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녀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걸 말이에요. 비밀이라고나 할까.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그래서 잠자코 있었어요. 머리만 저었을 뿐이에요. 멍청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걸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는 누군가 내게 그 질문을 다시 하면, 그러니까 내 꿈에 대해 묻는다면 말할 수 있어요." - 273쪽
어렵게 만들어진 소통의 장 역시 허망하게 이어질 뿐이다. '나'는 '그녀'를 고객으로 대하고, '그녀' 역시 '나'를 미용사, 혹은 헤어디자이너로 대할 뿐이다. 관계의 가능성은 협소한 그 상태 그대로 머무르게 되는 동시에 '그녀'의 독백 역시 '나'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의 긴 독백은 '나'가 마음대로 '그녀'를 추측하고 재구성하게 만드는 질료가 될 뿐이며, 이러한 관계성은 오히려 소통의 불가능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다.
조리대는 닦아놓았고 싱크대와 찬장도 깨끗하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 나는 가스레인지 위에 청소용품을 올려놀고 화장실을 한 번 둘러본다. 철수세미로 문지를 만한 게 하나도 없다. 그런 다음 나는 수영장이 내려다보이는 침실의 문을 연다. 블라인드는 걷어놓았고 침대 시트는 벗겨놓았다. 마룻바닥은 반짝인다. "고마워요"라고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그녀가 어디로 가든 행운이 함께하기를 나는 기원한다. "잘 되길 바라요, 베티." 옷장 서랍 하나가 나와 있어 나는 닫으려고 거기로 간다. 서랍 안쪽 구석에서 나는 그 남자가 처음 찾아왔을 때 들고 온 말굴레를 본다. 서둘러서 떠나느라 빼놓고 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남자가 일부러 두고 갔을 수도 있다.
"굴레"라고 나는 말한다. 나는 그걸 창 쪽으로 들고 가 밝은 빛에서 바라본다. 멋질 수가 없는, 검은 가죽의 낡은 말굴레일 뿐이다. 내가 아는 바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 말의 입에 물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 부분을 재갈이라고 부른다. 강철로 만들었다. 말의 머리 뒤로 고삐를 넘겨 목 부위에서 손가락에 낀다. 말에 탄 사람이 그 고삐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면 말은 방향을 바꾼다. 간단하다. 재갈은 무겁고 차갑다. 이빨 사이에 이런 걸 차게 된다면 금방 많은 것을 알게 되리라. 재갈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 때가 바로 그때라는 걸. 지금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 284쪽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나지막히 전한다. 아니, 이 지점에서도 '그녀'는 '나'의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것은 그저 서사의 가난한 형식일 뿐인가. 읽는_존재는 '말굴레'의 이미지와 그 어떤 소통도 하지 못하는 '나'의 이미지가 중첩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말굴레'는 누구의 손에 주어졌으며, 그런 점에서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인물은 궁극적으로 누구인가. 농장 운영에 실패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된, 거기에 더해 남편의 부상으로 고통을 받게 된 '그녀'인가, 아니면 주택관리인과 헤어디자이너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도 그 어떤 다른 공간에도, 그 어떤 타인에게도 가닿지 못하는 '나'인가.
이 소설은 지나친 슬픔으로 읽혀야 한다. 시각장애인의 손을 잡고 있는 비장애인의 간절함에 주목할수록 이 소설은 더욱 비극일 수 밖에 없다. 한 명의 자아가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순간이 주는 감동에만 집중해서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하나의 자아가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여 정동하는 순간에도, 그러니까 시각장애인의 손을 잡고 하얀 종이 위에 아무리 그럴듯한 대성당의 모습을 그려낸다 할지라도 시각장애인의 심상에 새겨지는 새로운 대성당의 외형은 비장애인인 자아로서는 추측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비극을 감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 대성당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지에 대해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보증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지극한 슬픔 앞에서 자아는 비로소 가난을 감지한다. 이제 문제는 보다 복잡해졌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의 사실은 무엇으로부터 그 진리성을 벌충받는가. 이제 이 소설은 아주 잔인한 방향으로 읽는_존재를 이끌고 간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이 세계에 던져진 우리는 그저 손에 손을 잡는 행위로밖에는 위로받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위로는 그 무엇도 만들어내지 않으며 그 어떤 진리에 대한 사실성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성당을 그려내는 두 개의 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 소설이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불리는 데에 대한 거대한 조롱을 나타낸다. 이것이 어떻게 리얼리즘의 풍경인가. 그려진 대상물과 실제 대상 사이의 거리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데, 어떻게 리얼이 제대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환상소설이다. 가능하지 않은 대상을 꿈꾸는 것이 환상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사실 환상소설 리얼리즘소설을 구획하는 것은 유행이 지난 낡은 것이기도 하기에 이 논의는 돌림노래처럼 원래 자리에서 끝나지만, 그럼에도 이 환상적인 풍경은 충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