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과 해변의 신, 여성민
책을 펼치니 아름다운 문장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읽는_존재인 나는 쓰는_존재인 여성민에 비해 지정학적으로 약자일 수 밖에 없기에, 그 문장들을 다 주워 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쓸려가도록 두지도 못하고 허우적 거릴 뿐이었다. 문장과 문장의 사이에서 헤매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숨벙숨벙 잘려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새벽이기도 했고, 아직 한밤중이기도 했다.
잠에 들기 전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희미한 독서등에 기대어 문장을 밝히는 순간에도 팔목은 시큰거렸고, 꿈결 마저도 우지끈 소리를 내며 주저 앉았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눈을 뜨면 주변은 공허했고 그저 비어있다는 사실만이 가득 차 숨이 찼다. 어두워서 사물이 구분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머리맡에 둔 책을 만졌다. 사사삭 소리를 내며 손 밑에서 책표지가 따뜻하게 데워졌다. 작은 생명을 만지듯, 오래 같이 산 반려동물을 쓰다듬듯 그렇게 있으면 꿈은 다시 찾아왔다. 좋은 꿈도 나쁜 꿈도 아닌 꿈을 길게 꾸고 나면 아침이었고 평소보다 햇살이 얕게 내려앉아 있었다. 겨울이었다.
베케트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베케트는 아니었다. 그럼 누구인가. 어떤 사람의 글과 비슷한가.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기라성을 떠올리다가 이내 모두 무너트렸다. 여성민은 여성민인 채로 두는 것이 적합하다는 식의 뻔한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극적으로 낯선 소설가를 사랑해버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여타의 소설들과 다른 형질이라 구분하기 어려웠을 뿐이었다. 기다리던 고도는 영영 오지 않을 예정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소설은 무엇인가, 하고 오래 생각했다. 이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 소설을 잘 쓰는 것에 도움이 되는 물음일까. 아닐 것이다. 물음을 물고 늘어지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보다 좋은 일은 일단 쓰는 것일테다. 아니, 이걸 누가 몰라. 할 수 있으면 진작 했지. 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소설은 무언인지, 와 같은 쓸 데 없는 물음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여성민은 그런 물음을 가지지 않은 작가 같다. 짐작일 뿐이지만,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들 사이에는 그 어떤 연대의식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미지는 이미지와 적극적으로 연대한다. 원래 전혀 다른 지대에서 서식하던 단어1과 단어2가 만나 이미지 대 이미지로 연대한다. 그것이 문학적인 이미지의 구축의 일반적인 방법론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여성민의 소설 내부에 드러난 단어1과 단어2는 전혀 다른 지대에서 온 티를 굳이 벗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다름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모습이다. 친연하지 않는 이미지들은 읽는_존재를 답답하게 하고 감탐하게 하고 결국엔 불화하게 한다. 이 이상은 못 읽겠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작가의 머리통이 앞에 있다면 당장에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야 만다.
다행스럽게도, 읽는_존재 앞에 쓰는_존재는 없다. 글 자체, 이미지 자체, 혹은 사건 자체만 있을 뿐이다. 언어는 글, 이미지, 사건을 적극적으로 직조한다. 아니면 소극적으로 직조한다. 사실 직조의 태도는 정해지지 않는다. 여성민의 글, 이미지, 사건은 적극적이며 배타적이다. 읽는_존재를 세계와 분리시킨다.
이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읽는_존재의 발길을 멈춰 세우는 글, 이미지, 사건이 언어로 직조되어 있다.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할 문장이 있을 것도 같은데, 나는 찾아내지 못한다. 나는 쓰는_존재이고 싶은데 자꾸만 읽는_존재이고, 어쩌면 아무것도하지않는_존재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경미하게 우울하다. 이런 글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누가 읽으랴 싶어서 이렇게 쓰고야 만다. 이런 중언부언이라면 몇십장도 할 수 있다. 아무렇게나 발상하고 발상하는 연속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것. 혹은 배설하는 것.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방식의 글을, 나는 제일 잘 쓴다. 소질이 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좋아하는 방식의 글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불공평한지 알 수 없다.
'밥'과 '밥', 두 명의 밥이 해변을 걷는다. 그런 이야기이다. 그게 전부인데도, 읽는 내내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다. 이게 소설인가 생각하다가도 소설이 자아내는 소설적인 세계가 너무 그럴듯해서 마음을 빼앗기고야 만다. 불에 타고 있는 염소를 보며, 중얼거리듯, 나는 소설을 읽으며 아름다워, 하고야 만다.
비치 발리볼을 하는 하는 사람들 사이로 염소 세 마리가 천천히 지나갔다. 한 마리는 불에 타고 있었다. 아름다워. 밥이 다른 밥의 말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 10쪽
아름다웠겠지. 보들레르가 사랑한 것은 잔 뒤발의 아름다움은 아니었어. 무너지는 선을 사랑했던 거야.
무슨 말이야.
보들레르의 아버지는 보들레르에게 선의 아름다움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해 주었어. 선이라는 것은 그런 거잖아. 형태를 버리면 무너지는 거잖아. 그녀의 육체가 어땠는지 그녀의 영혼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그녀를 하나의 선으로 이해했으니까. 사랑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어. 무너지면 무너지는 대로 아름답다고 느꼈지. 종교라든지 법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형태잖아. 보들레르는 버렸지. 시도 그래. 리듬이라든지 각운이라든지. 버렸지. 저무는 순간과 같은 거야. 여기 해변이 있잖아. 우린 저물기를 기다리고 있지. 지금 우리가 보는 해변은 색과 형태와 선으로 된 해변이야. 밥 이걸 이해할 수 있어?
물론. 이해하지. 이해하고말고. 바다는 넓고 깊고 파랗고. 등대를 둥글고 솟아오르고 빨갛고. 그런 얘기잖아.
그래. 맞아. 바로 이런 얘기야. 저물면 색은 사라져. 형태와 선만 남아. - 26쪽
내가 말했잖아. 저물면 형태는 사라져. 선만 남지. 물론 최후에는 선도 사라지겠지만. 형태는 사라지고 선이 남아. 그때가 가장 아름다워. 그래서 사람들은 해변으로 오는 거야. 우린 기다리는 거야. 이제 곧 사람들이 해변으로 나올 거야. 해변과 사람들이 함께 아름다워지겠지. 우린 총을 사겠지. 해변. 해변에 앉아 있는 사람. 총. 그러면 되는 거야. 모래는 따뜻하고. 이토록 아름다운 해변. 최후의 선을 보며. 우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있지.
한 번 더 말할 수 있지. - 27쪽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떤 당위가 있는가. 시각적인 충격의 정도일 뿐인가. 순간적이고 즉시적이고 일회적인 감상일 뿐인가. 아니다. 아름답다는 단언은 좀 더 복합적인 경로를 통해 도출되는 비명이다. 탄성이 아닌 이유는 탄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름다움을 희석하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일이다. 명백하게 다른 일인데, 나는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밥'과 '밥'의 맥락없는 대화에 휘말리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볼 뿐이다.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밥'과 '밥'이, 두 명의 밥이 해변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 장면은 퍽이나 아름답다고 조용하게 비명지르면서.
우린 둘 다 밥이에요. 당근밭에서 온 밥이 말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친애하는 밥은 아니에요.
내가 이미 말했잖아요. 당근밭에서 밥을 데려온 밥이었다. 둘 다 밥이지만, 친애하는 밥은 없어요. 나는 결코 친애하는 밥이 아니에요. 얘도. 그렇지, 밥?
물론이지. 나는 친애하는 밥이 아냐. 밥이지만.
당근밭에서 온 밥이었다.
남자가 땀을 흘렸다. 난감해하는 것이 보였다. 좋아요. 알았어요. 이 마을에 다른 밥이 있나요? 다른 어깨에 가방을 바꿔 메며 남자가 물었다.
없어요. 이곳에 다른 밥은 없어요. 이 마을 어디에도 다른 밥은 없어요. 우리뿐인걸요.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당신들에게 이 편지를 주고 갈게요. 어쨌든 당신들은 밥이고 이 마음에 당신들 외에 다른 밥은 없으니까요. 나는 편지를 꼭 전해 주어야만 해요.
미안해요. 그럴 순 없어요.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지만 우린 그 편지를 받을 수 없어요. 말했잖아요. 우리 중 누구도 당신이 찾는 밥이 아니에요. 친애하는 밥은 여기 없어요. - 39쪽
'밥'에게 편지가 도착한다. 그렇지만 어느 '밥'에게 온 것인지 몰라서, 두 '밥'은 '남자'가 건네는 편지를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거기에다 '친애하는 밥'이라니, 더욱 받을 수 없는 편지가 된다. '밥'과 '친애하는 밥'은 다른 사람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외국인의 이름과 외국식의 편지 첫 줄이 서로 몸을 바꿔 뒤섞인다. 교묘하다.
한국 작가가 쓴 외국의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는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 이상하고 기묘한 감각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왜, 라는 질문은 사양당한다. 사양당한다는 말이 문법적으로 적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고야 마는 지금처럼, 이 글은, 그리고 '밥'과 또 다른 '밥'과 '친애하는 밥'이 있을 뿐이다. 서로의 존재성을 희석시키며, 어쩌면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리며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런 것 같았다. 미안해요. 나는 이제 밥을 찾으러 가야 해요. 빌어먹을 친애하는 밥.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가방을 메고 남자는 밤이 되어서야 떠났다. 탁자에는 분해된 시계가 그대로였다.
어쩌지. 밥이 말했다.
조립해야지.
나는 조립할 줄 몰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시계를 열어 본 적도 조립해 본 적도 없어.
어떻게든 되겠지. 시계에도 플롯이라는 게 있겠지. 시계의 플롯이 있겠지. - 42쪽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두 사람이 바람에 머리칼 날리는 것을 즐기며 해변으로 걸어갔다. 보기에 좋다. 뒷짐을 지며 밥이 말했다. 해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해변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런 것 같았다. 언덕을 내려가다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들었다. 해변에서 들려오는 노래였다. 듣기에 좋다. 밥이 말했다. 노래를 듣던 밥이었다. 두 사람이 잠시 멈춰서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 존과 존과 존이 두 사람 앞을 지나갔다. 그중에 하나는 드럼을 치고 있었다. 하나는 베이스를 쳤다.
하나는 불에 타고 있었다.
안녕! 존. 밥이 멀어지는 존에게 인사를 했다.
어떤 존에게 인사를 한 거야?
그냥 존이지. 존이면 돼. 무슨 상관이겠어. - 45쪽
위의 소설보다는 명확하지만 여전히 희미한 소설이다. 피카소와 정부情婦와 정부의 자식들이 뒤섞인다. 소설 속 '엄마'는 일상에 잠식당하는 중이다. 포기한 꿈을 붙들고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커피를 내리거나 커피를 리필해주는 일 뿐이다. 설거지를 하거나 뭐 그런 일들만을 한다.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듣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설명한다 말 할 수도 없다.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지 못한 채 좁은 방 안에 있다. 달에 대한 몽상과 망상을 늘어놓다가 결국 혼자라는 사실만을 알아차린다. 피카소의 그림들에서 보이는 큐비즘적인 그 무엇이 달을 연상시키지만 달은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입체적으로 분해된 신체의 일부일 뿐이다. 피카소의 그림보다는 피카소의 난잡했던 사생활이 외려 이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변명일지도 모른다. 설마 그렇게까지 잔인할리가, 하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대부분 들어맞는다.
이미지는 증발한다. 이미지는 예술의 바깥에선 좀처럼 생존하지 못한다. 희박한 산소에 쓰러지는 달 위의 인간처럼 말이다. 이미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장치적인 테두리가 필요하다. 그림에는 캔버스가, 노래에는 멜로디와 비트가, 글에는 플롯과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것들 모두가 테두리이다. 쓰다보니 캔버스, 멜로디와 비트, 플롯과 이미지는 순수한국어가 아니다. 왜 다들 외래어, 그것도 영어단어인지 모호해진다. 그걸 굳이 고쳐도 한자식의 외래어가 될 뿐이다. 순 우리말의 테두리는 어디에 있나. 적확한 번역을 찾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예술적 토양이 말라비틀어진 것인가.
그렇긴 하지만 아이들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어른들이 던진 말들의 쓰레기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쓰레기장을 한번 생각해 봐요. 어른들이 끄다 버린 제품들이 있어요. 어른들은 그걸 대강 분해해서 버리죠. 쓰레기장을 뒤지는 아이들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반짝이는 거예요. 어른들의 손으로 분해되고 버려진 제품들. 그런 것들을 주워서 아이들은 놀죠. 그냥 놀진 않아요. 다시 조립하거나 혹은 다시 분해하거나.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예요. 우선 선풍기를 분해하고 라디오를 분해하고 티브이를 분해해요. 그래서 선풍기에 있던 부품과 라디오에 있던 부품과 티브이에 있던 부품을 아무렇게나 조립하죠. 그럼 이상한 제품 하나가 탄생을 해요. 제품의 모양은 상상에 맡길게요. 아이들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죠. 어른들이 던진 깨진 말들과 어른들에게 들은 슬픈 이야기들. 거기서 '조각조각' 떨어져 나온 이야기들과 '헤체된' 말들과 일부러 '부숴 버린' 단어들을 종합해요. 그런 것들이 날카로운 상태로 마구 뒹굴며 다니니까요. 슬쩍 닿기만 해도 힘줄이 끊어질 만큼 예리한 것도 있고 마구 부셔져 회복 불가능한 것도 있고 이미 썩어서 물컹한 내장들도 있죠. 자라면서 그런 것들이 우리의 뼈가 되곤 하지요. 그러니까 아이들의 몸과 뇌와 뼈는 칼슘이나 미네랄이나 비타민 따위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 60쪽
부러진 것들이 더 날카로워요. - 61쪽
"잘 아시듯이, 원근에 대한 인간의 지각은 학습에 의한 것이랍니다. 사실 우리의 눈은 정보를 입체적으로 보지 못해요. 우리는 사물을 볼 때 그것들을 입체적으로 해석한다고 믿죠. 사실은 달라요. 사람의 눈은 평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랍니다. 뇌도 마찬가지죠. 뇌가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평면의 정보예요. 학습된 정보들과 경험에 의해, 거기에 약간의 상상력이 더해져 입체적인 분석을 하는 것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입체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학습에 의한 것이죠. 피카소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서 우리가 입체라고 지각하는 입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입체를 해체하니까 무엇이 남았을까요? 평면들이 남죠. 잘 아시듯, 그게 우리가 피카소를 입체파라고 부르는 이유지요. 입체적으로 그려서 입체파가 아니라 입체를 해체해서 입체파가 된 거예요. 재미있죠? 그의 그림을 보면 난해한 선의 겹침이라든지 뭉개짐이라든지 앞뒤가 바뀐 것들이 많이 나와요. 귀와 귀가 붙어 있고 눈이 입과 함께 뭉개져 있죠. 해체된 평면과 평면을 늘어놓았기 때문이에요. 여러 장의 평면 도면을 겹쳐 놓는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상상이 되죠? 피카소의 여인들은 그렇게 그려진 겁니다. 평면 위에 해체된 얼굴의 형태로 눈과 코와 입이 겹치고 뭉개지고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피카소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하면 엄마는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해지죠. 카페엔 커피 냄새가 은은히 퍼지고 엄마는 피카소를 사랑해요. - 68쪽
"저, 여기요. 커피 리필되나요?"
손님 중에 누가 분위기를 깨네요. 어딜 가나 꼭 저런 손님들이 있지요. 살짝 엄마의 인상이 구겨지는 게 보이나요? 익스큐즈 미! 그러고는 엄마가 주방으로 향하죠. 엄마가 운영하는 갤러리 카페는 유원지에 있어요. '달과 피카소.' 카페 이름은 낭만적이지만 엄마가 하는 일은 가게 이름과 거의 무관해요. 하루 종일 커피를 내리고 커피를 리필하고 커피 잔을 씻고 또 커피를 내리고 커피를 리필하고 커피 잔을 씻고. 그게 엄마의 일이죠. - 69쪽
이 책에서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이해가능성의 정도는 이 소설집 전체에서 이 소설만이 유일하다. 나머지의 이야기들은 그저 이미지이고 이미지의 연속일 뿐이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체질상 이 소설이 내 취향과 제일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단순히 나의 애인이 좋아하는 노래가 <하얀목련>이라서 그럴까. 왜 그렇게 노래 취향이 올드한 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느새 나도 즐겨 듣게 된 노래가 이 소설의 주요 테마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양희은'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그러니 다들 그이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 소설을 찾아 읽는 사람이 아직도 있었나, 하는 노파심이 드는 것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히잉, 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지만 어서 입을 가려야지. 안 읽는다, 안 읽는다 하면 진짜 더 안 읽게 된다. 분명 다들 읽게 될 것이다. 모두들 '양희은'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정말 괜찮으니 말이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자는 남자를 만났다. 친구나 선배의 자취방은 말할 것도 없고 결혼도 하기 전에 여자 혼자 사는 방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던 남자는 친구들에게 이미 빈대의 신으로 통했다. 여자는 가끔 껍데기까지도 그에게 내주는 꿈을 꾸곤 했는데 어느 날은 여자의 껍질 속에 가만히 들어와 누워 있는 검고 말랑말랑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와 함께 걷다 보면 남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00미터 밖으로 죽어라 달아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야구 선수들처럼 1루에서 2루로 2루에서 3루로 달리다가 우르르 쓰러졌다. 그럴 때마다 혼자 살아온 남자의 쓸쓸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쓸쓸함을 이해하는 것과 한 사람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결혼은 살이 닿는 것만으로 충분하던 연애와는 달라서 피가 밴 살을 이식하는 일과 같았다. 이식한 살에 겨우 적응이 끝날라치면 새로운 부위에 이식할 살이 필요했다. 어느 아침, 여자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가 그녀의 식탁에 앉아 그녀의 토스트를 먹으며 이제부터 소설을 쓰겠노라고 선언했을 때 이 살은 어느 종족의 것일까, 여자는 생각했다. 도마뱀이나 외계의 고기처럼 그것은 여자가 알지 못하는 물질 같았다. 정말이지 아주 멀리, 남자의 손길이 닿지 않아야 함은 물론, 연애가 처벌과 감시의 대상이 되는 먼 나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그렇다는 것을 알았던 여자는 깊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때 결혼을 포기했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91쪽
하룻밤을 낡은 모텔에서 보내고 남자는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의 말로는 그랬다. 그러나 백방으로 뛰어다녔음에도 남자가 구할 수 있는 것은 "장기 방 있음." 이라는 문패가 달린 또 다른 모텔이었다. 말이 모텔이지 사실은 여관보다 방이 작았다. 비스킷이야? 여자가 성질을 부리면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왼편엔 식당에 나가는 조선족 여인들이 살았고 오른편엔 콧수염 남자가 이모뻘 여자와 함께 사는 모텔이었다. 여자들은 아침마다 중국말과 연변 사투리를 섞어 떠들어 댔고 밤엔 콧수염 남자와 사는 여자가 테니스 선수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 무렵 여자는 전시회 하나를 계획하고 있었다. 여럿이 하는 전시회였지만 첫 출품이었기 때문에 몸이 달아 있었다. 일주일을 보내고서야 캔버스가 아닌 비스킷 쪼가리만 한 방에 자신의 삶이 갇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예지와도 같은 일이었다. 그림 도구는 다시 묶어 구석에 밀어 놓았다. 나이프를 꺼내면 누구 하나 죽여 버릴 것 같아. 이 작은 모텔 방 어디서 그림을 그리겠니. 한쪽에는 장만옥에 장쯔이가 살지 한쪽에는 마리아 샤라포바가 살지. 너 같으면 영감이 떠오르겠니. 여자가 날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면 남자는 옆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곤 했는데 그 모습이 또 익숙해서 전화를 끊고 여자는 버릇처럼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세 가지를 할 줄 몰랐다. 돈을 벌 줄 몰랐고 농담을 할 줄 몰랐고 집 밖으로 나갈 줄을 몰랐다. - 94쪽
'남자'에 대한 이야기같던 소설은 머뭇거리다 토해내듯 스스로를 밝히고야 만다. 사실은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임을 말이다. 무능력했던 아버지, 읽어낼 수 없었던 아버지는 아이러니 하게도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 작가는 스스로 소설을 쓰는_존재이면서도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소설 쓰는_존재의 무능력함을 노출하고야 만다. 노동하지 않는 존재는 무능력하다. 이미 이 세계의 작동 양식이 그러하다. 이미 플라톤이 그렇게 정해버렸다. 모든 시인을 세계의 테두리 밖으로 쫓아낼 궁리를 하던 그 옛날의 순간으로부터 말이다. 아무리 후대의 인간들이 애를 써서 아득바득 우겨봐도 쓰는_존재는 무용하다. 무능력하다. 나는 서운한 마음이 든다. 시발, 누군 쓰고 싶어서 쓰나.
마을엔 목련이 흔했다 나무에 꽃이 피면 찬물로 눈을 씻은 듯 골목이 깨끗했다. 마을은 버스 정류장부터 향기로 가득했다. 여자는 그 냄새가 좋았다. 꽃잎을 태우는 날엔 꽃이 흐드러질 때 나던 향기와는 다른, 속을 뒤집을 것처럼 진하고 독한 향기가 퍼져 마을은 목련꽃 향기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집 안에 앉아서도 여자는 헛구역질을 했다. 얘가 왜 그러니. 그러며 여자의 엄마는 칼질을 하다가도 양희은의 노래를 척 꺼내 불렀다. 햐얀 목련이 필 때면. 엄마가 노래를 부르면 여자고 구역질을 멈추고 엄마를 따라 노래를 주절거렸다. 여자는 양희은의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있었다. 노래는 해도 양희은이 누군지는 몰랐다.
양희은? 슬픈 노래를 아주 잘해.
그래서 좋아해? 슬퍼서?
엄마는 깔깔 웃었다.
반은 대신 살아 준다. 살아 보면 알아. 반은 양희은이 살아 준다는 걸. - 99쪽
그 새벽, 여자는 마당으로 나가 캔버스를 쭉쭉 찢어 불태워 버렸고 며칠 뒤엔 연락도 잘 안 하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일거리를 부탁해야만 했다.
여자는 날마다 똑같은 그림을 그렸다. 2호 크기의 그림들이었다. 병원 복도에 전철역에 여자의 그림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한번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눈에 익은 그림을 봤다.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배우가 창에 앉아 기타 치는 그림은 고흐의 해바라기들 사이에 있었다. 여자는 얼른 화장실을 나왔다. 남자는 식당에 앉아 우동을 먹고 있었다. 쑥갓 사이에 숨은 연분홍 건더기들을 건져 먹으며. 고속버스 창밖으로 해바라기밭, 연분홍 건더기밭, 해바라기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 106쪽
'여자'는 '남자'의 꿈을 위해 자신의 꿈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 사실 그것은 포기하는 것에 가깝다. '여자'는 안다. 쓰는_존재의 곁에 삶을 꾸리는 가족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한 것인지에 대해. 그래서 '여자'는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 자신과 '남자'를 위해.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자신을 생각해낸다.
'여자'에게도 예술가적 꿈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천형에 가까운 일이면서도 동질한 아픔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이유없는 동지애를 감각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와 '남자'는 다른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여자' 역시 다른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삶은 서로에게 낯선 형태로 이어진다. 연대는 불가능해진다.
그 밤에도 발톱 깎는 소리를 여자는 들었다. 아버지라고 생각했고 여자는 얼른 이불 속을 빠져나왔고 거실 창문에 눈동자를 바짝 대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푹푹 파인 발자국이 목련나무 아래까지 이어졌고 나무 아래 엄마가 서 있었다. 눈은 소복소복 내렸고 지붕에도 마당에도 내렸다. 가방끈을 말아 쥔 채 서 있었는데 한 손으로 가지를 툭툭 꺾었다. 눈을 털어 낼 생각도 않은 채, 그렇게 나무 아래 엄마가 서 있었는데 왜 그런지 세상이 죽었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이 그런 것이라고. 누가 나무 아래 오래 서 있는 것이라고. 눈이 터질 것 같아 여자는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와 이불 소리도 안 나게 누웠다. 엄마는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아무일 없었다는 듯 배 한 상자를 오토바이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차를 탔네요. 오랜만에. 그런데 참 이상하지. 기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 소리는 안 들리고 강물 소리가 들립디다. 그래, 정말 그런가 싶어 내 이놈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 하고는 기차를 갈아타고 돌아왔지요. 그런데 돌아올 때는 그 강물 소리가 들리질 않습디다. 기차 소리만 어찌나 크고 요란한지. - 110쪽
소설인지 뭔지, 소설이라고는 달랑 한 권 쓰고, 네 아버지가 출판도 안 되는 글을 쓸 때……. 배를 하나 깎아 상에 올리며 엄마는 말했다. ……한번은 내가 글을 쓰는 느이 아버지 옆에 앉아서 배를 깎고 있었다. 달고 맛있는 배였는데 배를 한입 깨물고는 달다 시다 말 한 마디가 없고 배를 깨물어 먹는 소리도 없어 돌아보니 배를 반쪽 입에 물고 느이 아버지 얼굴이 축축하더라. 배를 눈에 넣은 것처럼. 모르는 척 돌아앉아 배를 깎았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깎았다. 방 안으로 온통 배 깎는 소리만 돌아다녔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려니 아버지가 그러더라. 배가 물이 많네. 생전 농담이라고는 못 하던 양반이. - 115쪽
그런데 참, 이 소설은 쓰는_존재가 무능력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쓰는_존재 주변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고야 만다. 무슨 판타지란 말인가. 쓰는_존재는,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마저 불운에 젖게 만드는 인간상의 대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 장면은 도무지 그렇지가 않다. 쓰는_존재는 이기적이고 무용한 존재에서 대뜸 불쌍한 사람, 불화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고서는 사랑과 연민의 존재가 된다. 이제서야 읽는_존재 역시 '배가 물이 많네'하며 따라 울게 된다.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은 녹는다. 얼음 녹은 물이 뭉근하게 퍼지듯, 그렇게 울게 된다.
다시 난해한 소설들이 이어진다. 그렇다고 어렵다거나 읽기 싫을 정도로 불친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이미지의 연속은 마음 한 편을 편안하게 데워주기도 한다.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담배를 피우는 마음으로 읽어나가게 된다. 붉은 담뱃불이 검은 허공에서 살랑거리던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긴다. 엄마와 아빠는 자주 함께 담배를 피웠다. 그러니 검은 밤이면 두 개의 담뱃불을 볼 수 있었다. 나란히 살랑거리던 두 개의 불빛을 떠올리며 소설을 읽었다. 해변이고 야구공이고 버스 정류장이고 마가린이기도 한 것들이 한데 뭉쳤다. 이미지는 결국 꿈에 끼어들어 꿈을 무너트리고 중단시켰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두운 밤 잠에서 깨어 깜깜한 허공을 볼 때면 어디선가 나란히 떠 있는 담뱃불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면 그 담뱃불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천천히 회귀하는 소설의 끝에서, 그러니까 어둠에 삼켜져서 건너편 자신들의 담뱃불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떠올린다. 꽤나 괜찮은 장면이다. 환상은 모두 수미상관인가보다. 바보들이 걸어가는데도 그게 참 좋았다.
어디선가 야구공이 굴러와 세 사람이 야구공을 보고 있는 사이 버스 정류장 이편까지 어두워졌다. 어둠이 길을 건너 이편으로 오는 모습은 마가린이 조금씩 녹아 브라운으로, 점점 더 탁한 브라운으로 변해 가는 모습과 같았다. 아름답다고, 아름다워서 일어날 수가 없다고, 시간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어둠이라는 물질이 부드럽게 녹고 있는 상황 같아서 무엇이 어둠과 함께 녹으며 프라이팬 위를 걸었다. - 169쪽
우리는 왜 담배를 피울까요. 몸에도 안 좋다는데.
멀리 있기 때문일 거예요. 모든 것이 멀리 있어서. 너무 멀어서 담배를 피우는 거예요. 시인이 담배를 또 피워 물었다. 연기가 맴돌다 천천히 밖으로 흘러갔는데 셋이 연기를 보고 있을 때 버스 정류장 안으로 야구공 하나가 또 굴러 들어왔다. 이따금씩 그런 일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 여기저기 야구공이 많았다. 그럼 우리는 너무 멀군요. 야구공처럼.
야구공!
네. 야구공도 멀리 있으려고 있는 거예요. - 170쪽
알아요. 그냥 여러 뜨개의 스웨터를 입어 보고 싶은 거예요. 스웨터마다 뜨개가 다르거든요. 나는 하루에 다섯 번 산책을 하는데 그때마다 스웨터를 갈아입어요. 스웨터를 입고 걸으면 시간을 느껴요. 빛이 들어와 고이니까요. 실과 실 사이로 빛이 들락거려요. 멀리서 온 빛이 빛은 멀리서 오는 거예요. 스웨터를 입고 걸으면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시간이 함께 풀려나가는 걸 느끼죠.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반짝이며 가까워지다가 멀어졌다. 애인과 시인과 독일인. 그렇게 세 사람이 걷기도 하고 해변에 누워 있었다.
밤에 해변에. - 176쪽
독일 같아.
뭐가 독일 같아요? 밤공기? 해변?
그냥요. 지나가는 것. 내게서 멈춘 것. 그리움일까. 관념일까. 말할 수 없지만 그것들이 섞이는 느낌. 독일에 간 적은 없어서, 당연히 독일의 어느 해변에 가 본 적도 없고요, 그러니까 독일의 해변이 아니라 그냥 독일 같아요. 당신이 말한 구름처럼, 여기서 잠시 섞인. 개의 머리. 역시 말할 수 없군요. 미안해요.
아니요. 미안할 건 없어요. 애인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 발 장난 중이었다. 당신이 독일이라면 독일인 거죠. 기분이잖아요. 그리움이거나.
아니요. 기분이라면 지나간 것이잖아요. 그리움이라면 멈춘 것이고. 그러니까 그냥 '독일같다.'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독일인은 무언가 더 설명할 것처럼 하지만 아무것도 성명할 수 없는 것처럼 곤란해했다. - 179쪽
저것 말이에요. 버스 정류장일까요? 신일까?
정말 무언가 있군요. 하지만 신은 아닐 거예요. 빛이 있어요. 신은 빛을 만들지 않아요. 빛은 거리를 알려 주고, 빛이 있다는 건 아주 먼 거리에서 가까이 왔다는 신호인데,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들키는 순간 멀리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므로 신은 빛을 만들지 않아요. - 199쪽
버스 정류장도 아니고 신도 아니라면 발자크일 거예요. 7년 동안 로댕이 생각했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에 다다를 수 없던 것. 발자크를 조각하며 7년 동안 로댕은 발자크를 생각했어요. 발자크만 생각했죠.
발자크를 사랑했군요.
그랬을까요?
7년 동안이나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잘 모르겠지만. 독일인이 말했다. 사랑했다면 발자크의 실재가 아니라 발자크에 대한 관념이었을 거예요. 물론 로댕은 누구보다 육체를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육체의 욕망을 사랑했죠. 구체적인 육체.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고 너무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해서 취향도 없다고 사람들은 흉봤대요. 그는 그 모든 육체를 하나하나 만졌어요. 사랑했어요. 그리고 발자크를 생각하게 되죠. 7년 동안. 발자크를 생각하며 한 사람의 발자크 안에서 수많은 발자크를 만나요. 만져요. 두 명의 발자크, 세 명의 발자크, 열 명, 백 명, 천 명의 발자크를 만진 거예요. 천 명의 발자크를 만져도 한 명의 발자크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가 없었어요. 그 모든 발자크가 다 발자크였던 거예요. 또 그 많은 발자크 중에 발자크가 없었던 거예요. 로댕은 괴로워했죠. 사람들은 이제 그가 더 이상 조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죠. 하지만 로댕은 발자크를 생각했고 7년 동안 생각했고 마침내 발자크를 완성하죠. 상을 완성했을 때 사람들은 욕을 했어요. 평론가들조차 흉물이라고 비난했지만 로댕은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요약이고 내 미학적 이론의 동기라고 말하죠. 거기 발자크는 없었지만 그게 발자크였으니까. - 202쪽
정신병적인 징후가 한 존재를 덮친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정상인 것은 아니다. 다들 비정상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는 선을 긋는 일에만 몰두한다. 바보같은 일이다. 자신이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이 정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바보짓이 어딨을까. 그런데 다들 그렇게 산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모서리가 있는 것은 모서리가 없는 것과 결합할 수' 없다는 말을 가슴에 새긴다. 나는 모서리 있는 존재이고 정상이라고 스스로를 세우는 사람은 모서리가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영원히 불화할 것이다. 타인의 상처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상이든 아니든, 아니, 우리 모두 스스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니까 그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의 모서리를 알아차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타인의 모서리를 알아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이 남는다. 전자의 것은 극적으로 치닫기 때문에 어렵고 후자의 것은 자아라는 것의 존재성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남는 일은 영원히 불화하는 것 밖에는.
우선 왜곡된다는 말이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어디가 아팠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몸이 기울었다거나 무엇으로 변신했다거나. 어떤 소설에 보니까 그런 얘기가 있던데.
눈이 자주 충혈되었어요. 핏발이 섰죠. 몸의 모서리들이 성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남편도 아이도 안아 줄 수가 없었죠. 아팠으니까요. 테트리스 게임 알죠? 모서리가 있는 것은 모서리가 없는 것과 결합할 수가 없어요. 제 몸이 그랬어요. 하지만 그건 초기 증상일 뿐이었죠. 왜곡은 빠르게 진행이 되었죠. 비정상적으로 광대뼈가 취어나오고 턱이 돌출되기 시작했어요. 골절은 없었지만 뼈와 뼈에서 전동차 다니는 소리가 들렸죠. 전동차가 브레이크를 걸거나 철로를 바꿀 때 나는 소리요. 불꽃이 튈 것만 같아서 누워서도 몸을 살살 움직이곤 했죠. 어떤 날은 몸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럴 때는 통증도 동반이 되곤 했죠. 피부 한쪽이 뚝뚝 떨어져 나가기도 했고요.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몸에서 유리 조각 같은 것이 떨어져요. - 260쪽
파이프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돼요.
파이프요? 배관 파이프 같은 거?
만지면 쓸쓸하고 아름다워요. 아마 나는 기억을 잘 설명할 수 없을 거예요. 가끔 손을 넣어 보곤 하는데 쉽게 인지되지 않아요. 그래서 슬프죠. 하지만 어떤 사물보다 사실적이에요. 푸르고 너무 푸르러. 투명하죠. 길고 마디 없는 유리처럼. 이어지죠. 어느 밤엔 혼자 파이프를 따라 걷죠.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흐느끼는 나를 발견하곤 해요. 마치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다가 어딘가에 당도해 있는 느낌인데 당도해 있지만 당도하지 않은 것 같은, 당도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유리처럼 쏟아지는데 유리처럼 이어져요. 그 감각이 아주 구체적인제 스스로 이해할 수 없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도 없어 혼자 흐느끼죠. 그러곤 일어나 생각해요. 이것은 얼마나 고독한 일일까. - 273쪽
그런데 참 이상하지, 여보. 밤이었는데 다시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이는 거야, 낯선 도시에서 왜 자동차를 세우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는지는 나도 몰라. 카페는 밝았고 사면은 유리로 되어 있었어. 세상이 마치 유리의 바다 같았는데 두 개의 세상이 겹쳐 있었어. 카페 안의 세상과 카페 밖의 세상이. 어지러웠지. 나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뚫어지게 보고 있었던 것 같아. 분간해 보려는 듯이. 또는 분간하지 않으려는 듯이. 빈혈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한 세계의 결핍이 아니라 두 세계가 겹쳐 있는 것. 겹쳐 있지만 섞일 수 없는 것. 그런 생각도 들었어. 모르겠어. 울고 있었는지는. 어느 순간 어디가 카페 안이고 어디가 카페 밖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헤드라이트 불빛을 다시 보게 된 거야. 불빛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곤 했지. 아니요. 꿈은 아니에요. 생생했고 구체적이었어요. 아니라니까요. 그 무렵 나는 아주 잠을 잘 잤고 당신이 준 약도 먹지 않았어요. 그리고…… 한 여자가 있었어. 밖은 아주 어두웠는데 나는 차츰 여자가 카페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과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무엇때문에 저 여자는 카페 안을 들여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까.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지. 여자의 손과 함께 움직이는 담뱃불이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보인다는 것을. 내가 봤던 헤드라이트 불빛은 그렇다면 여자의 담뱃불이었을까. 나는 계속 유리 밖 여자를 보고 있었고 여자는 카페 안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는데 담배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을 잊은 듯 서 있다가 잊은 것이 생각하면 한 번씩 입으로 가져가는 듯했어. 그 불빛이 아름다웠어. 불빛의 움직임. 나비의 날갯짓처럼 보였어. 그래요, 나비의 날개. 나도 모르게 일어나 다가갔던 것 같아. 여자는 담배를 피웠고, 내 눈인지 여자의 눈인지, 창문에 비친 눈을 보고 있었는데, 담뱃불이 눈을 지졌어. 몰라. 그렇게 보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걸까. 겹쳐 있었으니까. 불이 한쪽 눈을 지졌고, 분노했어. 날개가 타고 있어. 소리 질렀어. 다가가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 투명한 것이 막고 있었으니까. 이러지 마요. 오늘은 하고 싶지 않아. 벨까봐 두려워. 파이프를 자르듯……. - 2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