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실패는 임의적이다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by Nirahganta

<너무 한낮의 연애>


대다수의 서사가 그러하겠지만, 이 서사의 전반은 기억의 행위를 중심으로 기록된다. 이야기는 과거 사귀었던 연인이 쓰던 극본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연극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화자 '필용'은 과거 연인과의 시시콜콜한 기억을 자아의 심층부에서 길어올리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던 연애사는 기억의 행위와 함께 현재로 호명되어 뒤늦게 약동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과거의 기억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연애사의 과정이다. 구체적인 사랑의 감정 대신 연애과정의 시간적 맥락만이 무질서하게 솟아난다. 때문에 이 과정에서 중요한 지점은 사랑이라는 타자를 향한 감정양태가 아니다. 현재의 자신, ‘필용’이 겪고 있는 폭력의 상황을 보다 확실히 인식하는 데에 있다. 넌지시 사직을 종용하는 회사 앞에서 무력한 ‘필용’의 노동자적 자아는 과거 연애사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더욱더 여실히 자각하게 된다.

그 뚜렷한 통각의 감각은 자아의 안전을 보전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노력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아니다. 오히려 통각의 자각은 연애사를 기억하는 행위에서 도드라진다. 기억이 통각을 더욱 맹렬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의 연인, ‘양희’에게 자신이 주었던 상처를 기억하는 행위에서 현실감각과 그것에 따르는 직설적인 통각은 복구되는 것이다. 사랑의 가능성은 이렇게 확대된다.

하지만 ‘필용’은 온전한 가능성의 지대로 스스로를 더 밀어붙이지 않는다. 기억의 행위가 담보하는 것은 결국 과거의 자아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자아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자아가 겪었던 관계들이 아니라 지금의 자아가 감수해야 하는 관계들이며, 고통들이고, 결국 통각의 정도가 전부이다.

현재의 자아가 한없이 가난하다고 지각할 때, 자아는 이율배반적이게도 자신이 타인에게 주었던 상처를, 타인의 자아를 가난하게 만들었던 폭력의 과정을 기억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아픔을 위한 최선의 행위인 동시에 어딘가 비참하고 안타까운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리석게도 ‘양희’, 타인을 위로하지 못한다. 자아의 보전을 위해 떠올리는 타인의 고통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는 까닭이다. 너무나 한낮인 대로변에 남겨진 ‘필용’의 쓸쓸하고 가난한 자아를 읽는_존재는 그저 견뎌야만 한다.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 채로.


돌아가는 길에 필용은 맥도날드에 더이상 피시버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고 아예 사라져버린 그 메뉴란 것에 대해. 만약 피시버거가 사라지지 않고 뭔가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면 불쾌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주 결연하게 사라졌단 말이지. 이제 맛볼 수조차 없게 아주 그냥 끝. 다신 맛 못 봐, 끝, 끝이야, 아주 엇어, 이렇게. A가 유사한 A'나 B가 된 것이 아니라 A가 A인채로 사라져 버렸다는 건 햄버거 같은 정크푸드의 역사에서도 아주 비장한 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비장한 신은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켰다. 여전히 필용은 퀸의 <구해줘>를 불렀지만 울지는 않았다. 직장에 남으리라 생각했다. 어떤 시련을 이겨내고서라도 여기 있으리라. 풍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리라. 좌천은 사실상 권고사직이었지만 필용은 버티기로 했다. 못 나간다. 필용은 다짐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춥고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필용도 사람이니까. - 11쪽


‘필용’은 오래 몸담은 직장에서 ‘권고사직’과 유사한 좌천을 경험한다. 노동자적 자아를 한껏 부풀려주고 있던, 회사로부터 제공받던 비물질적인 형태의 신뢰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회사 내부의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상실감은 결국 아주 원초적인 지점의 상황부터 그를 불구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먹는 행위가 그것이다. ‘인사이동을 통보받았을 때 필용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십육 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였다.’(9쪽)는 소설 첫 문장은 이 상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결국 경험은 자아의 현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아가 겪고 있는 가난함으로 인해 ‘피시버거가 없’어진 현재의 상황은 특수한 상황으로 인식된다. ‘필용’은 자신과 ‘피시버거’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인지하면서도 결국 사람이 아닌 대상물을 자신과 같다고 인지하는 것은 모두 자아의 상실이 촉발시킨 자아를 보충하려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다국적기업의 자본주의적인 술책을 떠올리는 것이 과한 독서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읽는_존재는 이 지점에서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소설은 오로지 ‘필용’이라는 인물이 자아를 상실하고 벌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필용은 자기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을 때 왜 종로의 맥도날드가 떠올랐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뭣 때문에 여기 와서 점심을 먹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너무 완전해서 마치 하나의 구球같은 이해였다. 요리조리 뜯어봐봤자 절대 다른 모양이 되지 않는, 너무 완전해서 그걸 몰랐던 좀 전이 먼 과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해였다. 필용이 하필이면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것은 바로 양희와 재회하기 위해서였다. - 14쪽


영업팀에 있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회식과 숱한 만남들을 계획하던 필용이었지만 이제 그러지 않았다. 필용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생각했다. 이제 필용이 상대해야 할 것들은 시설이 아닌가? 시설들에는 말이 없고 시설들에는 응시가 없다. 시설들에는 관계가 없고 시설들에는 터치가 없다. 필용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무언가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양 입가를 팽팽하게 견인하고 있던 긴장이 사라졌다. 그 긴장은 무슨 존칭, 무슨 웃음, 무슨 헛기침, 무슨 지시, 무슨 권유, 무슨 답변등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당분간은 필요 없었다. 십 년 넘게 얼굴을 차지하고 있던 긴장이 사라지자 필용의 얼굴은 말개지는 게 어딘가 젊어진 듯한 인상을 주었다. - 18쪽


이제 관계의 무상성을 인식하게 된 ‘필용’에게 회사, 사회 그 어떤 것도 압박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자아를 기반으로 한 정서의 교환을 정동이라고 할 때, 지금의 필용에게 ‘정동’은 오히려 독이 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포기 혹은 유기하는 순간 자아는 한없이 자유로워지게 된다. '필용'은 정동의 과정을 타의에 의해 빼앗겼지만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의 기억으로 향하기 위해, ‘양희’의 연극 무대로 향하기 위해 모든 준비는 끝난 것이다. 현재 자신의 자아를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면하는 것은 쉽게 주어지는 기회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필용’은 관계의 선별적인 단절과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 시도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에 현재의 해답이라도 있다는 듯이.


“저, 저, 어떻게 하면 돼요?”

관객이 어리둥절해서 계속 웃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필용이 하고픈 말이었다. 어색해서 온몸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배우는 관객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관객도 웃음을 그치고 배우와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극장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연극이 여기서 끝은 아니겠지, 필용은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 19쪽


부지불식간에, 연극의 내부로 던져진 관객이 무의식중에 내뱉는 질문, ‘어떻게 하면 돼요?’는 ‘필용’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더 나아가 읽는_존재 역시도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모른다는 것, 생이 오직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으며 때문에 실패든 성공이든 고스란히 자아 홀로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아를 불안에 빠뜨리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이상 모든 자아는 불안을 감지하는 가난한 형상일 수 밖에 없다. 읽는_존재 모두는, 이 세상에 난 모두는 이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네가 날 사랑한댔잖아. 킬킬킬킬…… 그 고백을 들은 거잖아, 지금.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앞으로 우리 어떻게 되는 거냐고.”

“모르죠, 그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알 필요가 없다고?”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필용은 황당했다. 얘가 지금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며?”

“네,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네.”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네,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 22쪽


과거의 삽화는 ‘양희’의 고백과 그에 따른 ‘필용’의 반응이다. 오늘의 자아가 가진 감정의 양상을 내일의 자아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만큼 솔직한 행위가 있을까. 자아는 순간적이나 대다수의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연속적이고 항구적인 그 무엇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양희’의 솔직함은 ‘필용’에게 당황이 될 뿐이다. ‘양희’의 솔직함을 ‘필용’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타자인 ‘양희’에게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확인받으려 시도한다. 이러한 확인의 시도와 실패는 ‘필용’에게 상처가 된다. 자아의 연속성을 확정짓지 않는 그녀의 행동이 ‘필용’의 자아 역시 불완전하고 즉시적이며 임의적인 것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양희’는 절대적인 타자이기에 그녀가 상처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읽는_존재의 추측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추측될 뿐이지만, ‘필용’의 상처는 비교적 명확하다.

소설이 ‘나’인 ‘필용’의 감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까닭에 ‘너’, 타자로 머무르는 ‘양희’의 감정은 구체화되지 않는다. 읽는_존재가 ‘필용’의 어리석음에 공감을 하든 하지 않든간에 소설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아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르적인 한계 역시 ‘필용’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자아의 가난함에 무게추를 실어준다. 자신의 자아에 골몰한 존재는 절대 타자의 자아에 접근하지 못한다. 타인은 어떻게 해도 타인으로 남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가난을 이 세계의 누구라서 극복할 수 있을까.


필용은 양희의 얼굴을 훔쳐보는 것도 훔쳐보는 것이지만 무대에 서서 한번 그 감정을 느껴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십육 년 전, 연애는 아니더라도 연애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던 사람과 재회해서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앞으로 어쩌냐는 말이지, 아내에게는 큰 불만이 없는데 아들은 소중한데. 그러니까 안 되었다. 시선은 일방이어야 하지 교환되면 안 되었다. 교환되면 무언가가 남으니까 남은 자리에는 뭔가가 생기니까, 자라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대로 무게감을 지니고 실제가 되니까. - 28쪽


이 지점에서 읽는_존재는 현재의 ‘필용’이 과거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자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동의 발생을 병적으로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진술에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정동의 과정은 관계 자체의 겹침에서 비롯된다기 보다는 관계 자체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때문에 ‘필용’이 ‘양희’ 앞에 서서 말을 하거나 과거의 행위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아도 관계는 이미 발생했고, 따라서 정동의 도식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돌아갈 때는 양희가 동네 어귀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렇게 단둘이 있기 위해 문산까지 왔지만 필용은 할말이 없었다. 양희가 문득 생각난 듯이 그런데 선배는 왜 왔지? 했는데도 그냥 근처를 지나다가, 하면서 얼버무렸다.

“부끄러워서?”

양희가 필용에게 물었다. 여태껏 한 적 없는 질문이라는 것이 여기 있었다. 필용과 양희는 마주보았다. 밤이라 얼굴은 거의 지워졌어도 거기에는 양희의 눈이 있었다.

“미안하다. 심한 말 해서.”

필용이 사과했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필용은 양희 뒤에 서서 양희에게로 손을 뻗어보았다. 닿지는 않았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손이 닿을 수도 있었지만 필용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간절함으로, 연민과 구애의 감정이 뒤엉킨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걸,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필용은 말없이 르망에 올라탔다. 문산까지 오는 동안 필용이 전율했던 사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뻥 뚫린 것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필용은 울었다. 울면서 무엇으로 대체되지도 좀 다르게 변형되지도 않고 무언가가 아주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 37쪽


수치는 자아를 발생시키는 주요한 원료이다. 수치의 경험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발명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어리석은 자신을 보고 있을 수도 있는 그 깨달음으로부터 ‘나를 바라보는 나’는 고안된다. 이 지점에서 굳이 레비나스를 들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수치만큼 자아를 명징하게 인식하는 순간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필용’의 사과에 대한 ‘양희’의 대답이 이 모든 사실을, 가난한 자아를 가진 모든 존재를 위로해주기 시작한다. ‘필용’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한 수치의 감정을 ‘양희’의 대답으로 극복, 혹은 치유하는 것이다.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보자는 ‘양희’의 말 속에, 이 세계의 모든 비웃음 ‘ㅋㅋㅋ’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아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필용’은 ‘무엇으로 대체되지도 좀 다르게 변형되지도 않고 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완전히 이해’한다. 이 인식 역시 과거의 지점에 기억되지 않고 묻혀있었지만 ‘양희’와의 마주침을 통해 다시 기억되어 실존하기 시작한다. ‘피시버거’와 동일시되던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자신의 아주 깊은 기억 속에 존재했었다는 깨달음. 이제 ‘필용’은 아주 조금 편해진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필용은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도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 42쪽


가능태의 모습은 부재가 아니다. 하지만 정동은 언제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얼굴 없이도, 타인 없이도 자아는 확장되는 것이다. 무수한 가능세계의 연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늘어놓는 것은 부질없고 황망한 일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선택의 순간에 시선을 출현시키는 것으로부터 자아는 발생하기 시작한다.




<조중균의 세계>


이 소설은 노동과 노동자의 무관계성에서 만들어지는 자본주의적 비극에 대한 거의 확실한 조망,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은 회사라는 거대조직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서사가 개인과 세계와의 결정적인 대립을 포착하는 예술장르라 생각해본다면 이 지점은 유효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성은 이미 많은 서사를 통해 익숙해진 것 역시 사실이다. 읽는_존재가 수없이 마주해온 자본주의적 서사물들은 하나같이 비극을 노래하고 있었으며 그 사이를 비집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은 끊임없이 거세되어왔다.

하지만 문제는 익숙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분열하고 발전한다. 문제의 양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각각의 시대는 각각의 노동_서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맑스는 이미 개별 노동자가 노동의 전 과정에서 소외되는 과정을 19세기 말에 지적한 바 있다. 이미 백년이 훨씬 넘은 사유가 아직까지 시의성을 지닌 살아있는 문제로 존속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노동_서사는 보다 다층적이고 보다 잔인한 양식으로 구성되기를 요청받는다.

이제 ‘조중균’이라는, 조르바처럼 낯설고 조세희의 인물들처럼 애처로운 인물 앞에서, 읽는_존재는 숨을 몰아쉰다. 읽는_존재 역시 노동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본주의적 산물 중 하나이지 않은가. 읽는_존재는 소설 바깥에서 소설 내부의 풍경을 생생하게 감각한다. 소설은 감각기관의 다중적인 구축과 와해를 동시에 노리는 이중적 기계인지도 모른다.


“나도 학교 다니면서 별일 다 했지만 해란씨는 정말 고난의 행군이더라고. 요즘 애들 하듯이 어디 인턴, 어디 인턴, 공모전 이런 식으로 채운 것도 아니야. 노동, 말 그대로 노동 현장에서 뛰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 영주씨는 말 그대로 버젓한 경력, 응? 정식 회사에서 일한 경력으로 이 자리에 왔고 말하자면 팩에 든 고기지. 원래 생산할 때부터 정식 팩에 든 고기. 해란씨는 주먹고기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어. 목살 근처 아무 살이나 주먹구구식으로다가 막 썰다보니까 어, 제법 이게 어엿한 상품이 돼 있는 거 말이야. 주먹고기, 내가 비유가 이렇게 좋아. 주먹고기 좋아하나?” - 46쪽


‘꼰대’라는 단어 뒤에는 공감능력의 부재가 도사리고 있다. 자신이 하고있는 말이 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생각할 수 없는 부정형의 존재를 낮잡아 이르는 단어가 바로 그것 아닐까. 자신의 경험적 사실들이 이 세계를 약동하는 절대적인 진리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그러고도 부끄러움을 감각하지 못하는 존재들 말이다.

소설의 서두부에는 언제나 선택받기를 원하는 가련한 노동자 둘이 제시된다. 둘 중 하나만이 생존하는 치열한 시스템 내부에서 권력을 가진(물론 이 ‘꼰대’가 가진 권력 역시 일시적이며 임의적이다. 권력의 중심부에 가까운 인물일 수록 일상영역에서 마주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대신 그 권력의 연장이자 수단이라 할 수 있는 상급자_꼰대가 진짜 핵심에 가까운 권력자의 대리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거리감인가. 이제 그 누구도 문을 열고 진짜를 마주할 수 없는 세계이다.) 존재의 말은 절대적인 능력을 부여 받는다. 그가 지껄이는 말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 위치와 그 자리에서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가난한 자아가 감각하는 실제 세계와 권력자들이 작당하여 일시적으로 구성해낸 기만의 세계 중 어느 곳에 자신의 거처를 둘지 결정해야 하는 노동자_주체 ‘나’는 그 어느때보다 가난하다.


해란씨는 뭐라고 더 말하려다 삼키고 “언니, 그분은 사무실에서 마치 유령, 유령처럼 보여요”라고만 덧붙였다. 조중균씨는 교정 교열만 담당하는 직원이었다. 단행본 팀이지만 상황에 따라 잡지나 교과서팀 업무도 맡았고 웹상에 올라가는 광고 문안이나 자료들의 감수도 맡았다. 그래도 그렇게 나이가 많은데 갓 스무 살 된 디자이너들까지 조중균씨, 조중균씨, 하는 건 해란씨 말처럼 좀 어색했다. 하다못해 주유소를 가도 선생님, 사장님 하는 판국에 그렇게 호칭에 인색해서야. 이런 경우는 대부분 윗사람들이 중재를 안 한 경우였다. 일단 정해지면 다들 지킨다. 왜냐면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게 더 귀찮은 일이니까. - 47쪽


‘나(영주)’와 ‘해란씨’ 중 수습기간이 끝나면 회사에 정규직이라는 형태로 남게 되는 것은 누구인가. ‘나’와 ‘해란씨’에게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서사는 그 문제에 집중하지 않는다. 시스템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또 하나의 인물을 호명해낸다. ‘나’와 ‘해란씨’를 이어 나타난 ‘조중균’이 바로 그 인물이다. 자본주의적 시스템 내부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서사의 기점을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사는 자연스레 ‘조중균’이라는 인물이 가진 특이성에 집중한다. 노동자의 실체적 자아의 유실, 그 ‘유령’같음은 맑스의 지적과도 일치할 뿐더러 ‘조중균’이라는 인물이 가진 신비함을 극대화하는 촉매가 된다.


“왜요? 점심 원래 안 드세요?”

“네.”

아, 그렇구나, 자발적으로 점심을 안 먹는 거였구나. 사람들이 따돌려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럼 그렇지,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져도 예의상 지켜지는 룰이 있는데. 사람 밥도 못 먹게 은근히 따돌리는 것, 그렇게 코드와 선택을 드러내는 것이 더 피곤한 일 아닌가. - 52쪽


조중균씨가 잡아낸 오류들을 보면 잡아내야 할 만하기도 했다. 그러니 일이 늦어진다고 마냥 화를 내기에도 애매했다. 조중균씨는 매일 야근했다. 하루에 예닐곱 장의 교정지가 넘어올 뿐이라서 정작 나는 정시에 퇴근했다. 내일 봐요, 하고 내가 사무실을 나가면 조중균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자리만 남기고 사무실 형광등을 모두 껐다. 그리고 그런 사무실의 어둠을 아주 따뜻한 담요처럼 덮고 원고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 56쪽


‘조중균씨’라는 호명법은 회사라는 규격에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다. 직함과 합의된 관계를 중심으로 자아를 규정받는 노동자에게 ‘~씨’하는 식의 호명은 배척과 조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회사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조중균’의 모습이 아주 이질적으로 구조화 되어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할만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그의 진심이나 의도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이질적인 인물이 왜 이런 행동을 지속하는가가 아니라, 왜 이런 행동을 굳이 이곳에서 하는가, 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배척의 행위로, 낯선 호명법으로 구체화된다.


지난여름 동안 아무도 조중균씨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서 조중균씨가 사라지자 모두들 조중균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 69쪽


“아줌마.”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나는 회식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홀에 앉았다. 더 앉아서 술을 받아먹다가는 완전히 취할 것 같았다. “왜, 자리 못 찾겠어?” 식당 아줌마가 돌아봤다. “아니요, 주먹고기는 왜 주먹고기예요?” 아줌마는 양푼에다 부지런히 콩나물을 무치면서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 왼쪽 주먹을 내 눈앞에 대면서 “알지? 주먹?” 했다.

“알아요.”

“주먹을 닮아서 그런 거야.”

회식이 끝나고 부장과 나만 마지막 전철을 탔다. 부장은 취기가 올라오는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영주씨, 영주씨는 무슨 힘으로 사나?” 무슨 힘, 사는 데 무슨 힘이 필요한가, 그냥 사는 거지, 생각하다가 주먹을 부장에게 보여주었다. “주먹이래요, 주먹.” 그사이 잠이 들었었는지 부장이 몸을 움찔하며 눈을 떴다. “뭐가 주먹이야?” “주먹구구 아니래요, 주먹이래요.” “그래 그래, 젊은 사람들이 주먹 불끈 쥐고 기운 내야지, 힘내야지. 젊음의 주먹, 좋다.” 부장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좋을 대로 해석해주는구나. 이런 게 정규직의 힘인가, 생각하고는 나도 꾸벅꾸벅 졸았다. - 71쪽




<세실리아>


상처는 어떤 식으로 기억되어야 하는가. 뒤늦게 알게된 타인의 상처를 어떤 방법으로 대해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들 앞에 읽는_존재는 무력을 절감할 뿐이다. 상처는 온전히 개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자아는 각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가진 아픔의 정도를 외연으로 드러내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뿐더러, 애초에 그 외연화하여 말하는 행위 자체가 또다른 고통이 되기도 한다.

‘빙산이 녹’은 자리에 흔적처럼 타인의 고통이 드러날 때, 조심스러운 이들은 섣불리 위로하거나 알은채 하지 않고 다만 조용히 그것을 본다. 오래 본다. 그리고 한참 후에서야, 그것이 상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 깨달음은 뒤늦게 온다는 점에서 그 어떤 관계의 가능성도, 치유의 가능성도 담보하지 않는다. 이렇게나 이기적인 세계에서 읽는_존재는 생존할 수 있을까. 소설 전반에서 오는 무게감이 고스란히 수치를 감각하게 한다. 예술가인 ‘세실리아’가 ‘구덩이’를 파고 메우는 행위를 통해 얼음장 아래에 감춘 자신의 상처를 엿볼때 그 행동을 관람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늠되지 않을 아픔이 적막처럼 내려온다.


다 부스러진 쿠키를 옷 주머니 같은 데서 발견하듯, 잊고 있다가 아 맞아, 세실리아가 있었지, 하는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적어도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 76쪽


“치운이, 치운이가 이혼을 했단다.”

세실리아는 표정이 바뀐 채 뭔가를 생각했다. 기분이 상했다기 보다는 내가 걔 얘기를 한 것이 단순한 사실의 전달인가, 의도가 있는가,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세실리아는 “결혼한 줄로 몰랐는 걸, 나는”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긴 침묵이었다. 나는 무슨 닭요릿집이 이렇게 멀까,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집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먼가. 우리집으로 가서 오늘의 일을 잊기까지는 또 얼마나 멀 것인가. - 90쪽


“이렇게 웃은 건 아주 오랜만, 정말 배가 아프도록 웃었어. 한 번은 말을 걸 줄 알았지, 한 번은. 넌 울 줄 아는 애니까. 도서관에서 울곤 하는 걸 내가 봤으니까. 아주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제는 말해야겠다. 말해야겠어. 치운이 걔는 쓰레기야. 그날 밤 취한 나를 데려다주면서……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그런 건 연애도 뭣도 아니야, 그런건 폭력이야. 정은아, 이 기집애야, 너 너무 재밌다. 어떻게 이렇게 재밌어졌어? 하지만 이제는 찾아오지마. 다시는 찾아오지마.”

세실리아가 팔을 풀었다.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그렇게 빠져나가는 게 싫어서 세실리아를 붙들려고 애썼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안아주지 않았고 마지막 인사도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얼음송곳과 구덩이가 있는 그 간소하고 조용한 방으로.

이미 전철이 끊겼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으로 걸었다. 취객들은 항상 집을 향해 걷는다. 집이 생각나지 않을 땐 집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걷는다. 가다가 여기는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면 집이라 믿으며 걷는다. 우리는 늘 취하고 집으로 가지 못하지만 그건 우리가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거나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술을 마시면 곧잘 마음이 파쇄된 얼음처럼 산산조각나곤 하니깐 아무 곳이나 집인가 싶어 그러는 거지. 미친 소리. 미친 소리다. 나는 미친 소리야, 하면서 발을 굴렀다. 화가 나서인지, 추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걸어야지. 미친 소리를 하면서도 걸어야지, 집으로 가야지. 레지던스에서 우리집까지는 얼마나 멀까. 집에서 이런 걸 잊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쪼그리고 앉아 턱턱턱, 구덩이를 파는 세실리아를, 밤의 골목을 옮겨다니며 이미 버려진 것들을 별처럼 줍는 세실리아를, 누군가에게 엉겨붙고 싶지만 가장 저점의 온도에서 그러지 못하고 홀로 동결해갔을 세실리아를. 나는 별안간 모든 게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가리며 걷다가, 소리치며 걷다가, 노래를 하며 걸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휴대전화를 꺼내 세실리아의 번호를 지웠다. - 97쪽


‘구덩이’를 파고 메우는 일이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는 일이라면, 왜 ‘나’는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는 수준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같이 상처받는가. 연대의 과정은 생각보다 숭고하지 않다. 자신이 파야 할 구덩이와 ‘세실리아’가 파야 할 구덩이가 다른데도, 그것이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임을 깨달은 ‘나’는 결국, ‘세실리아’의 번호를 지운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멀기만 하고 ‘세실리아’에게도 되돌아가기에도 너무 멀다. 자아와 타인의 정확한 경계, 절반의 지점에서 ‘나’는 관계의 가능성을 온전히 차단해 버린다. 관계는 너무 무겁고 연대는 이미 먼 옛날의 주문이 된 것만 같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역시 이 서사 역시 기억하는 행위에 의존하며 나아간다. ‘옥수수밭’으로 상징되는 이중적인 공간을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고통이기도 하고 그리움이기도 하다. 자신이 자란 고향을 그리는 노스텔지어는 언제나와 같이 아련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노스텔지어는 언제나 이중적으로 구성된다. 그 공간으로 회귀하고 싶다는 본능과 그 공간에서부터 분리되고 싶다는 욕망이 바로 그 이중성을 직조한다. 그리고 이 이중성이 구체화한 기억의 사슬 안에서 자아는 위태로움을 느낀다. 불안을 감각하고 현재 자신이 속한 공간으로부터 자아를 분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까지 한다. 환상적으로 귀결되는 서사의 모습은 어쩌면 기억의 불완전함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자아_존재의 박약함을 동시에 구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감정이 증오인지 그리움인지 가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로 보인다. 그것 보다는 하나의 공간을 축조하고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을 밀도있게 그려내는 문장들의 결을 음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언제나 문제는 복잡하다. 멀리서 보면 단순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는 순간 엉킨 실타래와 같은 복잡한 마음의 결을 확인하고야 마는 것이다.


진료가 끝나는 일곱시, 병원은 한결 조용해진다. 홀을 채우던 간호사들도 퇴근하고 입원병동만 부산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앓는 시간이다. 병동에서 비극적이지 않은 밤이란 없었다. 중환자들은 중환자라서, 아닌 사람들은 중환자들이 자기 미래가 될까봐 끙끙 앓는다. 그녀는 항상 궁금했다. 왜 사람들은 밤이 되면 더 아픈 것일까.

고아원에서 자란 그녀는 아픈 사람들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최근에 와서였다. 왜 고아원 애들은 아프지 않았던 걸까. 소아병동에는 아픈 아이들이 넘쳐났다. 소아응급실은 또 어떻고? 거기는 사색이 된 부모들이 아이를 안고 들어와 몸을 벌벌 떠는데. - 182쪽


그녀의 방은 옥수동에 있었다. 방세가 저렴한 곳이라고 친구한테 추천받은 동네였다. 옥수동, 이라고 들었을 때 그녀는 노랗고 너무 노래서, 가끔은 질릴 정도로 노란색이었던, 고아원 간식으로 자주 나오던 옥수수를 떠올렸다. 그리고 고아원 옆으로 펼쳐져 있던 옥수수밭, 그 넓은 잎들이 바람을 만나면 우수수 떨리면서 내는 소리들을. 옥수수밭이 끝나는 도로에는 대도시로 가는 버스가 서서, 외출할 때면 그 밭을 가로지르거나 뱅 둘러 지나야 했다. 옥수숫대는 키가 아주 높아서 그곳으로 들어간 아이들을 밖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옥수수밭은 고아원 애들에게는 묘한 공포와 동경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거기서는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먹거나 아니면 서로 더듬거나 하는 일탈들이 행해졌고 그래서 애들은 저희들끼리 뭔가 불량한 일을 하면 그걸 가리켜 옥수수를 꺾는다, 고 했다. 너 어제 주방에서 옥수수 꺾었지, 너 지난번에 옥수수 꺾은 거 수녀님한테 이른다, 옥수수 꺾을 생각 하지 마, 걔가 옥수수 꺾자고 하면 어쩌지. 대화를 나누는 애들 사이에서는 명확히 지칭되지 않아도 누구나 옥수수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수녀님은 고아원을 엄격히 통제했지만 마흔 명의 아이들에게는 마흔 개의 개구멍들이 있어서 요리조리 빠져 나갈 순간들이 매일 생겨났다. 대부분 불행하게도 나쁜 결과를 낳을 만한 일이었는데 그런 것들이 옥수수라는 단어 하나로 수렴되는 건 다행스럽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언급될 수록 고아원을 더 불행한 곳으로 만들 테니까. 화가 난 수녀님은 모두를 굶기거나 추위에 떨게 하거나 자지 않고 기도하게 할 것이다. 더 화가 나면 창고에 가둘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아도 고아원은 곧잘 그렇게 옥수수처럼 불행해졌고 그럴 때면 우수수— 바람을 타는 옥수수 잎들의 소리는 아주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했다. 바람이 그치지 않듯 긴장과 고통도 계속될 것 같았다. - 186쪽




<보통의 시절>


목욕탕에 불이 났다. 때문에 그 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남은 가족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파괴한 방화범이 출소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흥미로운 서사의 배경이지만, 소설은 이 배경_사건을 설명하는데 치중하지 않는다. 사건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소설은 인물, 정확히는 ‘언니’가 감각하는 불안에 하이라이트를 비춘다.

불안은 자아를 흔들리게 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게 만들며, 일상을 느닷없이 중지시키기도 한다. 불안은 전염성이 충분하고, 불안에 떠는 자아는 주변에 있는 다른 자아들을 같은 진동으로 공명하게 한다. 이제 불안은 연좌한다. 홀로 존재하기를 중단한다. 한 편의 활극같은 소설은 불안과 함께 완전히 색을 달리한다. 비극적인 색채도, 희극적인 색채도 걷어낸 소설에는 낯설고 기묘한 불안의 떨림만이 남는다.


언니가 울지 말았으면 했다. 언니가 시끄럽게 코를 풀며 우니까 집중이 안 된다. 어쩌면 언니는 큰오빠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저렇게 소리를 내서 우는 건가. 언니는 큰오빠와 나 그리고 작은오빠가 사업도 망하고 취직도 못하고 이혼도 당하는 동안 단 한 번의 부침도 겪지 않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힘들 때 시원하게 도와준 적 없었고 호들갑스럽게 반응만 했다. 우리보다 더 느꼈다, 불안과 공포를. 그런 면에서 언니는 몽상가 기질이 있다. 불안과 공포를 몽상한다. - 210쪽


언니가 불안하다, 불안해, 하면서 진땀을 닦다가 대책 없는 인간이야, 제멋대로 하는 인간이야, 하면서 큰오빠를 욕했다. 언니가 화를 내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왠지 공포를 느끼는 사람을 보면 지은 죄도 없는데 죄책감이 든다. 그러니까 두려워하는 사람 보다는 화난 사람 곁이 차라리 속 편하다. - 220쪽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긴장도 사라졌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랬구나, 하니 긴장의 자리를 따끈한 분노 같은 것이 채웠다. 연주 이모는 부모님이 살아 있을 때 식모로 왔다가 우리가 서울로 온 뒤로도 십 년 넘게 같이 살았던 사람이었다. 착했지만 어딘가 좀 모자랐고 의지가지 할 식구가 없었다. 그래도 내게는 엄마 역할을 해 준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때가 하필이면 중학생 시절이라 나는 아주 너덜너덜한 마음으로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날 그렇게 너덜너덜하게 만든 게 큰오빠였구나. 언니가 생리를 늦게 한 것도 큰오빠 탓이고, 작은오빠가 홀아비로 늙고 있는 것도 큰오빠가 하도 쪼다, 멍청이라 욕을 해서다. 그러면 우리의 원수는 큰오빠인가 싶은데 큰오빠는 김대춘이 원수라고 하고 사실 공식적으로도 그러니까 다시 원수는 김대춘이 된다. - 221쪽


그렇게 욕할 때는 언제고 언니는 다시 불안에 떨었다. 몽상은 노래처럼 리듬이 있는 것 같았다. 멈추고 연속되고 하면서 주기를 만든다. 큰오빠는 우리 원수이지만 우리 가장이고 우리 가장은 인간 말종이지만 지금은 죽음과 신 앞에 선 가엾은 단독자이며 원수를 갚으려는 전직 샐러리맨이다. 그렇게 몽상하다 멈추고 몽상하고 몽상하다보면 그런 일들이 다 맨숭맨숭해지면서 그냥 그런 보통의 일이 된다. 샐러리맨도 보통이고 마귀도 보통이다. 인간 말종도 원수도 가엾은 단독자도 다 보통의 것, 그냥 심상한 것, 아무렇지 않은 것, 잊으면 그만인 것,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다. - 222쪽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다시 노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소설가 ‘김금희’가 자각하는 가장 중요한 불안의 근본원인은 노동 그 자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의 행위를 통해 과거를 치유하려 시도해도 번번히 실패하는 인물들은 결국 현재의 문제, 노동 앞에서 작아지고 약해지고 축소된다.

‘그’는 가구회사에서 일을 하기도 하지만, 실종된 고양이를 찾아주는 일을 하기도 한다. 두 가지의 직업 중 하나의 직업이 위험에 빠졌을 때 그는 하나의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의 직군으로 유지되는 자신의 자아를 통째로 위험에 빠뜨린다. 어쩌면 자아라는 감각이 희박한 ‘그’에게 노동의 거세는 단순한 실직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읽는_존재들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노동 행위를 자신의 자아와 혼동하거나 심하게는 동일시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노동이라는 행위는 현대를 구성하고 있는 복잡다단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자아의 문제까지 건드리는 사뭇 진지한 철학적 고민으로까지 확대되고야 마는 것이다. 이것을 비극이라 하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이 비극일 수 있을까.


회의장에서 했던 일이 알려지자 그와 함께 직능계발부로 —책상마저 없는 강당으로— 차출되었던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얘기를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퇴근 후 포장마차나 전통주점, 노무사나 노조 사무실에 가서 함께 의논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 회사를 다니는 동안 시시때때로 있었던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았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저 혼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단체로 뭘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혼자서. 이를테면 언제고 사장과 독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오래 근속한 그였으니까 자격은 충분했다. - 235쪽


정동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자신의 노동권을 확보하기 위한 ‘그’의 행동은 절박함과 닿아 있다. 타인들과 연대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아에 여유가 있는 존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골몰한 존재는 타인과 연대할 수 없다. 그 불가능성으로부터 소설의 비극적인 향방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언가를 참아내는 마음으로, 읽는_존재는 읽는_행위를 지속한다.


고양이를 찾으러 가기 전, 그는 언제나 동방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회사만큼이나 오래된 식당이었다. 한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회사 직원식당 노릇을 하다가 지금은 기사식당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테이블의 위치도 달라졌다. 혼자 식당을 찾는 기사들을 위해 모든 테이블이 텔레비전을 향해 일렬로 배치되었다. 그는 그런 배치가 좋아 매일 저녁을 여기서 해결했다. 등 건너에 등이, 그 등 뒤에 또 등이 있어, 시선을 받을 확률이 적은 게 마음에 들었다. - 238쪽


그가 다시 무뚝뚝하게 학생은 이제 집에 돌아가, 했다. 같이 다니게 해달라고 학생이 부탁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배관실이나 급수실 같은 좁은 공간을 다 뒤져야 할텐데 저런 어린애는 필요가 없었다. 울지도 모른다. 바퀴벌레, 바퀴벌레들이 있었고 귀뚜라미 천국이었으며 꼽등이들이 있었다. 고양이들은 꼭 그런 곳에 숨었다. 그는 지하로 걸어내려가 배낭에서 소형 그물을 꺼내 손에 쥐면서 아저씨처럼, 아저씨처럼, 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나처럼 부모를 잃고 야간학교를 다니다 말고 검정고시를 봐서 — 그는 대학에 가지 않고 민간의 교육장에서 캐드 등을 배워 화이트칼라가 되었지만 집에 세 채인 그 학생은 그와는 달리 대학에 갈 것이었다. 아무리 멍청하고 부적응한 학생이라도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무조건 가는 거지. 하지만 저런 애들은 대학에 가더라도 화이트칼라는 안 될 것 같았다. 블루칼라도 안 돼. 불황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까 싶은데 그러면 그냥 칼라가 없는 티셔츠같은 인생을 살면 된다. 칼라가 있는 옷을 입을 필요 없이 캐주얼하고 간편하고 자유롭게 장난감이나 모으면서. - 250쪽


그뒤로 또 자살하려고 할 때마다 예를 들어 벽의 못에 노끈을 걸고 목을 매려 할 때마다 그것, '다라이'에 있는 그것들이 그의 죽음을 간섭했다. 어떻게 한단 말이냐, 저것들을. 그 간섭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는 며칠을 더 살았고 나중에는 그냥 자기 자신을 고양이에게 기탁했다. 어떻게 보면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죽을 수 있는 주체에서 간섭받는 객체로 물러선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양이는 이 괴괴한 단독주택에서 움직이고 먹고 눕고 싸고 울고 할퀴는 유일한 생명체였으므로 고양이에 집중하는 것은 삶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사실이 그를 죽음에서 건져냈다. - 254쪽


회사든 실존의 영역이든 그러니까 이 세계의 그 어디든 간에, 잔존하려는 존재들은 언제나 그 시도의 끝에서 야멸찬 실패를 온 몸으로 체감하고야 만다. 비단 ‘김금희’의 소설 세계 내부에서 뿐만이 아니라 읽는_존재가 속한 실제의 세계 역시 그러하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노끈으로 된 올가미가 눈 앞에서 흔들거린다. 고양이가 시끄럽게 운다. 생과 사는 그 어처구니 없는 것들 사이의 그 무엇으로 선택된다. 임의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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