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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프리드리히 니체 - 비극의 탄생, 10주차 (마지막)

21장


  

 페르시아 전쟁을 수행한 그리스 민족은 디오니소스적 다이몬의 극심한 경련에 의해 가장 깊은 내부까지 뒤흔들려졌지만, 정치적 감정, 자연스런 애향심, 투쟁심이 강력하게 발휘된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디오니소스적 황홀상태에 너무 심취하여 현실을 도피하려했고, 로마제국은 정치적 충동의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인해 극단적인 세속화의 길로 빠진다. 인도와 로마 사이에서 그리스인들은 제3의 형식을 고안해낸다. 명상이나 세속적 권력에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활기를 불어넣어주면서도 동시에 관조적인 기분으로 이끄는 ‘기가 막힌 포도주’. 이것이 바로 <비극의 거대한 힘>이다. 니체는 이 비극이 음악의 최고의 황홀경을 자신 속에 흡수하여 그리스인들뿐 아니라 우리의 경우에도 음악을 완성시킨다고 말한다. 그리스인들의 비극적 신화에서 비극적 주인공은 세계 전체를 자기 등에 짊어진다. 비극은 비극적 인물을 통해 실존에 대한 탐욕스러운 충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고상한 쾌락에 대해 기억하게 한다. 비극적 주인공은 자신의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몰락을 통해 고귀한 쾌락을 예감하고 준비한다.




 이때 비극은 청중들에게 음악이 ‘신화라는 조형적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최고의 표현수단’에 불과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고귀한 착각’의 도움이 없다면 청중들은 비극에서 음악 그 자체만으로 광란도취의 자유로운 느낌에 젖을 수 없을 것이다. 신화는 우리를 음악으로부터 보호해 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에 최고의 자유를 준다. 음악은 자유를 부여받은 답례로 비극적 신화에게 감동적이고 강한 설득력을 갖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제공한다. 음악만이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며, 음악의 도움 없이 ‘말과 형상’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획득할 수 없다. 




 니체는 어려운 관념을 소수의 독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잠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양해를 구하며 자신과 독자의 공통된 경험의 한 실례로 바그너의 가곡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든다. 니체는 “음악을 더욱 가깝게 느끼기 위해서 무대에 전개되는 사건의 형상, 등장인물의 말과 정열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런 자들은 음악을 기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니체는 자신이 상대하는 사람은 음악과 직접적인 혈연관계를 갖고, 음악과의 무의식적 관계를 통해서만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진정한 음악가는 ‘형상과 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음악을 느끼며, 음악을 통해 영혼의 모든 날개를 펼친다.





 여기에 비극적 신화와 비극적 영웅이 끼어들게 된다. 그리고 ‘아폴론적’ 힘이 환희에 찬 착각이라는 향유를 들고 나타난다. 이렇게 아폴론적인 것, 착각은 우리를 디오니소스적인 보편성으로부터 떼어 놓고 여러 개체들에 매료시킨다. 아폴론적인 것은 개체들을 통해 위대하고 숭고한 형식을 맛보고자하는 우리의 미의식을 만족시킨다. 또, 삶의 핵심을 사상적으로 파악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아폴론적인 것은 인간을 착각에 빠뜨려 디오니소스적인 사태의 보편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아폴론적인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사실상 아폴론적인 것을 섬기면서 그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고 게다가 음악이 본질적으로 아폴론적인 내용의 표현수단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연극과 음악 사이에 작용하는 예정조화로 연극은 언어연극이 도달하기 어려운 최고의 가시성에 도달한다. 무대 위의 인물들은 선율이 되고, 화음의 교체를 통해 사물들의 관계가 추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방식으로 직접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음악과 연극의 예정조화 역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상은 우리를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과도함에서 해방시켜주는 ‘아폴론적인 착각’이다. <근본적으로는 음악과 연극의 관계는 그 반대이다.> 음악은 세계의 본래적인 이념이며, 연극은 이 이념의 반영, 즉 그것의 개별화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착각과 가상에서 비극의 등장인물은 항상 현상에 불과하다. 현상들은 음악의 피상적인 모방일 뿐 본질에 다가가진 못한다. ‘영혼과 육체의 대립’이라는 관점으로 ‘음악-연극’의 난해한 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비극에서 아폴론적인 것은 착각을 통해 디오니소스적 근본요소인 음악에 완전히 승리를 거둔다. 아폴론적인 것은 연극을 가장 명료화하려는 목적에 음악을 이용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폴론적인 착각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돌파되고 파괴되었다. 음악의 도움으로 모든 인물을 내적으로 조명하고 눈앞에 펼쳐놓는 연극은 모든 아폴론적 예술효과를 <초월>하는 영향력을 만들어낸다. 비극의 전체적인 효과 속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다시 우위를 차지한다. 이로써 아폴론적인 착각의 정체가 폭로된다. 즉, 아폴론적인 것은 비극이 공연되는 동안만 본래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가리고 있는 ‘베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극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관계는 ‘형제결의’를 통해 상징된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의 언어로 말하고, 마침내 아폴론이 디오니소스의 말을 한다. 그로써 비극과 예술 일반의 최고 목표가 달성된다.




22장




 비극내에서 사람은 비극적 주인공을 서사시적 명료성과 아름다움 속에서 바라보고, 주인공의 행위가 정당한 것이라고 느끼지만 주인공의 ‘파멸’에 쾌감을 느낀다. 주인공에게 닥칠 고통을 생각하며 전율하면서도 주인공의 고통을 보면서 훨씬 더 강한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기괴한 자기분열, 아폴론적 절정의 급격한 변전은 디오니소스적인 마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비극적 신화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아폴론적 예술수단에 의해서 형상화하는 것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비극작가는 풍요로운 개체화의 신과 동일하게 여러 인물들을 창조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다. 그 다음, 비극작가 자신의 거대한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현상세계 자체를 삼켜버리고, 현상세계의 배후에서 현상세계를 파괴함으로써 근원적 일자의 품 안에서 최고의 예술적인 근원적 환희를 예감하게 한다.




 니체는 당대 미학자들은 청중이 받을 아폴론적이며 디오니소스적인 감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며 비판한다. 니체는 음악적 비극에서 최고의 비장함이 단지 미적 유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극의 효과를 미적 영역 이외의 것에 근거하여 설명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미학적 소질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비극의 재탄생과 함께 미학적 청중도 다시 태어났다. 이전까지는 미학적 청중의 기묘한 대용품으로 ‘비평가’가 있었다. 비평가는 반은 도덕적이고 반은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이 세계를 인위적인 것으로 분석했다. 천성적으로 고귀하고 섬세한 능력을 갖춘 많은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교육과 저널리즘에 의해서 예술작품을 틀에 박힌 방식으로 감상하도록 훈련되어버렸다. 이들 때문에 본래의 예술적 의도는 소외되고 말았다. 극단적으로는 극장을 도덕적인 국민교양의 도량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 것이다. 극장과 음악당에서는 비평가가, 학교에서는 저널리스트가, 사회에서는 신문이 지배한 사이, 예술은 가장 저급한 종류의 오락물로 변질되고 미학적 비평은 허영에 찬 산만하고 이기적이며, 빈약하고 비독창적인 사교의 접착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처럼 예술에 관함 지껄임이 성행했던 시대도 없었지만, 현대처럼 예술이 무시된 적도 없었다며 니체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비평적인 야만인이 되어버린 이들이라도, 훌륭한 로엔그린 상연에서 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면서도 예기치 않았던 효과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는 ‘미학적 청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미학적 청중의 재탄생을 암시하는 것이다. 


23장




 자신이 이 진정한 미학적 청중과 어느 정도의 혈연관계를 갖는지 혹은 자신이 소크라테스적인 비평적 인간들의 공동체에 속하는지를 정말 엄격하게 검토해 보려고 하는 사람은 그가 무대위에서 표현되는 기적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그때 엄격한 심리적 인과율에 따르는 자신의 역사학적 감각이 우롱당했다고 느끼는지 혹은 자신이 너그러운 양보심으로 그러한 기적을 아이들에게는 이해되기 쉽지만 자기에게는 소원한 현상으로서 용인하는지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체험하는지를 말이다. 즉 그는 그러한 것에 비추어 자신이 압축된 세계상인 신화를 이해할 수 있는지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는 현상들의 축약이며 기적 없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 인간에 자리잡은 디오니소스적 속성과 소크라테스적 속성들의 우위를 확인하려면 비극과 신화를 향한 자신의 태도를 파악하면 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소크라테스적 속성에 힘입어 비극과 신화를 단지 비논리적으로, 미개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미학적 청중에 반하는 역사학적 정신에 물든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 책에서 니체는 비극과 신화를 우리들의 추상관념으로 모두 파악할 수 있는 형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에 내재한 리비도와 같이 비극과 신화도 또한 인간 의식이 닿지 않는 곳에 자리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의식을 통해 비극과 신화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기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신화 없이는 모든 문화는 자신의 건강하고 창조적인 자연력을 상실하게 된다. 신화로 둘러싸인 지평 안에서 비로소 문화의 운동 전체는 통일되고 완결되는 것이다. 상상력과 아폴론적인 꿈의 모든 힘들은 신화를 통해서 비로소 정처 없는 방황에서 구출된다. (중략) 그리고 국가조차도 종교와 자신의 관계와 신화적 관념으로부터의 자신의 성장을 보증하는 신화적 기초보다 더 위력있는 불문율을 알지 못한다. 이제 위의 것 옆에 신화 없이 인도되는 추상적 인간, 추상적 교육, 추상적 풍습, 추상적 법률, 추상적 국가라는 것을 세워 보라. 어떠한 토착의 신화에 의해서도 제어되지 않는 예술적 상상의 정처 없는 방황을 머리에 떠올려 보라. (중략) 이것이야말로 신화의 파괴를 목표로 한 저 소크라테스주의의 귀결로서 현대의 모습인 것이다. 충족되지 않은 현대 문화의 저 거대한 역사적 욕구, 수많은 다른 문화들의 수집, 불타는 인식욕은 신화의 상실, 신화적 고향의 상실, 신화라는 어머니 품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 신화는 인간에게 가장 깊은 토대를 제공하고 인간 존재를 완성시킵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도 또한 신화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통해서만 인간 개별화의 원리(아폴론)는 비로소 표현할 것을 찾게 됩니다. 힘에의 의지 그 자체로 표현할 대상과, 표현하는 주체는 모두 인간 내에서 같아지고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신화가 사라진다면, 인간 존재는 불완전해지고, 표현할 것을 찾지 못한 표현자와 신화를 없앤 소크라테스적 가치만이 남게 됩니다. 결국 사회는 자연 합일을 포기한 채 이성이라는 기형적 상태에 이르고, 이것이 2차 세계대전과 인종청소, 인종차별 등의 미개한 현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미학적 인식을 정화하기 위해서 그리스인에게서 두 신의 형상을 빌려 왔다. 우리는 이 두 신이 판연히 다른 예술의 왕국을 제각기 독자적으로 지배하며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두 신이 서로 접촉하면서 서로를 고양시키는 것에 대해서 감지하게 되었다. 두 예술적 근본충동이 현저하게 분리됨으로써 그리스 비극의 몰락이 초래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예술과 민족, 신화와 풍속, 비극과 국가가 그것들의 기초에 있어서 얼마나 필연적이고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를 깊이 음미해 보게 한다. 비극의 저 몰락은 동시에 신화의 몰락이었다. (중략) 하나의 민족은 자신의 체험에 영원한 것이라는 각인을 찍을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은 세속에서 벗어나며 시간의 상대성과 삶의 진정한, 즉 형이상학적인 의미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적인 내적인 확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이 두 신이 분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신의 분리는 곧 비극과 신화의 몰락이었고, 이 몰락과 함께 사회와 국가, 예술과 민족 등 인간 존재의 모든 형태는 몰락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영원의 모습(sub specie aetemi)으로 표현하는 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15세기의 알렉산드리아적, 로마적인 고대의 부활 이래 오랫동안의 형언하기 어려운 중간시기를 거쳐서 우리는 이제 위와 같은 그리스 말기의 상태에 가장 뚜렷하게 접근하게 되었다. 똑같은 과잉의 지식욕, 똑같이 싫증을 모르는 발견자의 행복, 동일한 거대한세속화는 정점에 도달해 있고 그 외에도 고향을 상실한 정처없는 방황, 타인의 식탁을 향한 탐욕스런 쇄도, 경박한 현재 숭배, 혹은 둔감한 마취상태의 세계도피, 이 모든 것은 '지금 이 시간(Jetztzeit)'의 무상한 모습(sub specie saeculi) 아래 존재한다.




- 니체는 여기서 로마를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의미로 두었습니다. 실용주의로 대표되는 로마의 사회상이 이성절대주의로 대표되는 소크라테스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성의 인간에 대한 지배가 진행되고 있으며, 여기서 한 민족, 국가, 사회가 자기 자신을 지키려면 수호신(Hausgotter)와 신화적 고향이 필요하다고 니체는 주장합니다.




24장




 우리는 음악적 비극의 특유한 예술적 작용들 중에서 아폴론적 착각을 강조해야만 한다. 이러한 착각에 의해서 우리는 디오니소스적 음악과 직접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우리는 아폴론적 예술이 음악정신에 의해서 날개를 얻고 하늘 높이 올려진 바로 이곳에서 아폴론적 예술의 힘이 최고로 상승되고, 이와 함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저 형제결의 속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적 의도가 극치에 도달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1, 22장과 유사하기에 설명은 제하였습니다.




 우리는 연극을 보면서 통찰력 있는 눈으로 그 내부에서 움직이는 동기의 세계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의 가장 깊은 의미를 거의 간파했다고 믿는 어떤 비유의 형상만이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여기며, 그 뒤에 있는 근원적 형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그 장막과 같은 비유의 형상이 걷히기를 원했다. 형상이 아무리 선명하고 명료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개시하기도 하지만 은폐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략) 관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관조를 넘어서 동경하는 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두 가지 과정이 비극적 신화를 관찰할 때 얼마나 분명하게 병존하며 함께 느껴지는지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미학적인 관객은 비극의 특유한 효과들 중에서 저 병존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나에게 증언할 것이다. 




- 아폴론적 관조와 개별화는 쾌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관조는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완벽하게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혹여나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완벽하게 보게 된다면 인간 존재는 자연 합일을 위해 자기를 실레노스의 지혜에 맡기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독단적인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갖는 위험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그는 디오니소스를 베일의 장막 너머에서 관조하게 해주는 아폴론적 관조는 인간을 근원적 형상에 안전하게 옮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이 자연현실의 모방일 뿐만 아니라 자연현실의 형이상학적 보충이며, 자연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것 옆에 대등하게 놓여진 것이라면, 삶이란 실제로 그렇게 비극적이기 마련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어떠한 예술형식의 발생을 조금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비극적 신화도 그것이 적어도 예술에 속하는 한, 예술 일반이 갖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찬란한 변용이라는 목표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상세계를 고통받는 영웅의 형상 아래서 제시할 경우, 그것은 무엇을 찬란하게 변용한 것인가? (중략) 비극적 신화의 내용을 이루는 추악과 부조화가 어떻게 미학적 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여기에서는 이제 대담하게 돌진하여 예술의 형이상학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삶과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라는 앞에서 말한 문장을 반복하고자 한다.




- 비극은 흔히 프로메테우스, 오이디푸스 등 영웅의 형상을 취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영웅적으로 빛나는 삶의 모습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며 삶의 허무함을 표현하는 것이었을까요? 니체는 둘 모두 아니라고 말합니다. 삶과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이를 통해서 니체는 비극은 인간 삶과 세계를 미학적으로 표현한 최고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비극적 신화가 산출하는 쾌감은 음악에서 불협화음이 낳는 쾌감과 고향을 같이하는 것이다. 고통에서조차 느껴지는 근원적인 쾌감을 수반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음악과 비극적 신화의 공통의 모태인 것이다. (중략) 우리는 예술에서 사용된 불협화음과 관련하여 이러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특정지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듣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듣는 것을 넘어서 동경한다고. 명료하게 지각된 현실에서 최고의 쾌감을 느끼면서도 무한한 것으로 진입하려는 노력, 즉 동경의 날개짓은 우리가 두 가지 상태속에서 어떤 디오니소스적 현상을 인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현상은 항상 새롭게 반복해서 우리에게 개체의 세계를 건설하고 파괴하면서 유희하는 것을 근원적 쾌감의 분출로서 계시하는 것이다. 




- 여기서 불협화음은 바그너가 사용한 트리스탄 코드를 말합니다. 바그너는 계류음이라는 화성학의 기술적 장치에 대해서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떤 화음 속의 음이 다음에 이어지는 화음에 속하지 않을 때 후속 화음에서 음을 연정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계류음은 새 음에선 이질적이기 때문에 해결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불협화음을 들을 때 다음엔 이를 해결하는 협화음이 등장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고  인간은 깜짝 놀라 긴장감을 더 지속시킵니다. 마침내 해결이 일어날 때 인간은 고조된 만족감을 느끼며 숨을 내쉬게 됩니다. 바그너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주인공의 생애의 끝을 의미하는 최종의 화음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화음에 가서야 모든 불화가 해결되고 종말이 오며 그 후엔 정적이 이어집니다. 불협화음을 통해 인간은 디오니소스에 다가서며, 인간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느끼게 됩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디오니소스의 음악을 믿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비극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 비극 속에 우리는 음악으로부터 재탄생한 비극적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화 속에서 그대들은 모든 것을 희망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것까지 잊어버려도 좋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독일의 정령들이 집과 고향에서 소외되어 간악한 난쟁이들을 섬겨 왔던 저 기나긴 굴욕의 나날아었다. 그대들은 이 말을 이해한다. 그대들이 또한 결국 나의 희망을 이해하게 될 것처럼.




25장




 음악과 신화는 똑같이 어떤 민족의 디오니소스적 능력의 표현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양자는 자신들의 아주 강력한 마법의 힘을 믿으면서 불쾌의 가시를 가지고 유희한다. 양자는 이러한 유희를 통해서 '최악의 세계'의 존재 자체도 정당화한다. (중략) 이 환상은 불협화음 자체의 본질을 아름다움의 베일로 은폐한다. 이것이 아폴론적인 것의 진정한 예술적 의도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꿈 속에서만이라도 고대 그리스의 삶 속으로 옮겨 갔다고 한 번만 느껴본다면 이러한 미적 작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직감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드높은 이오니아식 주랑 밑을 거닐면서, 순수하고 고상하게 그어진 지평선을 바라보고, 빛나는 대리석에 비춰지는 자신의 성스럽게 변용된 모습을 옆에 두고, 조화롭게 울리는 목소리와 율동적인 몸짓으로 우아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엄숙하게 걸어 다니면서 그는 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아름다움의 물결을 보면서 아폴론에게 손을 들어 올리며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복된 민족, 그리스인들이여! 델로스의 신 아폴론이 그대들의 주신찬가의 광기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대들 사이에서 디오니소스는 얼마나 위대한 존재였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감격하고 있는 그에게 백발의 아테네 노인이 아이스킬로스의 숭고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자네, 이상한 이방인이야, 그러나 이러한 사실도 말하라. 이 민족이 이처럼 아름답게 될 수 있기 위해서 이 민족은 얼마나 괴로워해야 했던가!라고. 그러나 지금 나를 따라와 비극을 보고 나와 함께 두 신에게 제물을 바치세!"




-1872년에 출간된 비극의 탄생은 여기까지 입니다.




자기비판의 시도(1886년에 니체가 추가한 서문)


1.


  저자가 그리스인과 그리스 예술의 명랑성에 대해서 품었던 의문은 결국 음악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이라는 사상으로 정립되었다. 그리스인들과 비극적 음악? 그리스인들과 염세주의 예술작품? 이제까지 인간들 중에서 가장 성공했으며, 아름답고, 가장 많은 부러움을 받았으며, 우리를 삶으로 가장 강력하게 유혹하는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필요로 했다고? 예술을 필요로 했다고? 그리스 예술을 무엇을 위한 것인가?


  염세주의란 반드시 몰락, 퇴폐, 실패, 지치고 약화된 본능의 표시인가? (아니면) 강함의 염세주의가 존재하는가? 행복으로부터, 넘쳐나는 건강으로부터, 그리고 생의 충만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지적인 편향, 즉 삶의 가혹함과 두려움 등에 대한 지적 편향이 존재하는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하며 용감했던 시대의 이 그리스인들에게 비극적 신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현상은? 이 현상에서 탄생한 비극이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 비극을 사멸케 한 소크라테스주의야말로 몰락과 피곤, 병 그리고 무질서하게 해체되어 가는 본능의 징조가 아닐까? 모든 학문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어쩌면 학문은 염세주의에 대한 두려움이자 그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학문은 진리에 대한 세련된 정당방위가 아닐까?  학문은 비도덕적으로 말하면, 교활함이 아닌가? 소크라테스여, 비밀에 찬 반어의 대가여, 그것이 혹시 그대의 아이러니가 아니었는가?


2.


  이 책은 예술을 토대로 하여 세워져 있다. 이는 학문의 문제는 학문을 토대로 해서는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예술가 형이상학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요컨대 이 책은 노숙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나쁜 의미에서 처녀작이며, 청년기의 모든 결점, 무엇보다도 장황함과 질풍노도와 같은 격정에 의해 규정된 책이다. 나의 눈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늙었고, 백배나 눈이 높아졌지만, 이 대담한 책이 처음으로 도전한 과제, 즉 학문을 예술가의 관점에서 보고, 예술을 삶의 관점에서 본다는 과제조차 낯설어 하지 않을 정도로 냉담하게 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책은 이런 눈에도 낯설게 나타나는 것이다.


3.


  어쨌든 여기서는-이것은 사람들이 호기심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시인한 것이지만-어떤 낯선 소리, 즉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디오니소스)의 사도가 말하고 있다. 이 새로운 영혼은 말하지 말고, 노래했어야 했다! 내가 그 때 말해야 했던 것을 시인으로서 말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무엇보다도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문제, 즉 우리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리스인들은 전혀 인식될 수도 상상될 수도 없다는 문제가 발견되고 탐사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4.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 책에는 이에 대한 대답이 있다. 근본적인 질문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갈수록 강해져 가는 욕구가 정말로 결핍, 궁핍, 우울, 고통에서 자라나왔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간상으로 그 이전에 나타났던 정반대의 욕구, 즉 추한 것에 대한 욕구, 염세주의, 비극적 신화, 삶의 근저에 놓여 있는 모든 공포스러운 것, 악한 것, 수수께끼 같은 것, 파괴적인 것, 불길한 것의 형상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훌륭하고 엄격한 의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어쩌면 기쁨으로부터, 힘으로부터, 넘쳐흐르는 건강으로부터, 과도한 충만함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닐까? 그리스인들이 청춘의 힘에 넘치던 바로 그 때 비극적인 것을 향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염세주의자였다면 어떤가? 그리스 땅에 최대의 축복을 가져온 것이 이런 광기였다면? 이와 반대로 자신들이 해체되고 약화되는 바로 그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훨씬 더 낙천적이고 피상적으로 배우처럼 되면서 논리와 세계의 논리화에 더욱 열광하게 되고, 이에 따라서 동시에 더 명랑하고 학문적이 되었다면 어떤가?  우리는 여기에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하나 덧붙이기로 하자.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도덕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


  서문에서 이미 도덕이 아니라, 예술이 본래적인 형이상학적 활동으로 제시되고 있다. 본문에서도 세계의 현존은 단지 미적인 현상으로만 정당화되어 있다는 명제가 여러 번 등장한다. 사실 이 책 전체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진의, 예술가의 배후 의미만을 알고 있다. 이 의미를 신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러나 이 신은 완전히 두려워할 필요 없는 단호한 성격의 반도덕적인 예술가로서 신이다. 그는 건설에서뿐 아니라 파괴에서도, 선에서뿐만 아니라 악에서도 한결같이 자신의 쾌락과 독재권을 만끽하려 드는 신이다. 이런 예술가 형이상학을 사람들은 자의적이고 무익하며 공상적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삶에 대한 도덕적 해석과 도덕적 의미부여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해 왔던 한 정신이 이 예술가 형이상학에 의해서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은 미적 세계 해석과 세계 긍정과 기독교만큼 대립되는 것은 없다. 기독교는 오직 도덕적일 뿐이며, 또한 도덕적이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절대적인 척도를 가지고, 즉 자신이 믿는 신의 진실성을 가지고 예술을, 모든 예술을 거짓의 영역으로 추방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 및 평가 방식 이면에서 나는 오래 전부터 삶에 대한 적개심, 삶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에 가득 찬 혐오를 발견했다. 왜냐하면 모든 삶은 가상, 예술, 착각, 광학, 관점적인 것과 오류의 필연성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도덕 앞에서 삶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인 것이기 때문에,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부당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덕은 삶을 부정하려는 의지이고, 삶을 파괴하려는 은밀한 본능이며, 퇴락, 왜소화, 비방의 원리, 종말의 시작이 아닐까? 그러므로 당시 삶을 변호하는 나의 본능은 이 문제의 책을 가지고 도덕에 대항했던 것이며, 도덕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가르침과 평가를 고안해 냈고, 그것을 문헌학자로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불렀던 것이다.


6.


 나는 칸트와, 비극적 정신이 체념으로 이끈다고 여긴 쇼펜하우어의 정신과 취향에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낯설고 새로운 가치 평가를 힘겹게 그들의 정식에 따라 표현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내가 유감스러워하는 훨씬 더 나쁜 점은 당시 내가 내게 열려진 그대로의 웅대한 그리스적인 문제를 가장 근대적인 사태와 혼합해버림으로써 그것을 망쳐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곳에 희망을 걸었다는 것! 내가 독일적 본질이 마치 자신을 발견하고 재인식한 것처럼 독일의 최근 음악을 토대로 하여 독일적 본질에 대해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는 것! 이러한 성급한 기대와 그릇된 적용을 도외시한다면, 이 책에서 제기되고 있는 디오니소스적 대(大)의문은 계속 적용된다. 독일 음악과 달리 낭만주의적인 기원을 갖지 않고 디오니소스적 기원을 갖는 음악은 어떠한 성질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가?


7.


 그러나 니체여, 만일 그대의 책이 낭만주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낭만주의인가? 그대의 예술가 형이상학에 나타나 있는 것 이상으로 현재, 현실, 그리고 근대적인 이념들에 대한 깊은 증오가 나타날 수 있을까? 그대의 염세주의적인 저서는 그 자체가 반(反)그리스주의와 낭만주의이며, 몽롱하게 하고, 도취시키기도 하는 어떤 것이고, 어쨌든 일종의 마취제이고, 심지어 한 편의 음악, 독일 음악 아닌가? 그러나 독자여, 들어보라!


형이상학적 위로를 얻어, 요컨대 낭만주의자들이 끝나는 것처럼 기독교적으로 끝나 버린다는 것은 매우 있을 법한 일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우선 차안에서 위로하는 예술을 배워야 한다. 그대들이 전적으로 염세주의자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나의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웃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아마도 그대들은 웃는 자로서 그 후 곧 언젠가 한 번은 모든 형이상학적 위로 나부랭이들을 악마에게 던져주고 특히 제일 먼저 형이상학을 던져 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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