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이상의 상술된 역사적 예에서 우리가 밝히려고 한 것은 비극이 음악정신으로부터만 탄생될 수 있는 것처럼 음악정신이 소멸될 때 비극도 몰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갖는 기이한 성격을 완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인식의 근원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자유로운 눈으로 우리 시대의 유사한 현상들을 관찰해야만 한다.이를 위해서 우리는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현 세계의 최고의 영역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 즉 만족할 줄 모르는 낙천주의적 인식과 비극적 예술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야만 한다.
- 소크라테스적 인식욕이 비극에 개입할때 음악정신은 사라집니다. 한편 니체는 이러한 현상들이 비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술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16장에서부터는 비극 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전반 등 전 영역에서 디오니소스적 가치와 소크라테스적 가치의 대립을 다룹니다.
이 경우 나는 어느 시대든지 예술 특히 비극 예술에 대해서 대항하는 모든 적대적 충동들을 무시하고 싶다. 이러한 충동들은 현대에도 의기양양하게 확산되고 있다. (중략) 나는 다만 비극적 세계관의 가장 존귀한 적대세력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할 뿐이다. 이 경우 내가 가장 존귀한 적대세력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그 조상 소크라테스를 필두로 하면서 낙천주의를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로 갖는 학문을 의미한다. 내게는 비극의 재탄생을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들도 곧 거명될 것이다.
-다만 니체는 가치들의 대립을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로 국한시킵니다. 여타 다른 철학이나 분파들은 니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 주의의 아류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비극의 재탄생을 주장하는 예술도 사실은 에우리피데스 이후의 신 비극을 옹호하는 세력일 뿐, 새로운 분파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니체의 비판대상에 포함됩니다.
저 싸움의 한복판에 뛰어들기 전에 이제까지 획득한 인식의 갑옷을 입기로 하자. 나는 그리스인들의 두 예술 신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에 시선을 두고 이 두 신에게서 가장 깊은 본질과 최고의 목표에 있어서 서로 다른 두 예술세계의 대표자들을 본다. 아폴론은 개별화의 원리를 찬란하게 변용하는 정령으로서 내 앞에 서 있다. (중략) 이에 반해 디오니소스의 신비적인 환호성에 의해서 개별화의 속박은 분쇄되고 존재의 어머니들에게 이르는 길, 사물의 가장 깊은 핵심에 이르는 길이 열리게 된다. (중략) 음악은 모든 다른 예술처럼 현상에 대한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따라서 세계의 모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것,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물자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러한 인식에서 비로소 미학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 디오니소스적 가치와 소크라테스적 가치의 대립을 분석하기 전, 다시 한번 디오니소스적 가치와 아폴론적 가치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이 관계는 지금까지 니체가 서술한 핵심이기 때문에 다시 서술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이 두 가치의 관계를 그렇다면 어떻게 정의했는지는 좀 탐구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가치는 대립보다는 합일의 관계라고 주장합니다. 둘 모두 자연, 힘에의 의지를 표현하는 일자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자연 그 자체라면, 아폴론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개개의 일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가치들은 충돌한다기 보다는, 서로를 필요로 해야만 완성된 힘에의 의지, 자연 합일의 상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는 니체가 초기 철학 이후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라는 표현을 줄이고 일원론을 주장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저 근본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 자체로서 분리되어 있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저 예술적 힘들이 서로 나란히 활동하게 되면 어떠한 미적 효과가 나타날 것인가? 좀 더 간단하게 묻는다면 음악은 형상과 개념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가 가장 상세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에 의거하여 우리는 현상세계와 음악을 동일한 사물의 서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동일한 사물 자체가 서로 대응하는 이 둘을 매개하는 유일한 것이며, 저 대응관계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이 매개체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응관계에 따라서 음악이 세계의 표현으로서 간주될 경우 그것은 최고로 보편적인 언어이다. (중략) 그러나 음악의 보편성은 철저하게 명료한 규정성과 연결되어 있다. (중략) 그러나 그가 정신이 들고 나면 그는 자기 눈앞에 떠다니던 사물들과 저 음악 사이에 어떠한 유사성도 발견해 낼 수 없다. 음악은 의지 자체의 직접적 모사이고, 세계의 모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것을 표현하며 모든 현상에 대해서 물자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구체화된 음악, 구체화된 의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즉 개념들은 사물 이후의 보편이지만, 음악은 사물 이전의 보편이며, 현실은 사물 속의 보편이다.
- 니체는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권 309쪽을 인용합니다. 초기 니체 철학은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에 특히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초기 니체 철학과 많이 유사합니다. 이에 따르면 음악과 세계는 물자체의 가장 보편적인 표현입니다. 또한 음악은 다른 예술형식과 달리 의지 그 자체의 위치를 갖는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니체는 왜 음악이 우월성을 갖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서술하지 않습니다. 음악의 우월성은 <비극의 탄생>의 주제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왜 음악이 이러한 위치를 가지는지 납득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형상과 개념은 진실로 그것에 일치하는 음악이 작용하게 되면 고양된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아폴론적 예술에 보통 두 가지 작용을 한다. 첫째로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보편성을 비유의 형식으로 관조하게 하며, 둘째로 음악은 비유적인 형상이 최고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게 한다.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는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음악의 능력은 신화, 즉 가장 유의미한 실례, 다름 아닌 비극적 신화를 낳는 데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중략) 음악이 최고로 고양될 때는 필연적으로 최고의 형상화에 도달하려고 해야만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음악이 자신의 본래의 디오니소스적 지혜에 대한 상징적 표현을 발견할 줄 안다는 것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 음악과 형상이 일치하여 만나게 되면 서로 고양됩니다.이 때 디오니소스적 예술과 아폴론적 예술은 보편성과 비유성 모두 고양되는데, 이 상태는 니체에 의하면 비극에서만 드러납니다. 니체에 의하면 보편성과 비유성이 가장 고양된 상태는 그리스적 신화, 비극의 상태인데,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술형식은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비극적인 것은 보통 가상이라든가 아름다움이라든가 하는 유일한 범주에 따라서 이해되는 예술의 본질로부터는 결코 진정한 방식으로 도출될 수 없다. 개체의 파멸에서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로소 이해된다. (중략) 디오니소스적 예술이야말로 말하자면 개별화의 원리 배후에 있는 저 전능의 의지를 표현하는 예술, 모든 현상의 피안에 존재하며 어떠한 파멸에도 굴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중략) 여기서 아폴론은 현상의 영원성을 밝게 찬미함으로써 개체의 고뇌를 극복한다. 동일한 자연이 디오니소스적 예술과 그것의 비극적 상징법에서는 자신의 왜곡되지 않은 참된 소리로 우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그대들은 나처럼 존재하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천 속에서 영원히 창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하도록 영원히 강제하며, 현상의 이러한 변천에 영원히 만족하는 근원적인 어머니인 나를!"
- 다시 요약입니다. 디오니소스적 가치와 아폴론적 가치가 어떻게 예술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 보편성과 비유성을 토대로 다시 설명합니다. 따라서 마지막에 나온 자연이 외치는 소리도 동일한 맥락에서 보편성과 비유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것이 비극정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17장
우리는 개별 실존의 끔찍함을 깨닫지만 예술이 사티로스의 지혜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위로가 되어준다. 예술은 근원적 일자와 하나가 되는 순간적 체험을 통해서 우리를 인생의 무상함으로부터 구한다. 디오니소스적 예술(비극)은 우리에게 비극의 개개인, 즉 개체가 몰락하더라도 근원적 일자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삶을 긍정하게 해 준다. 그리스 비극은 음악 정신에서 탄생했다. 그리스 비극과 그것이 다루는 신화를 언어적으로 파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언어는 신화를 완전히 드러내는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남아있는 언어로만 그리스 비극을 접해야 하는 우리는 그리스 비극을 다소 무의미하고 피상적인 효과를 지닌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 음악을 탐구함으로써 그리스 비극과 그 음악의 압도적인 효과를 깨달을 수 있다.
서정시에서 시작해 아티카 비극에 이르기까지 음악정신은 형상과 신화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투쟁한다. 그리스 비극은 결국 그리스인들 자신에 의해 몰락하지만 이 투쟁 속에 탄생한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은 그리스 예술 표면에서만 자취를 감추었을 뿐 비밀제의 속에서 계속 살아남아 뛰어난 예술가들을 매료해왔다. 비극을 파괴한 힘인 소크라테스적 세계관이 비극의 부활을 영원히 막을 수 있을까? 음악은 신화를 재탄생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있으며, 이에 대조되는 것이 아티카 신희극에 존재하는 학문의 정신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지적과 같이 신희극은 음악의 의지를 표현하기보다는 현상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디오니소스적 음악이 현상 너머에 있는 세계의지를 거울처럼 비추는 데 반해, 이러한 회화적 음악은 우리의 상상력을 피상적인 현상에 국한시킨다.
음악뿐 아니라 성격 묘사에서도 소크라테스적인 것의 출현을 엿볼 수 있다. 등장인물이 본질적으로 디오니소스의 서로 다른 가면이며 영원한 전형을 대표했던 기존의 비극과는 다르게, 에우리피데스와 그 이후의 아티카 신희극은 세세한 성격과 심리 묘사로 단 하나의 표정밖에 없는 가면들을 창조했다. 이러한 방식은 무대 위의 개개인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막는다.
줄거리에서도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소크라테스적인 것의 대립이 드러난다. 과거의 비극은 결말부에서 형이상학적 위로를 느낄 수 있었으며 이것이 곧 비극을 보았을 때의 기쁨이 되었다. 그러나 음악이 극의 부속물로 전락하면서 이러한 위로는 사라져버렸다. 이 위로를 대체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주인공의 고난 끝에 현세적 보상을 내려주는 기계장치의 신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적 명랑성은 디오니소스적 소박성을 여러 측면에서 파괴했다. 소박성은 삶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가상을 통해 극복하고 긍정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론적 인간의 명랑성은 지식과 학문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인간을 이 두 가지가 해결할 수 있는 좁은 영역에 가두어버린다.
18장
의지는 환상을 통해 의지의 피조물들이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강제한다. 인식의 기쁨, 예술미, 형이상학적 위로들은 모두 환영일 뿐이다. 문화 또한 생존의 부담과 중압을 잊기 위한 자극제이다. 근대는 최고의 인식능력으로 학문을 위해 사는 소크라테스적인 인간을 이 상으로 삼는다. 시 예술 자체도 학적인 흉내에서 발전된 것이다. 근대 세계 전체를 사로잡은 알렉산드리아적 문화가 지속되려면 노예계급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문화는 낙천주의적 인생관 때문에 노예계급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종교까지도 낙천주의적 정신의 지배 아래에 놓였기에 근대인의 문화는 파멸을 벗어날 수 없고, 근대인은 이런 재앙에 불안해한다. 보편적 재능을 가진 위대한 인물들은 학문으로 학문의 요구를 부정한다. 칸트와 쇼펜하우어는 이런 점에서 사물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했다. 이런 인식이 학문 대신에 지혜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비극적 문화”를 낳는다. 지혜란 확고하게 세계의 전체상을 응시하며, 이 속에서의 영원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파악하려 하는 것이 다. 이는 곧 낙천주의에 대한 승리다. 소크라테스적인 문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흔들리게 되었다. 첫째는 자신의 귀결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 둘째는 이전처럼 자신의 토대의 영원한 타당성을 믿지 못하게 되 었다는 것이다. 결국 근대문화는 근원적으로 불안을 안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사물의 전모를 밝혀내려는 의지가 존재하지 않고 학문 위에 세운 문화가 비논리적이 될 때엔 몰락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결국 근대인은 영원히 굶주리나 힘과 의지가 퇴화해 지식을 수집하기만 하는 알렉산드리아적 인간이다.
19장
바그너 이전의 오페라는 근대의 소크라테스 문화를 상징적이고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음송조 창시자들은 오페라를 그리스 음악의 부활로 여겼다. 호메로스의 세계를 원시세계로 간주했기에, 사람들은 무대조를 탁월한 순수성을 지닌 원시 상태라고 착각했다. 현대의 대표 예술 장르인 오페라는, 그 탄생이 목가적이고 비미학적인 욕구의 총족, 즉 인간 그 자체를 낙천주의적으로 미화하여 선량하고 예술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데 있었다. 오페라의 이러한 원리는 현대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 무시무시한 요구로 변한 것이다. 오페라는 비예술적인 소크라테스적 인간에 의해 탄생했다. 비음악적 청중은 가사가 노래보다 더 고귀하다는 인식을 가졌고, 따라서 음악과 형상 그리고 말의 결합은 속물적이고 비음악적으로 다뤄졌다. 이에 예술에 무능한 자들이 예술가가 되어,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정신은 무대에서의 지성적인 말과 소리의 형식, 그리고 성악 기법에 대한 쾌감으로 변질되었다. 이들은 예술가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예술적 원시 인간’, 즉 정열에 휩싸여 노래하는 인간상을 그린다. 오페라의 전제는 감수성을 지니는 인간이 예술가라는 목가적 믿음에 있기에 오페라는 속물 근성을 표현한다.
실러는, 자연이 상실되고 이상이 도달되지 못한 것으로 표현된다면 그것들은 모두 슬픔의 대상이며, 따라서 비가를 구현한다고 말한다. 반면 자연과 이상이 현실적인 것으로 그려진다면 그것들은 기쁨의 대상이며, 목가를 제공한다고 한다. 근대인은 원시 세계를 자연 속에서 선과 예술적 천성을 통해 이상을 실현했다고 간주했고, 이러한 목가적 현실로 복귀하기 위해서 근대인은 그리스 비극을 오페라식으로 모방했다. 따라서 오페라에는 비가적 고통은 없고, 목가적 현실에 대한 기쁨만이 있다. 이는 인간이 때로는 목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지라도 결국은 그러한 사실을 재발견한다는 명량성이다. 오페라는 알렉산드리아적 명량성의 본래적 예술형식이다. 오페라는 미학적인 영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반(半)도덕적 분야로부터 예술적 영역으로 잠입한 것이다. 예술의 본질적 목표, 즉 가상을 통해 비관(悲觀)과 무력함을 구제한다는 것은 오페라에서 기분전환의 오락으로 변질된다. 오페라의 발생과 그 속의 낙천주의는 신속하게 음악으로부터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박탈하고, 음악에 현상의 형식과 유희적 성격을 부여했다. 이는 현대 음악의 발전 과정과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옴팔레에 의해 혹사당해도 그의 힘이 영원히 소진될 수 없는 것처럼 디오니소스적 정신 또한 부활하고 있다. 바흐-베토벤-바그너로 이어지는 독일 음악은, 소크라테스 문화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오히려 소크라테스 문화에 의해 두렵고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소크라테스적인 현대 미학자들은, 자신들의 임의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으로는 음악의 정령을 절대 파악할 수 없다.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 독일 철학의 정신이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통해 학문적 소크라테스주의의 한계를 입증하고, 그것의 자기만족적인 생존욕을 파괴하여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부활시켰다. 독일 음악과 독일 철학은 비극이라는 존재방식을 가리키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그리스가 모범이 된다. 그리스에는 모든 이행과 투쟁이 고전적이고 교훈적으로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시대로부터 비극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현대 독일인은 역순으로 그리스의 중요 시기를 체험하고 있다. 따라서 독일 정신에게는 비극의 탄생이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 자신의 재발견인 것이다. 독일 정신은 야만적 형식 속에서 연명해오고, 외부 침입자들에 의해 그들 형식의 노예로 존재했다. 이제 마침내 디오니소스적 정신을 회복하여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장
괴테, 실러, 빙켈만 같은 저 투사들도 그리스 본질의 핵심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었으며, 독일 문화와 그리스 문화 사이에 지속적인 사랑의 유대를 맺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후대의 더 진지한 사람들은 저 결함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선배들의 뒤를 따라서 동일한 교양의 길을 밟을 경우에, 선배들보다 더 멀리 나가게 될 것인지 그리고 도대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의심에 사로잡혔고 의기소침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저 시대 이래로, 교양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이 갖는 가치에 대한 판단이 가장 우려할만한 방식으로 퇴락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교양인들은 이제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그리스적 정신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만 유비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현상, 즉 디오니소스적 정신의 부활과 비극의 재탄생을 도대체 얼마나 비참하게 혼란스러워하면서 바라보아야만 할 것인가? 이른바 교양이라는 것과 본래의 예술이 우리가 현재 눈앞에서 보는 것보다 더 서로 낯설어하고 혐오감을 느끼면서 대립했던 시기는 없었다. 그렇게 허약한 교양이 진정한 예술을 왜 그렇게 증오하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예술에 의해 교양 자신이 몰락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실러나 괴테와 같은 영웅들도 그리스라는 마의 산으로 통하는 마법의 문을 부수는데 성공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괴테의 아류들에게 남아 있는 희망이란, 그들의 눈앞에 이제까지의 문화가 행했던 모든 노력에 의해서 전혀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측면으로부터 부활한 비극 음악이 신비스럽게 울리는 가운데 갑자기 저 마법의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적 고대의 재생이 임박해 있다는 우리의 이 믿음을 흔들지 말기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믿음에서만 음악이라는 불의 마력에 의해서 독일 정신을 혁신하고 정화한다는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황폐하고 지쳐버린 현대 문화에서 미래에 위로가 되는 기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그러한 믿음 외에 무엇을 들 수 있겠는가? 쇼펜하우어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진리를 원했던 것이다. 그와 견줄만한 자는 없다. 그러나 내가 방금 그렇게 어둡게만 묘사했던 우리의 황량하고 지쳐 버린 문화가 디오니소스적인 마력에 접할 때, 그것은 어떻게 변하는가! 디오니소스라는 일진광풍이 불어 모든 노쇠, 부패, 파손, 위축을 휩싸고 소용돌이치면서 붉은 먼지 구름 속에 휘감아 독수리처럼 저 멀리 허공 속으로 채어가 버린다. 내 친구들이여, 나와 함께 디오니소스적 삶과 비극의 재탄생을 믿자.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과감히 비극적 인간이 되어라. 그러면 그대들은 구원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