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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프리드리히 니체 - 비극의 탄생, 2주차

2장에 대해 쓰기 앞서, 저번 글에 올라왔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 가치의 의미에 대해서 간단히 짚으려 합니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이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 가치이기 때문에 서문과 1장, 2장의 내용으로 이를 완전히 알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의미들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많은 분들이 디오니소스적 가치와 아폴론적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듯 합니다. 하지만 2장에서 드러나는 내용으로 보아, 디오니소스적 가치와 아폴론적 가치는 절대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물론 철학자들도 니체가 이분법적 사고를 한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하지만, 온전히 니체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이 두 가치는 유기적으로 연관됩니다. <비극의 탄생>의 뒷부분에서 드러나겠지만,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가치에 대립되는 가치를 아폴론적 가치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적 가치라고 명시합니다.


2장 

 우리는 지금까지 아폴론적인 것과 그것의 대립자인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인간 예술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자연 자체로부터 용솟음치는 예술적인 힘들로서 고찰했다. 이러한 힘들 속에서 자연의 예술충동들은 맨 처음 그리고 직접적으로 충족된다. 즉 자연의 예술충동들은 한 번은 꿈의 형상세계에서 충족되며, 이러한 꿈의 세계가 갖는 완전성은 개개인의 지적 수준이나 예술적 교양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 1장에서 니체는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를 인간에 적용하기보다는 자연 자체에 적용합니다. 여기서 니체는 2장이 앞으로 이 두 가치이 인간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탐구합니다.


 자연의 예술충동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도취에 가득 찬 현실에서 충족되는데, 이러한 현실도 또한 개개인을 중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개인을 심지어 말살하면서 신비적인 일체감을 통해서 구원하려고까지 한다. 자연의 이러한 직접적인 예술상태들에 대해서 모든 예술가들은 '모방가'이다. 예술가들은 실로 아폴론적인 꿈의 예술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예술가, 마지막으로 - 그리스 비극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 도취와 꿈을 겸비한 예술가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세 번째 예술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만 한다.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와 신비적인 자기포기 속에서 열광하는 합창단으로부터 고독하게 떨어져 나와서 쓰러진다. 그리고 이제 아폴론적인 꿈의 작용에 의해서 그의 고유한 상태, 즉 세계의 가장 내적인 근거와의 통일이 비유적인 꿈의 형상 속에서 개시된다.


- 니체에게 예술은 삶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아폴론적 가치에서 인간은 예술가입니다. 왜냐하면 개별화의 원리를 통해, 각자 스스로 삶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원적 일자, 즉 디오니소스적 가치와 아폴론적 가치가 합쳐진 존재에겐 인간도 단지 예술작품에 불과합니다. 이는 근원적 일자는 이 세계 자체를 의미하는데 세계 내부엔 인간도 한 요소로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근원적 일자에겐 자신만에 예술가이며, 현실 자체가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쓰러진다>라는 표현은 번역의 오류로, 하강의 이미지보다는 합창단에서 무대로 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세 번째 예술가를 생각해본다면, 그는 세계의 가장 내적인 근거와의 통일(= 자기포기와 도취의 합창단,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독하게 떨어져 나와야(= 개별화의 원리, 비유적인 꿈의 형상, 아폴론적인 것)합니다. 그리고 니체는 이 세 번째 예술가의 유형을, 그리스 비극, 최고의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과 디오니소스적 야만인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를 발견하려고 할 경우에는 우리는 단순히 추측에만 의지할 필요는 없다. (중략) 우리는 디오니소스적 축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중략) 거의 모든 곳에서 이 축제들의 중심은 성적인 방종이었고, 이러한 방종의 물결은 모든 가족 제도와 그것의 신성한 법규를 휩쓸고 지나갔다. 다름 아닌 자연의 가장 난폭한 야수들이 이 축제를 기화로 풀려나와 음욕과 잔인함의 저 혐오스런 혼합이 이루어졌다. 이 혼합물은 나에게는 항상 '마녀의 술'로 여겨졌다.


-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과 디오니소스적 야만인의 차이는, 이 바로 다음 절에 서술됩니다. 여기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야만인의 속성을 말합니다. 니체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카이엔족을 디오니소스적 야만인의 예시로 드는데, 이들은 디오니소스제 마다 권위, 제도, 문명의 타파를 실행합니다. 대표적인 이들의 디오니소스제에서의 행동은 집단 난교라고 합니다. 이렇듯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인간에게 발현할때, 야만적인 습성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습성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인간 종류가 디오니소스적 야만인이고, 이에 반해 디오니소스적 그리스인은 이러한 야만적인 습성은 사라지고,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긍정적인 방향만이 남는 인간 종류입니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세계에 대단한 긍지를 갖고 우뚝 서 있는 아폴론의 모습에 의해 그 축제들의 열광적인 흥분에 대해서 한동안은 자신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방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기괴하게 생긴 무적의 디오니소스적인 힘 이상으로 위험한 힘은 없었으므로 아폴론은 메두사의 머리를 방패로 삼아 그것에 대항할 수 있었다. 이 아폴론의 태도를 영원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 도리스 예술이다. 그러나 그리스적인 것의 가장 깊은 뿌리로부터 마침내 유사한 충동들이 분출되었을 때 이러한 저항은 미심쩍게 되어 버렸고 급기야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 디오니소스적 야만인의 속성은 그 당시 무역과 문화 전파를 통하여 그리스에도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아폴론적인 가치를 통해서 이를 처음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파괴적인 속성 때문에 그리스에서도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발현하기 시작합니다.(이 문장은 그리스인들의 추정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나오듯, 이 추정은 틀린 것으로 판명됩니다.)


 이제 델포이의 신이 할 일은 적당한 시기에 화해를 함으로써 그 괴력의 상대방으로부터 파괴적인 무기만을 빼앗아버리는 것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이 화해의 순간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의 신들에 대한 숭배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순간이다. (중략) 근본적으로 둘 사이의 간격은 메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평화협정의 압력 아래서 디오니소스적인 힘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드러냈는지를 본다면, 이제 우리는 인간이 범이나 원숭이로 퇴화하게 되는 바빌론의 사카이엔의 축제에 대해서 그리스인의 디오니소스적 광란은 세계구원의 축제와 성화의 축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광란에서 비로소 자연은 예술적 환희에 도달하며, 그것에서 비로소 개별화의 원리의 파기가 예술적 현상이 된다. 음욕과 잔인성으로 이루어진 저 혐오스런 마녀의 술은 여기서는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 그리스에서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는 화해를 합니다. 따라서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는 합쳐지며, 사카이엔 족의 야만스런 축제도 그리스적 축제로 변합니다. 이 과정에서 야만스러운 속성은 사라지고, 긍정적인 방향만이 남습니다. 아폴론적인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순화하고 음욕과 잔인성을 사라지게 합니다.


 이러한 혼합과 이중성이란 마치 약이 치명적인 독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고통이 쾌락을 불러일으키고 환희가 가슴으로부터 고통에 가득 찬 소리를 자아내는 현상을 말한다. 최고의 기쁨으로부터 경악의 외침이 혹은 보상받은 길 없는 상실을 애달파하는 탄식의 소리가 울려 나온다.


- 혼합과 이중성이 이전에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존재했음을 알려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합과 이중성이라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긍정적인 면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야만적인 면을 상기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오니소스 찬가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상징능력들을 최고조로 고양시키도록 자극을 받는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것, 즉 마야의 베일이 파기되고 종족의, 아니 자연의 영혼으로서의 만물 융합의 상태(Einssein)가 표현되고자 육박해 오는 것이다. 이제 자연의 본질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중략) 모든 상징력의 이러한 전면적인 해방을 이해하려면 사람들은 미리 자기포기라는 저 단계에 이르러 있어야만 한다. 이는 모든 상징능력 속에서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자기포기이기 때문이다. (중략) 아폴론적 그리스인은 얼마나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던가! 이 놀라움은 저 모든 것이 원래는 자신에게 낯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아폴론적인 의식이 하나의 베일처럼 이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은폐하고 있을 뿐이라는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스며들 때 더욱 커졌다.


- 다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속성이 드러납니다. 개별화의 원리를 파기하고 자연 합일, 자기 포기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발현이라고 다시 설명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사람은 자기포기의 상태에 이르러야만 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책으로만 디오니소스적인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따라서 오만한 시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아까 왜 그리스인들의 추정이 틀렸는지가 제시됩니다. 디오니소스적인 가치가 외부로부터 아폴론적인 가치를 파괴한다는 그리스인들의 추정과 달리, 디오니소스적인 가치는 원래부터 그들 내부에 존재했습니다. 이들이 단지 아폴론적, 마야의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것일 뿐, 디오니소스적 가치는 내부로부터 파괴적인 속성을 보였던 것입니다.


2장만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내용이 많네요. 강독반에서 발제자께서 제시해 준 그림이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관계를 드러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올려드립니다. 물론 이것이 정확할지는 모르기 때문에 각자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에셔, <천사와 악마의 이중노출> 1960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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