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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프리드리히 니체 - 비극의 탄생, 3주차

비극의 탄생 강독반 3주차, 3장입니다.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철학적 가설입니다. 이를 철학적 정립된 이론으로, 또한 니체의 정립된 이론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것 같습니다. 앞으로 읽으실때 조금 가볍게 가설에 대한 검증을 하는 생각으로 읽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3장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폴론적 문화의 저 정교한 건축물을, 말하자면 돌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해체함으로써 그것이 세워져 있는 토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경우 가장 먼저 우리 눈에 띄는 것은 이 건축물의 합각머리 위에 서 있는 올림포스 신들의 장려한 모습이다. (중략) 그처럼 찬란한 올림포스 신들의 사회가 비롯된 저 거대한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 3장은 그동안 사회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차지하고 있던 아폴론적 가치에 대해 탐구하고, 아폴론적 가치가 왜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합니다.


 다른 종교를 신봉하면서 이 올림포스 신들에게 다가가 이들에게서 윤리적인 고상함, 즉 성스러움, 비육체적인 정신화, 자비롭기 그지없는 사랑의 눈길을 찾는 자는 불쾌감과 환멸을 느끼면서 그들에게서 바로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금욕, 정신성, 그리고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서는 오직 거만하며 아니 승리감에 차 의기양양하기까지 한 존재만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을 뿐이며, 이 존재 속에서 모든 것은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에 상관없이 신격화 되어 있다. (중략) 미다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동반자인 현자 실레노스를 오랫동안 숲 속에서 붙잡지는 못한 채로 쫓아다녔다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왕이 마침내 그를 수중에 넣었을 때 왕은 인간에게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 보았다. 이 마신(Demon)은 꼼짝도 하지 않고 굳어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이 강요하자 마침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하루살이 같은 가련한 족속이여, 우연과 고난의 자식들이여, 그대는 왜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나에게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는 것이다."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는 이 민족적 지혜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그것은 고문을 받는 순교자의 황홀한 환상이 그의 고통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같다.


- 그리스 신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욕망에 충실하였고, 어떠한 점에선 인간보다 더 더러웠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신들의 이 생에 충실한 속성은 왜 자리한 것일까요? 기독교적 가치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종교에선 그리스 신들의 속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니체는 실레노스의 일화에서 찾습니다. 일화에서 드러나듯 생은 고통의 연속이며, 생을 이어나가는 것은 차라리 살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실레노스의 일화는 그 자체로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드러냅니다. 개별화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한마디로 개개인의 삶의 가치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거대한 자연,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사는 것일까요? 여기서 아폴론적인 가치가 나타납니다. 그리스인들은 존재의 공포와 끔찍함, 즉 자신에게 내재한 디오니소스적인 가치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폴론적 가치를 가져와 삶을 긍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문을 받으며 고통에 잠긴 순교자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황홀한 환상을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 모두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지 않고 굳이 아폴론적인 가치에 기댔는지에 대한 의문은 좀 남습니다.


즉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리스인은 그러한 공포와 끔찍함에 대해서 올림포스라는 찬란한 꿈의 산물을 내세워야만 했다. 자연의 거인적인 힘에 대한 저 엄청난 불신, 모든 인식 위에 무자비하게 군림하는 저 운명의 여신 모이라, 인간의 위대한 벗인 프로메테우스의 저 독수리, 현명한 오이디푸스가 맞은 저 무서운 운명, (중략) 숲의 신(실레노스)이 설파한 저 철학 전체와 그들의 신화 속의 여러 사례는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올림포스 신들이라는 저 예술적인 중간세계를 통해서 끊임없이 극복되었으며, 아무튼 은폐되었고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중략) 원래의 끔찍하기 짝이 없는 거인적인 신들의 질서로부터 저 아폴론적인 아름다움의 충동을 통해서 서서히 올림포스라는 환희에 찬 신들의 질서가 나타나게 되었다.


- 존재의 공포와 끔찍함을 알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꿈의 산물을 내세웁니다. 꿈의 현실분리적인 속성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는 합일하는 속성을 가진 도취와는 정반대됩니다. 인간은 실레노스의 지혜를 직접 대면할 수 없습니다. 대면하는 순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접적으로 닿게 해주는 매개체가 아폴론적 지혜이며, 꿈, 중간세계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절도와 균형을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인에게 삶이 보다 높은 영광에 휩싸여서 그의 신들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처럼 감수성이 예민하고 그처럼 욕망이 강렬하며 고뇌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저 민족이 어떻게 삶을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계속 살아가도록 유혹하는 삶의 보완이자 완성으로서의 예술을 낳은 동일한 충동이 올림포스 세계도 탄생시켰다. (중략) 이렇게 신들은 스스로 인간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변신론이 아닌가! (중략) 따라서 이제 우리는 실레노스의 지혜를 거꾸로 해서 그리스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가장 나쁜 일은 머지않아 죽는다는 것이며, 다음에 나쁜 일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 그리스인은 직접적으로 실레노스의 지혜를 대면할 수는 없지만, 인간 유형중 가장 삶의 허무함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그리스 신들은 서양의 기독교의 신의 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형태를 가짐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목적, 삶의 가치와 의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폴론적 가치가 실레노스의 지혜, 디오니소스적 가치 위에 세워지게 되어, 실레노스의 지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바뀝니다. 삶의 가치에 대한 긍정이 나옵니다. 삶과 인간은 일체가 되기에 죽음에 대한 비탄마저 삶에 대한 찬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해두어야만 할 것이 있다. 근대인이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조화, 즉 인간과 자연의 통일을 실러는 '소박함'이라는 예술용어로 지칭했지만, 그러한 조화는 인류의 낙원으로서 모든 문화의 입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극히 단순하고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는 불가피한 상태가 결코 아니다. 이렇게 믿을 수 있었던 시대는 루소의 에밀마저도 예술가로 간주하려고 했고 호메로스야 말로 자연의 품에서 길러진 에밀식의 예술가라고 망상했던 시대뿐이었다. 예술에서 '소박한 것'을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이 아폴론적 문화에서 비롯되는 최고의 효과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 갑자기 실러와 루소, 소박함이 나옵니다. 여기서 니체는 소박함의 의미를 실러가 설정한 의미와 정반대로 설정합니다. 실러는 괴테와 쌍벽을 이루던 문학가로, 여기서 실러의 소박함은 자연과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실러는 자연과의 합일을 위해 놀이와 유희를 강조하였으며, 특히 아름다움을 동반한 놀이와 유희에 대해서 긍정하였습니다. 실러의 시를 예로 들자면, "시인은 자연으로 존재하거나, 자연을 추구한다."를 통해서 실러가 추구한 소박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볼 수 있듯이 아주 불친절하게, 어떠한 서술도 없이 실러의 소박함을 정반대로 사용합니다. 자연과의 합일에 반대되는 개별화의 원리인 아폴론적 가치의 최고의 효과를 소박함이라고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아폴론적 문화는 항상 먼저 거인왕국을 전복하고 괴물들을 죽여야만 하며 강력한 환영들과 즐거운 환상들을 통해서 세계관의 무서운 깊이와 고뇌에 대한 가장 큰 감수성에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소박함, 즉 가상의 아름다움 속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얼마나 드문 일인가! (중략) 이러한 아폴론적 환상이란 자연이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는 환상과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자언의 진정한 목표는 환상에 의해서 은폐된다. 우리는 이 환상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고, 자연은 우리를 착각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목표에 도달한다. 그리스인들 속에서 '의지'는 예술가(천재)와 예술세계를 통해 일상적인 현실세계를 찬란하게 변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직관하려고 했다.


- 여전히 의미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중략 이후 아폴론적 환상은 사실 자연의 환상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의지'는 근원적 일자, 디오니소스적 가치, 후에 나오는 힘에의 의지로까지 연결됩니다. 이 '의지'는 아폴론적인 환상을 만들어 자기 자신을 직관합니다. 즉, 이전 리뷰에도 나왔듯, 디오니소스적인 열광과 자기포기 속에서 고독하게 떨어져나오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자연이 스스로를 직관, 표현하기 위해선 개별화의 원리, 아폴론적인 가치가 필요합니다. 인간도 어김없이 자연, '의지'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의지'의 피조물들이 스스로를 찬양하기 위해서는, 관조된 완벽한 세계가 명령이나 비난으로 작용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들을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껴야만 했고 더 높은 영역에서 서로 재회해야만 했다. 이러한 영역은 그리스인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 즉 올림포스의 신들을 보았던 아름다움의 영역이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비친 이 상을 가지고 그리스의 '의지'는 예술적 재능과 상관관계에 있는 고뇌에 대한 재능과 고뇌의 지혜에 이르는 재능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이 승리의 기념비로서 호메로스, 즉 소박한 예술가가 우리 앞에 서 있다.


- '의지'의 피조물, 즉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선 인간 자체에 대한 가치를 지녀야 하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끌어올려야 했습니다. 이 결과물이 올림포스의 신들입니다. 그리스 신들은 인간의 긍정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 모든것이 아름답게 비친 상이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 신들의 상을 가지고 그리스의 '의지'는 삶의 고통을 극복합니다. 여기서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주체가 왜 '의지'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폴론적 환상과 가치의 근저에는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있고 따라서 '의지'는 아폴론적인 가치를 결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삶의 고통을 포괄하고 극복하는 것도 '의지'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극의 탄생에 대해서 강독을 시작하고 있는데, 정작 비극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비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증이 들어, 과연 지금 가지고 있는 비극의 정의가 여기서도 통용되는지 여쭤본 결과, 비극은 단지 통념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리스 언어엔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 언어의 비극, tragedy는 그리스 어원에서 염소와 노래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디오니소스 축제때 불러졌던 주신찬가와 동일합니다. 디오니소스 추종자들이 염소의 탈을 쓰고 주신찬가를 불렀던 것이 tragedy로 발전한 것입니다. 니체가 정말 불편하게 글을 써서 의미에 대한 혼동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같이 탐구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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