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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프리드리히 니체 - 비극의 탄생, 4주차

4장


 이 소박한 예술가에 대해서는 꿈의 비유가 우리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준다. 꿈의 세계가 만들어 내는 환영에 몰입하여 그것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이것은 꿈이다! 이 꿈을 계속해서 꾸어보자!"라고 부르짖는 꿈꾸는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 4장은 3장의 마지막에 나왔던 소박한 예술가에 대해 탐구해봅니다.


우리는 이 모든 현상들을 해몽의 신인 아폴론의 인도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우리들의 삶 전체는 깨어 있는 상태가 절반을, 그리고 꿈꾸는 상태가 절반을 차지한다. 이 둘 중에서 우리는 깨어 있는 상태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시하며 그것을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고 더 살 보람이 있는 것으로, 아니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무리 역설적으로 들릴지라도, 저 비밀스런 근거, 즉 우리 인간이 그것의 현상인 저 비밀스런 근거에 주목하면서 꿈의 가치를 정반대로 평가하고 싶다.


- 우리가 살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꿈꾸는 상태는 수량적으로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꿈꾸지 않는 상태가 꿈꾸는 상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니체는 기존의 통념에 반대하여, 꿈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탐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꿈의 가치를 재탐구해야 할까요? 제 사견이지만 니체는 꿈을 꾸며 현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생을 버티게 해주는 동기가 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가설이란) 진정으로 존재하는 근원적 일자는 영원히 고뇌하며 모순에 가득 찬 존재이면서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위해서 매혹적인 환상이나 즐거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상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으로 성립되는바, 이러한 가상을 우리는 진정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즉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으로서, 달리 말해 경험적인 실재로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근원적 일자는 이전에 보았듯 자신의 존재에 대해 모순적입니다. 그리스인에 의하면 인생은 도피해야 할 덧없음인데, 생명체는 살아야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원적 일자, 즉 생에 대한 의지를 덧없음보다 우위에 놓기 위해 환상과 가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환상과 가상은 경험적인 실재의 형태로 생겨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에 인간이 항상 구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재'를 잠시 도외시하고 우리 자신의 경험적 존재를 근원적 일자가 매 순간 만들어 내는 표상으로 파악하게 된다면, 이제 우리는 꿈을 가상의 가상으로서, 가상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으로서 간주해야만 한다. 이와 동일한 이유에서 자연의 가장 깊은 핵심은 (중략) 가상의 가상일 뿐인 소박한 예술작품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움을 느낀다.


- 근원적 일자가 인간을 표상화하기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낸 꿈은 가상의 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보통 가상화는 현실보다 더 매혹적인 방향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고차원적입니다. 따라서 자연은 가상의 가상, 즉 인간의 꿈, 그 꿈이 발현된 예술작품에 대해 가장 고차원적인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라파엘로는 우리에게 다음의 비유적 그림에서 가상이 한 번 더 가상으로 승화되는 과정, (중략)을 묘사했다. 그의 작품 <그리스도의 찬란한 변용>의 하반부는 (중략) 영원한 근원적 고통, 즉 세계의 유일한 근거를 반영하고 있다. '가상'은 여기에서는 사물의 아버지인 영원한 모순의 반영이다. 이 가상으로부터 이제 환상같은 새로운 가상세계가 감미로운 향기처럼 피어 오른다. 첫 번째 가상에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세계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이 새로운 세계는 가장 순수한 환희와 크게 뜬 눈으로부터 방사되는 고통 없는 관조 속에서 빛을 발하면서 떠다닌다. 여기서 우리는 최고의 예술상징 속에서 저 아폴론적 아름다움의 세계와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실레노스의 가공할 지혜를 눈앞에 보게 되며 양자의 필연적인 상호관계를 직관을 통해서 파악하게 된다.


  

- 좀 억지스러운 니체식 해석이라고 생각은 듭니다. 첫 번째 환상은 그림 아래에 위치한 사도들과 미친 소년, 그의 부모의 고통입니다. 생의 근원적 고통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첫 번째 가상, 인간은 항상 생에 대한 덧없음을 한편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림 윗부분의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가상의 가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이 가상의 가상을 통해서 생에 대한 의지와 그 의지의 표상화, 예술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관계를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개별화의 신격화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명령하고 규준을 부여하는 성격을 갖는 것으로 간주될 경우 그것은 오직 다음과 같은 하나의 법칙만을 인정할 따름이다. 개체, 즉 개체의 한계의 준수, 그리스적 의미의 절도가 바로 그것이다. 윤리적 신으로서 아폴론은 자신의 신도들에게 절도와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자기인식을 요구한다. (중략) '너 자신을 알라'와 '도를 넘지 말라'는 요구가 생겨난다. 이에 반해 자만심과 과도함은 비아폴론적(디오니소스적) 영역에 속하는 본래 적대적인 악령들, 즉 아폴론 이전 시대인 거인 시대의 속성들이자 야만세계의 속성으로 간주되었다.


- 현실에서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관계를 서술합니다. 이 두 가치가 배타성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전에 니체가 말했듯 인간 내부엔 아폴론적 가치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가치도 내재합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 절도 뿐만 아니라 고뇌와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치는 존재를 위해 필연적으로 반대의 가치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의 역사는 저 적대적인 두 원리의 투쟁 속에서 네 개의 커다란 예술적 단계로 구분되지만, 우리가 위에서 말한 마지막 단계, 즉 도리스 예술의 단계를 저 예술충동들의 정점이자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계속해서 이러한 생성과 활동의 최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두 예술충동의 공통의 목표로서 아티카 비극과 극 형식의 주신찬가의 높이 기려지고 숭고한 예술작품이 우리들의 시야에 등장하게 된다. 두 충동의 신비로운 결혼은 이러한 자식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영광으로 장식되었다. 그러한 자식은 안티고네이면서 동시에 카산드라이기도 하다.


- 니체는 그리스 예술의 전개과정을 5단계로 나눕니다. 1단계는 호메로스 이전의 거인시대, 2단계는 아폴론적 정신의 호메로스 시대, 3단계는 디오니소스적 정신의 디오니소스 시대, 4단계는 아폴론적 정신의 도리스 예술 시대, 5단계는 아티카 비극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아티카 비극의 시대는 아폴론적 정신과 디오니소스적 정신 모두가 합쳐진 예술의 정점입니다. 그리고 아티카 비극 예술의 발현이 주신찬가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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