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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프리드리히 니체 - 비극의 탄생, 5주차

5장


 우리 연구는 디오니소스적-아폴론적 정신과 그것의 예술작품을 인식하고 저 통일성의 신비를 적어도 어렴풋하게라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나중에 비극과 극 형식의 주신찬가로 발전하는 저 새로운 맹아는 그리스 세계의 어디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가? 이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 자신이 우리들에게 형상을 통해서 설명을 해 주고 있다. 즉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문학의 시조이자 봉화 전달자로서 호메로스와 아르킬로코스를 조각품과 보석 등에 나란히 새겨넣었던바, 이는 그들이 후대의 그리스 세계 전체에 흘러들어가는 불의 강의 원천인 이 두 사람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진정으로 독창적인 인물로서 간주해야만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5장의 목표는 비극의 기원을 시대적으로 탐색해봅니다. 그리스 세계에서 발생한 비극의 기원을 니체는 호메로스와 아르킬로코스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내면에 침잠하는 백발의 몽상가이자 아폴론적 소박 예술가의 전형인 호메로스는 이제 난폭하게 인생 속을 떠돌아다니는 뮤즈의 전투적인 시종인 아르킬로코스의 정열적인 정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근대 미학은 아르킬로코스와 함께 '객관적' 예술가에 대립해서 최초의 '주관적' 예술가가 등장했다는 해석을 덧붙일 줄밖에 몰랐다. (중략) 이러한 해석은 쓸모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주관적 예술가를 열등한 예술가로 생각하고 있으며, 사심 없는 순수한 관조 없이는 최소한도의 진정한 예술적 창조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니체는 예술이란 예술가의 주관적 표현 대신 객관적인 자연,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객관적 예술가를 주관적 예술가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에 따르면 근대 미학이 호메로스와 아르킬로코스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것은 이 위계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객관적, 주관적에 대한 뚜렷한 구분이 없어서 명확한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주관적이라고 불렸던 최초의 예술가인 아르킬로코스는 따라서 본래 비예술가가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면 '객관적' 예술의 발원지인 델포이 신탁마저도 시인 아르킬로코스에게 극히 주목할 만한 말로 경의를 표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실러는 자신의 시작(詩作)과정을 우리들에게 밝혀주었다. 그는 자신이 시작활동에 앞서서 준비상태로 자신안에 지니고 있던 것은 사고의 질서 정연한 인과율이 아니라 어떤 음악적인 기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 서정시인인 아르킬로코스는 니체에 의하면 주관적 예술가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객관적 예술가까지도 아르킬로코스를 찬양한 기록을 보았을때, 니체는 이러한 주관적 예술가, 서정시인이 어떻게 이러한 위치에 서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고 앞으로 이에 대해 탐구하려 합니다. 여기에 대한 실마리로 실러의 말을 드는데, 실러에 따르면 작품활동의 처음은 객관적 인과율 대신, 주관적인, 서정시인적인 개체성에 기반한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고대 서정시인과 음악가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고찰할 수 있습니다.


 서정시인은 우선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로서 근원적 일자와 근원적 일자의 고통 및 모순과 완전히 일체가 된 것이며 이 근원적 일자의 모상을 음악으로 만들어 낸다. 이 점에서 음악이 세계의 반복이라고 불린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제 음악은 서정시인에게 마치 '비유적인 꿈의 영상'처럼 아폴론적인 꿈의 작용에 의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된다. (중략) 예술가는 이미 자신의 주관성을 디오니소스적 과정에서 포기해 버렸다. 그에게 이제 자기가 세계의 심장과 일체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형상은 저 근원적 모순과 근원적 고통을 가상의 근원적 쾌감과 함께 형상화하는 꿈의 장면이다. 따라서 서정시인의 '자아'는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것이다. 


- 이 부분이 서정시에 대해서 핵심적인 주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정시인은 타인이 바라보기에 주관적 예술가이지만, 사실 그는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가지고 있어 세계, 자연과 하나가 된 객관적 예술가입니다. 서정시인이 주관적 예술가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주관성을 버리고, 세계 및 자연을 자신 안에서 개체화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원적 모순과 고통은 개체화, 가상에서 형상화됩니다.  결국 서정시인의 '자아'는 자신의 예술에선 따로 존재하지 않고 자연의 의지만이 예술작품에서 드러납니다.


 조각가 및 그와 친척관계에 있는 서사시인은 형상들에 대한 순수한 관조 속으로 침잠한다, 디오니소스적 음악가는 어떠한 형상도 갖지 않는다. (중략) 서정적 영혼은 신비한 자기포기 상태와 합일상태로부터 하나의 형상세계, 하나의 비유적 세계가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이 세계는 조각가와 서사시인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색채와 인과성과 속도를 가지고 있다. (중략) 이에 반해 서정시인의 형상들은 바로 그 자신이며 자신의 다양한 객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는 저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으로서 '나'라고 말해도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나는 깨어 있을때의 경험적-현실적인 인간이 아니라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 그리고 사물의 근저에 자리 잡은 영원한 자아이다. 


- 서사시인과 서정시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니체가 서사시인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서정시인을 서술하는 부분만 넣었는데, 여기서 그는 서정시인이 자기포기, 자연과 합일을 통해서 서정시인만의 특성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서정시인 자신은 형상에 불과하며, 그 형상을 만드는 주체는 '나'와 자연, 세계가 합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의 중심은 '나'와 일치하며, '나'는 경험적 속성 대신 관념적, 형이상학적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주체가 예술가인 한 그는 이미 자신의 개인적 의지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진실로 존재하는 주체(세계영혼)가 가상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을 자축하는 것을 돕는 매체가 된다, 예술이라는 희극 전체는 우리를 위해서, 즉 우리들의 향상이나 교양을 위해서 상연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우리가 저 예술세계의 진정한 창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굴욕이 되면서도 우리를 우쭐하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세계의 진정한 창조자에게는 이미 형상이고 예술적인 투영이며 예술작품이 갖는 의의속에서 우리의 최고의 품위를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 서정시인이 세계와 합일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은 자체로서 예술가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은 형상일 뿐, 그 형상을 만드는 주체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예술세계의 진정한 창조자가 아니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하지만 개인이 자연과 합일하는 가능성을 보았을 때,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사티로스의 지혜, 즉 인생의 고통과 무상함에 직면하여 인간은 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한 고뇌로부터 삶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방법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 중 니체는 어떤 방법은 인간을 허약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허약하게 만드는 삶의 정당화 방법의 예시로 기독교와 공리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이상적인 사회를 주장하는 이론들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이들의 공통점은 천국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만인의 평등과 자유 등 현재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이상으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들에서 현실은 이상적인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과도기적 상태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현실과 과거는 미래에 비해 열등한 위계를 가지게 되어, 항상 수단적인 가치만을 가지게 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이에 반대하여 그는 이 지상에서의 삶을 그대로 긍정하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지상의 삶을 아폴론적으로 변용하거나, 지상의 삶을 근원적인 세계의지의 발현으로 봄으로 정당화됩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탐욕과 이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세계를 미학적으로 정당화 하는 것이 인간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니체는 주장합니다.


6장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 나가고 항상 새롭게 탄생되면서 점증해 가는 민요의 거대한 전파력은 자연이 갖는 저 이중의 예술적 충동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한 민족의 광란비제적(orgiastisch)인 운동이 그 민족의 음악 속에 영원히 흔적을 남기는 것과 유사하게 자연의 이중의 예술적 충동은 자신의 흔적을 민요에 남긴다. (중략) 우리는 언제나 디오니소스적 조류를 민요의 기초이자 전제로서 고찰해야만 한다. 민요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음악적인 세계거울이며 근원적인 선율로서 간주된다. 이러한 근원적인 선율은 자신과 상응하는 꿈의 현상을 찾아서 그것을 가사속에서 표현한다. 따라서 선율이 최초의 것이자 보편적인 것이다.


서정시인에 이어서 6장은 민요에 대해 고찰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위적인 작곡법 대신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는 음악이 민요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민요는 자연과 인간의 합일하여 발생하는 형상입니다. 따라서 민요가 가지는 선율은 근원적이고 최초의, 보편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민요의 가사에서 음악을 모방하려고 극도로 긴장하고 있는 언어를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호메로스의 시세계와 가장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새로운 시세계가 아르킬로코스와 함께 시작된다. (중략) 언어, 형상, 개념은 음악과 유사한 표현을 추구하며 이제 음악의 위력이 그것들에 스며들게 된다. (중략) 설령 작곡가 자신이 어떤 교향곡을 전원이라고 부르고 어떤 악장을 '시냇가의 풍경', 다른 악장을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이라고 이름붙이더라도 그것들 역시 음악에서 태어난 비유적인 표상들에 지나지 않으며, 이 표상들은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못하여 음악이 모방하는 대상들은 전혀 아니다. 이 표상들은 다른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독자적인 가치도 갖지 못한다.


- 음악에서 언어는 표상에 불과하고 독자적인 가치를 갖지 못합니다. 선율만이 음악에서 중심적인 가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율에 예술가가 어떠한 언어를 부여하는 것도 단지 예술에 부차적인 행동밖에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정시를 형상과 개념을 통해서 음악을 모방하는 불꽃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형상과 개념의 거울에 어떠한 것으로서 나타나는가?"라고. 음악은 의지로서 나타난다. 즉 그것은 미학적이고 순수하게 관조적이며 욕구 없는 기분과는 반대의 것을 의미한다. (중략) 음악은 그것의 본질상 의지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음악이 의지라면 그것은 예술의 영역에서 완전히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의지는 그 자체로는 비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은 의지로서 현상한다. 


- 언어가 음악과 비교하였을때 독자적이지 못하다면, 언어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서정시는 음악과 어떠한 관계인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는 음악이 의지로서 현상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음악은 주관적인 형태로만 현상합니다. 


 그러나 서정시인이 음악을 형상속에서 해석하는 한, 그가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관조하는 모든 것이 그의 주위에서 아무리 거칠게 요동치고 있을지라도 그는 아폴론적인 관조라는 고요한 바다에서 편히 쉬고 있다. 물론 그가 자기 자신을 음악이라는 동일한 매체를 통해서 바라본다면, 그에게는 그 자신의 형상이 불만스런 감정상태 속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자기 자신의 욕구, 동경, 신음, 환호는 서정시인에게는 음악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는 하나의 비유인 것이다. 아폴론적 천재로서 서정시인은 음악을 의지의 형상을 통해 해석한다. 이상의 논의 전체가 주장하는 바는 (중략) 서정시는 음악정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의 세계 상징법은 바로 그 때문에 언어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이는 음악은 근원적 일자의 심장부에 존재하는 근원적 모순, 근원적 고통에 상징적으로 관계하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현상들 위에 있고 모든 현상들 앞에 있는 어떤 영역을 상징하고 있기 떄문이다. (중략) 아무리 유창한 서정적 표현을 통해서도 우리는 음악의 가장 깊은 의미에는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 여기서 니체는 이전의 서정시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 답합니다. 언어(서정시)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모든 것(음악)을 표현할 수 없으며, 여기에는 위계질서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서정시인이 디오니소스적 차원을 표현할때엔 아폴론적 차원, 즉 언어를 통해야만 합니다. 디오니소스적 개념이 아무리 거칠어도 언어를 통하기에 서정시인은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정시인의 특성은 음악을 해석할 때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니체는 언어가 현상의 도구라고 인식했기 떄문에 도구일뿐인 언어가 음악을 모방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촉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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