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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프리드리히 니체 - 비극의 탄생, 6주차

7장


그리스 비극의 기원이란 문제를 우리는 미로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미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예술원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중략) 그리스 비극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기는 커녕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지하게 제기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불합리한 주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 7장은 니체가 그동안의 비극의 기원을 고찰한 이론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탐구합니다.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니체는 기존의 이론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며, 이 두 이론을 비판함과 동시에 새로운 이론을 정립합니다.


비극 합창단이 민중을 대표한다는 위의 해석은 마치 민중의 합창단 속에 민주주의적 아테네 시민들의 불변적인 도덕법칙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 민중의 합창단이 왕족의 격정적인 탈선과 방종을 넘어서 항상 정당성을 갖는 것처럼, 많은 정치가들에게는 숭고하게 들리는 견해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한마디에 의해 아무리 강력하게 시사된 해석일지라도 비극이 나타나게 된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민중과 왕족의 대립이라든가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사회적 영역은 저 순수하게 종교적인 기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고대의 국가제도가 입헌적 민주 대표제도라는 것을 실제로 알지 못했으며, 내가 바라는 일이지만 그것을 비극 속에서 절대로 '감지'도 못했을 것이다.


- 먼저 니체가 비판한 첫 번째 이론은 비극이 정치적 맥락에서 탄생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비극 합창단은 민중을 대표하는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아테네와 여타 그리스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학파가 주장한 이론으로, 그 권위에 의해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니체는 주장합니다. 니체는 비극은 순수하게 미적으로 발생하였으며, 정치적, 사회적 견해와는 상관없는 기원을 가졌다고 말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비판합니다. - 잠시 딴 소리를 하자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원에 대해서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서 그는 비극의 기원을 탐구한 후, 서사시의 기원을 후에 탐구하겠다고 말미에 적어놓았습니다. 하지만 후에 서사시의 기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아이디어를 받아 쓰여진 소설이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입니다. 


합창단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설명보다도 훨씬 유명한 것은 슐레겔의 사상이다. 그는 우리에게 합창단을, 말하자면 관중들의 정화이며 진수, 즉 '이상적 관객'으로 볼 것을 권한다. 비극은 근원적으로는 단지 합창단이었을 뿐이라는 고대의 역사적 전승 속에 나타나는 견해와 비교해 보면 슐레겔의 견해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중략) 그런데 이러한 인기는 그 표현의 압축적 형식에 의해서, '이상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에 대한 저 진정으로 게르만적인 선입견과 우리들의 순간적인 경이에 의해서 얻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즉 우리는 항상 진정한 관객은 그가 누구이든 간에 자신 앞에 놓은 것이 경험적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임을 늘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반면에 그리스인의 비극 합창단은 무대 위의 인물들을 살아 있는 실제 인물로 생각해야만 했다. (중략) 그러나 고대의 저 실로 명확한 전승이 여기서 슐레겔을 반박하고 있다. 비극의 원시적 형태인 무대 없는 합창단과 이상적 관객으로서의 합창단은 서로 양립 할 수 없는 것이다. 무대상연 없는 관객이란 모순된 개념이다. 


- 두번 째 니체가 비판한 이론은 슐레겔의 이론입니다. 슐레겔은 비극 합창단이 '이상적 관객'으로서 발생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몇몇 역사적 사료들이 비극 합창단의 역할을 관조적이었다고 서술하였다는 것을 토대로 하면 꽤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슐레겔의 이론, 더 나아가 몇몇 역사적 사료들이 비극 합창단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비극 합창단은 니체에 의하면 연극에 분리된 관객의 존재가 아니라 연극과 그 출연진과 미적으로 합일된 존재입니다. 합창단은 연극시엔 따라서 그 자신도 연극의 출연진에 완전히 동화되고, 자기 자신의 자아를 잠시 잃는다고 니체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러는 합창단의 의미에 대한 훨씬 더 가치 있는 통찰을 <메시나의 신부>의 유명한 서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합창단을 비극이 자신을 현실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하고 자신의 이상적 지반과 자신의 시적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자기 주변에 쳐 놓은 살아 있는 성벽으로 간주했다. (중략) 실러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무대 위에서는 대낮 자체라 하더라도 인공적인 대낮일 뿐이며, 건축물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다. (중략) 그것은 모든 시의 본질인 것이다. 실러는 자신이 <메시나의 신부>에서 합창단을 도입한 것은 예술상의 모든 자연주의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그리고 명예롭게 선전포고하기 위해서 취한 단호한 조치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자연적인 것, 현실적인 것을 찬양하면서 도달하게 된 것이 모든 이상주의의 정반대의 것, 즉 밀랍세공의 진열장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 니체는 앞의 두 이론에 반하여 실러의 주장을 펼칩니다. 그것은 합창단이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공연장과 현실세계를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비극이 진행되는 공연장 내부는 인공적인 요소와 장치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니체는 섣불리 합창단 내부와 외부를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으로 나누고 단지 자연적인 것을 찬양하면 현대의 '사이비 이상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합창단 내부가 인공적이라고 하여도, 그 인공적인 것의 내재된 속성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물론 실러의 올바른 통찰에 따르면 그리스의 사티로스 합창단, 즉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이루는 합창단이 소요했던 곳은 '이상적인' 땅이며 죽음을 면할 길이 없는 인간들이 걸어다니는 땅보다 훨씬 더 드높이 솟아 있는 땅이다. 그리스인은 이 합창단을 위햐서 가공의 자연상태를 나타내는 공중의 가설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가공의 자연존재를 세워 놓았다. (중략) 이 경우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상상력을 통해 삽입된 자의적인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올림포스 산과 그 위의 신들이 신앙심 깊은 그리스인에게 가졌던 현실성과 신빙성을 지닌 세계인 것이다.


- 합창단은 분명히 인공적입니다. 하지만 비극 합창단은 자연상태를 나타내는 인공적 존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상태, 현실성은 근원적 일자와 융합한 상태이며, 사티로스의 상태, 힘에의 의지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극 합창단은 인간에게 인간은 사티로스, 근원적 일자와 하나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이 과정에서 인간이 삶에의 의지를 얻을 수 있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이와 똑같이 그리스 문화인들도 사티로스 합창단 앞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들 간의 강력한 통일감정에 의해서 사라져 버리고 자연의 심장으로 되돌려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인 것이다. (중략) 모든 진정한 비극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수단인 형이상학적 위안, 즉 사물의 근저에 놓여 있는 삶은 현상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에서도 불멸의 힘을 지닌 채 환희에 넘쳐 있다는 위안은 사티로스 합창단으로서, 자연존재의 합창단으로서 생생한 육체를 지닌 명료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 '나'는 개별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근원적 일자와 같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사라져도 근원적 일자와 합일되어 있는 존재로서 '나'는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알리는 것이 사티로스 합창단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이를 듣게된 그리스 문화인들은 형이상학적 위안을 얻으며 불멸의 힘과 환희에 넘치게 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이 상태는 좀 다를 수 있으나, 카타르시스의 상태와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를 넘어 모든 사회의 개인들은 일상과 현실을 살면서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타인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에 더불어 자기 자신의 고통 등 현실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개인은 삶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를 잃게 됩니다. 개인들은 현실에서 사회와 현실,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게 되며, 그것이 고통에 차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들은 무기력해지고, 자신의 행동이 의미없음을 알게 되어 구토증에 빠지게 됩니다. 이 때 예술, 비극이 구원과 치료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근원적 일자, 힘에의 의지와의 합일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인간에게 사는 보람을 일깨워주는 역할, 이것이 바로 사티로스 합창단과 디오니소스의 주신찬가입니다.


8장


사티로스도 근대 목가 속의 목자도 근원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향한 동경의 산물이다. (중략) 아직 어떠한 인식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직 문화의 침투도 받지 않은 자연, 이것을 그리스인은 사티로스 안에서 보았다. 그는 인간의 원형,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그리고 가장 강렬한 감동의 표현이었다. (중략) 사티로스는 어떤 숭고한 존재, 신적인 존재였다. 특히 고통에 상처 입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 8장은 사티로스와 사티로스 합창단이 형성된 이후에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7장에 이어서 좀 더 깊게 탐구합니다. 니체는 그리스 신화에서의 사티로스가 가지고 있는 성격을 서술합니다. 이 부분에서 니체가 충분한 연구를 거쳤는지에 대하여 기존 문헌학계와 충돌이 있었습니다만 굳이 문헌학적 성격이 아니라 철학적 성격으로 이 책을 바라보는 것이 좀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티로스 합창단은 보통 자신을 유일한 실재로 믿고 있는 문화인보다도 삶을 더 진실되고, 더 사실적으로, 그리고 더 완전하게 모사하기 때문이다. 시의 영역은 시인의 두뇌가 만든 환상적이고 불가능한 것으로서 세계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것, 즉 진리의 꾸밈없는 표현이기를 원한다. 이 때문에 시는 문명인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허위투성이의 가식을 떨쳐 버려야 한다. (중략) 이미 사티로스 합창단이란 상징은 사물 자체와 현상 사이의 저 근원적인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 7장에서 서술한 사티로스 합창단의 역할을 다시 서술합니다. 여기서 마지막에 사티로스 합창단의 상징이 물자체와 현상세계의 대조 관계라는 표현이 흥미로웠습니다. 니체가 자연의 본래적 진리와 문화의 허위간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는데, 아직 니체가 후기 철학에서 드러나는 일원론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관람석이 중심을 향해서 내려가는 반원형 계단식 구조로 되어 있는 그들의 극장에서는 모두가 자기 주위의 모든 문화세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무대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면서 자기 자신이 합창단의 일원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찰에 따라서 우리는 근원적인 비극의 원시적 단계였을 당시의 합창단을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자기반영이라고 불러도 좋다. (중략) 사티로스 합창단은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 대중이 떠올리는 환영이며, 무대 위의 세계는 사티로스 합창단이 떠올리는 환영이다. 이러한 환영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경험적인 실재'가 주는 인상, 즉 주위 관람석에 자리 잡고 있는 교양인들을 무시하게 만든다.


- 비극이 상연된 공연장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그 구조가 합창단에 어떠한 역할과 도움을 주었는지 서술합니다. 그리스 공연장의 구조는 반원형으로 맨 아래에 공연자들이 위치하며, 계단식 관객석, 합창단석이 그 앞에 위치합니다. 관객석과 합창단석의 구분은 명확히 나누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니체는 관객들도 합창단에 동화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관객들도 합창단에 동화되기 때문에 현실, 공연 외부의 것들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마법에 걸리는 것이 모든 극예술의 전제이다. 이렇게 마법에 걸린 상태에서 디오니소스적 열광자는 자신을 사티로스로 보고 사티로스로서 그는 다시 신을 바라본다. 즉 그는 사티로스로 변신한 가운데 자신의 상태의 아폴론적 완성으로서 새로운 환영을 자기 밖에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환영에 의해서 연극은 완성되는 것이다. (중략) 비극의 이러한 근원적 근거는 연극의 저 환영을 방사한다. 이러한 환영은 전적으로 꿈의 현상이며, 따라서 서사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객관화로서, 가상 속에서의 아폴론적인 구원이 아니라 정반대로 개체의 파괴와 개체의 근원적 존재와의 합일을 표현한다.


- 합창단과 비극에 의해서 마법에 걸린 이후에, 디오니소스적 열광자(관객과 합창단 모두를 포함)는 사티로스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티로스로서 그는 자기 자신, '나'의 개체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근원적 일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근원적 일자와 합일이 된 것도 개체의 단위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아폴론적 완성, 즉 꿈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폴론적인 개체화에서 이루어진 것은 근원적 존재와의 합일이기에 결국 그리스 비극은 아폴론적인 형상세계에서 디오니소스적인 합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비극 참여자(관객도 포함)은 각각 디오니소스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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