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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프리드리히 니체 - 비극의 탄생,  7주차

9장


 그리스 비극의 아폴론적인 부분, 즉 대화에서 표면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단순하고 투명하며 아름답게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대화는 그리스인들의 모사이다. 그리스인들의 본성은 사실은 춤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춤에는 가장 큰 힘이 숨겨져 있으면서 동작의 유연성과 풍부함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주인공의 언어가 갖는 아폴론적인 정확성과 명쾌함으로 인해 우리는 놀라게 된다.


- 니체는 9장의 도입부에서 다시 비극의 아폴론적인 표면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명쾌성과 정확성에 사람들은 놀라고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만, 니체는 현상만을 해석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다시 아폴론적인 표면 대신 니체가 끊임없이 주장한 디오니소스적 내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과는 정반대로 소포클레스의 주인공의 저 광학현상, 즉 가면이라는 아폴론적 현상은 자연 내부의 가공스런 것을 들여다 본 눈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산물이다. 말하자면 소름끼치는 밤을  보고 상처 입은 눈을 치료하기 위해서 빛나는 반점인 것이다. '그리스적 명랑성'이라는 의미심장한 개념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경우만 그것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도처에서 이 개념은 위험이 없는 유쾌함의 상태라는 의미로 그릇 이해되고 있다.


- 아폴론적 현상은 개별화의 원리에 따라 개개인이 비극을 볼 때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한편 이 부분에서 니체가 왜 이를 위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설명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았습니다. 비극을 볼 때 개인은 자연과 합일함으로써 생에의 의지를 얻는다고 니체는 지금까지 서술하였는데, 왜 여기선 비극을 본 후 상처와 위험을 치료하기 위해 아폴론적 현상이 개입하였다는 표현이 나온건지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미망과 비참에 빠지도록 운명 지어졌지만, 자신의 저 무서운 고뇌를 통해서 결국에는 자신의 주위에 축복이 넘치는 마력을 행사하게 되고 이 마력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 작용하게 된다. 고귀한 인간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라고 저 심원한 시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행위를 통해서 모든 법, 모든 자연스런 질서, 그뿐만 아니라 도덕 세계까지 붕괴하더라도 바로 그 행위에 의해서, 붕괴된 낡은 세계의 폐허 위에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보다 높은 마술적인 영향권이 형성되는 것이다. (중략) 진정한 그리스인이라면 이러한 변증법적인 해결에서 너무나 큰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에 작품 전체에는 명랑한 분위기가 감돌며, 이러한 명랑성으로 인해서 저 소송사건을 규정하는 가공할 전제들의 첨예한 성격은 완화된다.


- 이 부분은 단지 니체의 미적 탐구 뿐만 아니라, 니체의 철학의 가치파괴성, 즉 '신은 죽었다'로 통칭되는 특성을 서술해주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니체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오이디푸스가 니체의 초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무서운 고뇌를 통해서 자기긍정을 거치고, 자신의 행위에 따라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사람인 오이디푸스는 후에 니체가 서술한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의 짜라두짜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인적인 오이디푸스를 진정한 그리스인은 축복하고 같이 기뻐합니다. 니체가 이후에 서술하는 것을 보면 오이디푸스는 디오니소스와 동일자이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인은 디오니소스, 오이디푸스와 모두 합일하여 초인적인 특성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언적이고 마법적인 힘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의 속박, 개별화의 엄격한 법칙이 깨졌고 자연 고유의 마력까지도 깨진 곳에서는 자연에 반하는 엄청난 일이- 이 이야기 속의 근친상간처럼- 원인으로서 선행해야 한다라고. 왜냐하면 인간이 자연에 거역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즉 비자연성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인간은 자연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도록 강요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자연의 수수께끼를 푼 사람은 아버지의 살해자이며 어머니의 남편으로서 가장 성스러운 자연 질서를 파괴해야만 한다. (중략) 지혜라는 것, 특히 디오니소스적인 지혜라는 것은 자연에 거역하는 하나의 만행이라고.


- 니체의 저작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니체가 같은 단어라도 계속 뜻을 바꾸어 쓰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소박성과 같이, 여기서 니체는 자연의 뜻을 약간 다르게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자연은 근원적 일자 대신 기존의 가치 체계와 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기존의 가치 체계인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근친상간으로 파괴함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고 디오니소스적인 지혜를 얻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니체의 해석은 문헌학적에선 납득하기 힘들지만, 철학적으로 볼 땐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거인의 경지로 자신을 고양시키면서 인간은 자신의 문화를 쟁취하고 신들에게 인간과 결속을 맺도록 강요한다. 인간은 자신의 독자적인 지혜로 신의 존재와 조건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다. 그러나 그 근본사상으로 볼 때 본래 불경함에 대한 찬가인 프로메테우스의 노래에서 가장 경탄할 점은 정의를 향한 아이스킬로스의 깊은 경도이다. 한편으로는 대담한 '개인'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고통,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들의 곤경, 신들의 환혼에 대한 예감, 저 고통스런 두 세계의 화해와 형이상학적 통일을 강요하는 힘, 이 모든 것이 아이스킬로스의 세계관의 핵심과 주제를 매우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 이렇듯 인간의 가치파괴적인 특성을 관찰할 수 있지만, 거기서 니체는 정의와 균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과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정의의 여신 모이라는 올림포스 세계와 인간 세계를 저울에 다는데, 이것을 통해 인간은 아폴론적인 힘도 또한 가지고 있다고 니체는 주장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인간들을 창조하고 올림포스 신들을 최소한 파괴할 수 있다는 반항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한층 높은 지혜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러한 지혜의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중략) 오히려 예술가의 생성의 기쁨, 어떠한 불운에도 굴하지 않는 예술적 창조의 명랑성은 비애의 검은 호수에 비치는 밝은 구름과 하늘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전제가 되는 것은 상승해가는 모든 문화의 진정한 수호신으로서의 불에게 원시인류가 부여했던 엄청난 가치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자재로 불을 다스린다는 것은 명상적 원시인들에게는 신적인 자연에 대한 모독이며 약탈로 여겨졌다. (중략)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것이자 최고의 것을 인간은 모독행위에 의해서 얻어 내었고 이제 다시금 고통과 근심, 걱정의 홍수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 인간의 거인적, 파괴적인 힘과 능동성은 신과 자연, 기존 세계에 대해 반항적입니다. 초인적인 지혜를 통해서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제로 그렇게 할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지혜의 대가로 끊임없이 자아와 기존 세계간의 모순을 겪게 되고, 고통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은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명랑성을 능가하며, 이 고통은 상승하는 인간, 즉 초인이 초인으로서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됩니다.


세계의 심장에 깃든 모순이 그에게는 상이한 세계들의 혼란스러운 뒤섞임으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각각의 세계들은 독립된 개체로서는 정당하지만 다른 세계와 병존하는 것으로서는 자신의 개별화 떄문에 고뇌하지 않을 수 없다.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되려고 하는 영웅적 충동이 생길 경우, 즉 개별화의 속박을 넘어서 유일한 세계 본질 자체가 되려고 할 경우 개별적인 것은 사물들 속에 깃들어 있는 근원적인 모순을 스스로 떠맡게 된다. 즉 그것은 신을 모독하고 고통 받는 것이다. (중략)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가장 심오한 핵심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점- 을 이해나는 사람은 동시에 이 염세주의 사상의 비아폴론적 성격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폴론은 개체의 경계선을 긋고 개체가 절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며 개개의 사물을 신성한 세계법칙을 상기시킴으로써 안정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폴론적 경향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거대한 물결이 저 모든 소경계들을 종종 파괴하곤 했다. 즉 아폴론적이면서 동시에 디오니소스적인 성격은 다음과 같은 개념적 정식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정당하고 부당하며 두 가지 면에서 똑같이 정당화된다. 이것이 너의 세계이다! 이것이 세계라 불리는 것이다!"


- 9장의 마지막에 니체가 말한 세계의 핵심이 나와서 길게 썼습니다. 이전에 서술했듯 인간은 모순을 내재하고 있는데, 인간의 내부에선 이 세계들이 평온하게 존재하지 않고, 힘에의 의지에 의해 유일한 세계가 되려 합니다. 즉 이러한 개별 세계들은 개인 내부에 존재하고, 새로운 세계가 유입되지만 결국 이 세계들은 투쟁을 통해 소경계를 파괴하고, 유일한 세계가 되려합니다. 이는 개인의 내부 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적용이 되며, 이러한 개념들을 보았을때 니체가 초기 저작 이후에 어떻게 힘에의 의지를 구체화 시켰는지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는 모두 존재하고 이들의 경계는 명확히 구분짓기 어렵기 때문에 니체는 이들을 통합하여 일원론, 힘에의 의지로 나아가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10장


그리스 비극이 그 가장 오래된 형태에서 디오니소스의 고뇌만을 표현했으며, 오랜 시간 동안에도 무대 주인공이 디오니소스 뿐이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전승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에 이르기까지 비극의 주인공은 항상 디오니소스였고 프로메테우스나 오이디푸스 등과 같이 그리스 무대상의 유명한 인물들 모두 저 원래의 주인공인 디오니소스의 분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위의 사실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다.


- 9장에서 말했듯이 니체는 모든 비극이 디오니소스의 가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10장은 디오니소스가 어떻게 그 가면을 쓴 채로 발현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합니다.


유일하게 진실로 실재하는 디오니소스는 다양한 형태로, 즉 어떤 투쟁하는 영웅의 가면을 쓰고 마치 개별적 의지라는 그물망 속에 휘말려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나타난 신이 이제 말하고 행동하면, 그는 방황하고 노력하며 괴로워하는 개인을 닮게 된다. 


- 니체가 이전에 한 말을 플라톤적으로 다시 풀어썼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소년 시절, 거인들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겨졌고 이렇게 찢겨진 상태로 자그레우스로 숭배되게 된다고. 이 이야기 속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 즉 본래의 디오니소스적인 고통은 세계가 공기, 물, 땅과 불로 분화하는 것과 동일하며, 따라서 우리는 개별화의 상태를 모든 고통의 원천이자 근원으로서, 즉 그 자체로 비난할 만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 자그레우스는 사냥꾼의 신이며, 이 이야기는 디오니소스 축제에 제사지낼때 동물을 바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디오니소스적 고통은 개별화의 상태 그 자체이며, 디오니소스의 부활, 즉 합일만이 이 고통의 종말입니다.


오직 이러한 희망 속에서만 갈기갈기 찢겨지고 개체들로 분화된 세계의 얼굴에 한 줄기 기쁨의 빛이 비추게 된다. (중략)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통일성에 대한 근본인식, 개별화는 악의 근원이고 예술은 개별화의 속박을 파괴할 수 있다는 기쁜 희망이며 다시 회복된 통일에 대한 예감이라는 견해가 말이다. (중략) 바국울 통해서 신화는 자신의 가장 심원한 내용과 가장 표현이 풍부한 형식을 얻게 된다. 신화는 부상당한 영웅처럼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키고, 죽어가는 자의 저 지혜에 넘치는 평정과 함께 넘치는 힘이 그의 눈 속에서 최후의 힘찬 빛을 발하며 타오른다.


- 개별화에서 다시 합일을 통해 인간은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니체가 말한 사티로스의 지혜를 극복하게 된 비극을 본 후의 그리스인의 상태와 동일합니다. 10장의 마지막에서부터 니체는 이제 비극이 변하게 된 과정을 서술하는데, 이는 11장의 내용과 같기 때문에 나머지 내용은 11장으로 넣겠습니다.


11장


그리스 비극은 그것과 자매관계에 있는 보다 오래된 예술 장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몰락했다. 그것은 풀 수 없는 갈등의 결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것은 비극적으로 죽은 것이다. (중략) 이에 반해 그리스 비극이 죽었을 때는 엄청난 공허가 생겼고, 이러한 공허는 도처에서 통절하게 느껴졌다. (중략) 이제 "비극은 죽었다. 시 자체도 비극과 함께 사라졌다! 너희들 보잘것 없고 말라빠진 아류들은 저승으로 사라져라! 거기에서 너희들은 옛 거장들의 빵부스러기라도 한 번 배불리 먹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는 소리가 고통에 가득 찬 곡성처럼 그리스 세계 전역에 울려 퍼졌다.


- 그리스 비극은 아시다시피 몰락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니체는 비극이 왜 몰락하였는지를 고찰하는데, 11장은 처음 비극을 몰락시킨 시인인 에우리피데스를 중심으로 이를 다룹니다.에우리피데스는 서정시인이었기 때문에,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의 손에 몰락하게 된 비극이 자살을 한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윽고 새로운 예술 장르가 꽃피어 아티카 비극을 자신의 선구자이자 스승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중략) 이 새로운 예술 장르는 분명히 자기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지만, 그 모습이란 어머니가 오랫동안 죽음과 투쟁하는 단말마의 고통속에서 보여주었던 그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극의 이러한 단말마의 고통과 싸웠던 자가 에우리피데스였다. (중략) 비극의 너무나도 비참한 횡사의 기념비로서 이 희극에는 비극의 타락한 형태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신아티카 비극이 그리스 비극의 후계자로 등장하였지만, 니체는 이를 단지 비극의 타락한 형태라고 깎아내립니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를 이러한 비극의 몰락에 투쟁한 사람으로 처음 서술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에우리피데스는 왜 비극을 몰락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되었을까요? 이에 대해 니체는 탐구합니다.


관객은 에우리피데스에 의해서 무대로 올라오게 되었다. 에우리피데스 이전의 비극작가들이 주인공들을 어떠한 소재로부터 형성했으며, 현실의 충실한 가면을 무대에 올려 놓는다는 의도가 그들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이었는가를 이해하는 사람은 에우리피데스가 전혀 다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전에는 단지 위대하고 대담한 특징만을 표현했던 거울이 이제는 자연의 실패한 선까지도 착실하게 재현하는 꼼꼼한 충실성을 보여주게 되었다.(중략) 이제 관객들은 에우리피데스의 무대 위에서 자신들의 분신을 보게 되었으며, 그 분신이 그렇게도 말을 잘 할 줄 아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에우리피데스에게서 말하는 것을 배웠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소피스트적인 논법으로 교묘하게 관찰하고 토론하고 추론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 신아티카 비극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전 비극과 달리 관객이 중심이 된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나 프로메테우스 같은 그리스적 영웅 대신 소박한 관객과 그의 일상이 무대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관객은 자연과의 합일을 느끼는 대신, 자신의 분신이 무대에 올라온다는 인상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자신의 분신이 소피스트적인 변술과 논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며 일반 대중들도 이에 익숙해지게 되었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도 문헌학적으로는 좀 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공중언어의 일대 변혁에 의해서 에우리피데스는 새로운 희극을 가능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에우리피데스 이후부터 일상사를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방법과 격언법은 누구나 아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중략) 이제는 에우리피데스 자신이 모든 정치적 희망을 걸었던 서민적 범용성이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중략) 그리하여 이제 새로운 희극은 이렇게 준비되고 계몽된 대중 앞에 등장할 수 있었고, 에우리피데스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희극 합창단의 교사가 된 것이다. 


- 이렇게 에우리피데스가 새로운 비극을 쓰기 시작하면서 사회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민중이 계몽됨과 동시에 서민적 범용성이 정치에 등장하며 민주주의가 비롯되었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러한 사회변혁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비극 형식과 동시에 사회변혁의 선두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비극과 함께 포기해 버렸으며, 이상적 과거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이상적 미래에 대한 믿음도 포기해 버렸다. (중략) 적어도 정신상태라는 면에서는 제 5의 계급, 즉 노예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적 명랑성'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제 그것은 무거운 책임을 질 줄 모르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현재의 것보다도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노예의 명랑성이다.


- 이러한 새로운 비극과 동시에 자연합일은 종말을 고합니다. 따라서 근원적 일자와 자신이 영원히 하나라는 불멸성도 사라졌으며, 진지한 고찰도 종료되었습니다. 정신상태는 노예 상태가 되었으며, 진지한 명랑성 대신 표면적인 명랑성이 남았게 되어 과거와 미래에 대해 고려하지 않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인간의 상승욕구가 결여되었다고 니체는 통렬히 비판합니다.


사람들은 예술작품과 관객 사이에 균형 있는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던 에우리피데스의 급진적 경향을 소포클레스를 넘어서는 하나의 진보로서 찬양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객'이란 하나의 말에 불과하며 절대로 동질적인 집단도 아니고 그 자체로 고정된 양을 갖는 것도 아니다. (중략) 예술가가 재능과 의도라는 면에서 자신이 관객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우월하다고 느낀다면, 그는 그보다 열등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보다는 이들에 비해 최고의 재능을 가진 몇 명의 관객만을 염두에 둘 것이다.


- 에우리피데스를 진보라고 옹호하려는 사람에 대해서도 니체는 비판합니다. 에우리피데스가 서로 다양한 속성들을 지니는 관객을 뭉뚱그려 한 단어로 압축한 것에 불과한 시도를 한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니체는 미학적 이론에 자신 철학의 귀족적 성격을 드러냅니다. 예술가는 모두를 설득하는 것 대신, 정신적으로 미완된 사람들을 배제하고 초인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을 먼저 고려해야한다고 니체는 주장합니다.


사실은 그리스 예술가 중에서 일생에 걸쳐서 에우리피데스보다 큰 대담함과 자부심으로 관객을 다루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대중을 의연히 무시하면서 자기 고유의 경향, 즉 그가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그 경향을 공공연하게 정면에서 공격했다. (중략)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에우리피데스가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서 진정한 판단능력을 갖추게 해주었다는 우리의 말이 단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우리는 그의 경향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사실 관객을 존중한 것이 아니라 관객을 무시하였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합니다. 이후에 니체는 왜 에우리피데스가 선배 서정시인들과 반대로 관객을 경멸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합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시인으로서는 자신이 물론 대중보다 우월하지만 관객 중의 두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바로 이것이 방금 제시된 수수께끼의 답이다. (중략) 이 두 관객 중의 한 사람은 에우리피데스 자신이었다.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에우리피데스 말이다. (중략) 에우리피데스의 비범하면서도 풍부한 재능이 생산적인 예술충동을 낳지는 않았을지라도 지속적으로 자극했다고.이러한 재능을 총동원하여 에우리피데스는 극장에 앉아 자신의 위대한 선배들의 걸작들에서 획 하나하나, 선 하나하나를 다시 인식하려고 했다. (중략) 그는 획 하나하나와 선 하나하나에서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것, 즉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어떤 명확성, 동시에 배경의 수수께끼 같은 깊이, 아니 그보다도 배경의 무한성을 인식했다.


- 에우리피데스는 오직 두 관객만을 고려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관객을 경멸하였던 것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 관객 중 첫 사람은 사상가로서의 에우리피데스 자신입니다. 에우리피데스는 뛰어난 비판정신을 가지고 있던 서정시인이었기에 선배 서정시인들의 작품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하였고, 거기서 디오니소스적 명확성과 무한성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 및 근원적 일자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윤리적 문제의 해결방식은 얼마나 의혹을 자아내었던가! 신화의 취급은 또 얼마나 이상했던가! 행복과 불행의 분배는 얼마나 불공평했던가! 고대 비극의 언어도 그에게는 많은 점에서 거슬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략) 그는 극장에 앉아 불안한 가운데 고민하면서 관객으로서 자기는 위대한 선배들을 아무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성이 모든 감상과 창작의 뿌리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는 자기 주위를 둘러보면서 아무도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지, 자신처럼 저 헤아릴 수 없는 느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최고 수준의 사람들까지도 그에게 불신의 조소를 지었을 뿐이다. (중략) 이러한 괴로운 상태에서 그는 다른 관객 하나를 발견했다. 이 관객은 비극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비극을 중요시하지도 않았다. 이 관객과 연합함으로써 그는 고립에서 벗어나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예술작품들에 대한 엄청난 투쟁을 시작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반박논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비극관을 전통적 비극관에 대결시키는 극작가의 입장에서.


- 에우리피데스의 비판정신, 지성은 이전 선배들의 작품이 가지고 있던 문학적 기법들과 장치, 감성과 합일 등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은 대부분 논리적인 구조 대신 감정적인 전개와 이해할 수 없는 서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지성만을 통해서 비극을 인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외로웠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다른 관객 한 명을 발견하는데, 여기서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는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사고를 잠시 요약하자면 지덕일치와 지성의 감성에 대한 우위인데,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지 못했고, 중요시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는 소크라테스와 연합할 수 있었으며, 이제 에우리피데스는 자신만의 새로운 비극관을 창립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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