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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raiano Mar 08. 2019

프리드리히 니체 - 비극의 탄생, 1주차


우선 이 책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때 어려운 이유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니체가 일부러 논리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의도적으로 글을 어지럽게 쓰는 것이 자신이 이 책에서 다룰 철학적, 미학적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글을 어지럽게 쓰는 방법은 니체가 혼자 생각해낸 것은 아니고, 음악에서 바그너를 통해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바그너의 대표곡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들어보면 니체가 의도한 글쓰기의 방법에 대해서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EhUbowNCpk&list=PLHC--j33zW56doHNXgl5TnpRannuz3q


 바그너가 작곡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입니다. 이 곡은 트리스탄 코드를 이용해 작사한 방법입니다.이 방법은 바그너가 창시한 것으로, 일반적인 곡의 흐름과는 달리 멜로디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무한선율을 이루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바그너 시대 이전의 화음들도 배재했기 때문에 화음의 진행도 이질적입니다.


 니체는 28세에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시기에 니체는 후에 드러나는 진리적 허무주의 특성을 아직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니체의 중,후기 철학과는 많이 다릅니다. 후에 니체는 이 책을 다시 본 후 회의감을 느껴 자기비판의 장을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의미를 부정하면 곧 니체 철학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을 무시하게 됩니다. <비극의 탄생>은 니체 철학의 초기 발전 과정을 담아두는 책으로써 가치가 충분합니다.




강독 리뷰는 중요한 부분 위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입부 -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


 존경하는 나의 벗이여, 나는 지금 당신이 이 저서를 받아 보실 순간을 마음속에 그려 보고 있습니다. (중략) 당신은 아마도 겨울척 눈 속의 저녁 산책에서 돌아온 후, 책 표지에 그려진 쇠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를 보고, 내 이름을 읽고, 이 책에 무엇이 쓰여 있든 간에 저자는 무엇인가 진지하고 절실한 것을 말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즉각 확신하게 되며, 동시에 저자가 생각해 낸 모든 것은 마치 당신과 서로 면전에 있는 것처럼 대화하면서 오로지 이 대화에서 비롯되는 것만을 적었다고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 <비극의 탄생> 초판 표지에는 '쇠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라는 그림이 실려 있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영웅으로, 인간에게 불을 전달해준 죄로 매일 간이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프로메테우스를 표지로 쓴 이유를 찾아보자면, 이 책이 주제로 담는 그리스인과 신의 관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비극의 탄생>의 핵심 개념이기 때문에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몰두와 관련하여 애국적인 흥분과 미적인 탐닉 사이의 대립, 용기 있는 진지함과 명랑한 유희 사이의 대립과 같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중략) 마치 '삶의 엄숙함'에 대한 이러한 대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이 책은 그리스인의 비극이 어디서 탄생했는지를 고찰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가치들을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합일되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니체는 '엄숙함'에 반대되는 가치를 예술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니체에게 예술은 단순 유희가 아니고 엄숙함에 대립되는 가치도 아닙니다. 유희와 엄숙함, 후에 등장하겠지만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 합쳐지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장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생식이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하다.

- 번역의 어투 문제가 발생합니다. 독일어 원전에 나온 단어는 오롯이 발전의 의미보다는, 전개와 진행의 뜻도 또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폴론적인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처음 등장합니다. 아폴론은 태양과 지혜의 신으로 도덕과 법률을 주관합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통해 밝음, 밝음 아래서 모든 사물이 드러나는 균형, 절도, 질서, 명료한 형태, 국가의 도덕이나 법률, 아름다운 가상 및 이를 형성하는 능력을 상징하려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황홀경의 신으로 도취와 환각상태를 관장합니다. 이는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의 자료들에서 디오니소스제는 극도의 환희와 고통의 극단적인 긴장상태가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이 제사에는 남녀노소와 신분에 상관없이, 여성과 노예들도 참여하였습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통해 밤의 어둠과 심연, 혼돈,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하는 생명력, 아폴론적인 개성과 구별을 극복하고 혼연일체가 되는 도취와 생명력을 상징하려 합니다.


 그 두 충동들은 그리스적인 '의지'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기적을 통해서 결국에는 짝을 맺게 되며, 이러한 결혼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아폴론적이면서도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한 아티카 비극 작품이 산출되는 것이다. 그 두 충동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우선 꿈과 도취라는 서로 분리된 예술세계로서 생각해보자. 이 두 생리학적 현상들 사이에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대립과 같은 대립이 발견된다.

- 아티카 비극 작품은 니체가 생각한 예술의 최고 형태중 하나입니다. 니체가 생각한 최고의 예술은 비극 뿐만 아니라 음악도 포함하며, 서정시도 들어갑니다. 꿈과 도취는 각각 아폴론적인 가치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가 발현하는 형태로 이 둘이 합쳐져야(결혼을 통해) 최고의 예술이 등장하게 됩니다.


 인간은 꿈의 세계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예술가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의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이야말로 모든 조형예술의 전제이며,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것처럼 시문학의 중요한 절반을 차지하는 서사시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중략) 꿈에서 우리는 형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지만 어렴풋이 그것을 가상이라고 느낀다.

- 꿈은 아폴론적인 가치가 발현하는 형태입니다. 모든 조형예술은 꿈을 통해 산출됩니다. 꿈에서 나오는 형상들은 현실에서의 형상들과 무게를 달리 가집니다. 중요하지 않은 형상과 필요하지 않은 형상은 꿈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꿈에 완전히 탐닉하지 않고 그것이 가상임을 지각합니다.


 꿈의 경험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기쁨을 그리스인들도 아폴론 신이라는 형상 속에 표현했다. (중략) 대낮의 현실이 불완전하게만 이해되는 것에 반해 내면의 환상세계는 보다 높은 진리와 완전성을 갖는다. 이러한 진리와 완전성 그리고 잠과 꿈을 통해 치유하고 도와주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의식은 예언의 능력에 대한 상징적 유사물이자 삶을 가능하게 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예술에 대한 상징적 유사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꿈 속의 형상이 병적으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는 넘어서는 안 되는 저 섬세하고 미묘한 선도 아폴론의 형상에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 인간의 의식적 판단과 이성, 의지는 불완전하며, 이를 꿈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하지만 꿈이 완전히 현실을 압도해서는 안 되며, 꿈과 현실의 구분을 지어주는 것이 바로 아폴론적 절도,구분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마야의 베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약간 벗어난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아폴론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태산 같은 파도를 올렸다 내리면서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채 포효하는 광란의 바다 위에 뱃사람 하나가 자신이 탄 보잘 것 없는 조각배를 믿고 의지하면서 그것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 인간 개개인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면서 고요히 앉아 있다."

- 마야는 환영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입니다. 마야는 실체와 형상을 구분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인식하는 감각들은 감각기관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료를 가지고 시간, 공간, 인과성을 통해 물질'세계'로 개조하는 것이 지성의 역할입니다. 개별화의 원리는 인간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나와 세계가 일치하지 않음을 나타내며, 아폴론적인 질서를 의미합니다. 시간, 공간, 인과성을 개인마다 승화시켜야 개별와의 원리가 도출됩니다. 이와 반대로 아폴론적인 질서가 적용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디오니소스적 가치들은 물질세계에서 평소에 관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운명과 자연같은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가치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곳에서 쇼펜하우어는 근거율이 자신의 여러 형성물들 중 어느 하나에게 어쩔 수 없이 예외를 허용해야 하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이 갑자기 현상의 인식 형식에 대한 신뢰를 상실할 때 그들을 엄습하게 되는 엄청난 전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개별화의 원리가 이런 식으로 부서지면, 인간의, 아니 자연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 환희에 찬 황홀감이 용솟음친다.

- 자연은 운명적 힘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개별화의 원리가 무너질 때 자연이 등장하는데, 이 때 인간은 전율(두려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황홀함(기쁨)을 느낍니다. 황홀함을 느끼는 이유는 인간이 아폴론적인 질서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가치도 또한 가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자연을 구성하는 일부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운명, 자연과 별개가 아니기에 두려움만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수백 만의 사람들이 전율하면서 먼지 속에 엎드릴 때 위축되지 말고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 보라. 그러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중략) 세계의 조화라는 복음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 이웃과 결합하고 화해하며 융합하고 있다고 느낄 뿐 아니라, 마야의 베일이 갈기갈기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자 앞에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이웃과 하나가 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근원적 일자는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합쳐진 존재입니다. 이 책에서 근원적 일자는 현실의 배후에 존재하지만, 후에 니체는 근원적 일자가 현실속에 존재한다고 수정합니다. 그리고 근원적 일자 대신, 힘에의 의지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디오니소스적 가치는 아폴론적 가치, 절도와 반대로 개인들의 합일, 즉 자연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이웃과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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