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를 위한 책, 그러나 아무도 이해하지 않는 책
우울하고 흔들릴 때 자주 이 책을 읽곤 했습니다. 방향을 설정하면 외부의 조언과 피드백을 받곤 합니다. 감사하게도 신경을 써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시기에 나오는 말씀들이지만, 종종 이에 묻혀 원래 가지던 큰 방향성을 잃곤 합니다. 그럴때마다, 과연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긍정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의 가야하는 길은 내가 설정하였는지, 어떠한 다른 자극과 기준의 산물이 아니었을 지 허무감에 사로잡히곤 했었습니다.
정신은 모습을 세 번 바꿀 수 있지.
나는 이것을 ‘정신의 세 가지 탈바꿈’이라고 불러.
처음에는 낙타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낙타가 사자의 모습으로 바뀌고
세 번째는 사자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지.
-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1:1
니체가 남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따분한 철학서가 아닙니다. 암송할 수 있는 서사시입니다. 성경과 같이 암송할 수 있으나, 그와는 달리 어둡지 않습니다. 이 책은 웃고, 긍정하며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개인이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사다리입니다.
니체가 이 책의 두 번째 장(0번째 장은 이야기의 맨 처음, 차라투스트라가 출발하는 이야기)에 정신의 세 모습을 이야기한 이유는, 초인의 모습으로 가치를 생성하고 긍정하는 이상을 정립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니체는 개인에게 어떠한 이상주의를 강요한 철학자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순간과 영원을 긍정하는 것이 니체 철학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은 행복을 긍정하고, 고통을 부정합니다. 고통이 오는 순간과 자신을 그저 회피하려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자기 자신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을 옭아매는 과정으로 이어지며, 자신이 자신을 구속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낙타와 같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스스로를 구속한 인간은, 짐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졌을 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습니다. 여기서 개인은 이를 던지고 떨칠 기회를 얻으며, 행동할 경우 사자와 같이 공격적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의 유형이 됩니다. 그는 어떠한 주어진 가치를 의심하고 판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형은 아직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그의 판단은 아직 주어진 가치와 기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사자의 개인은 의심하고 판단하며, 갈증을 느낍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온전히 주체가 되지 못했다고 느끼는 본연적 갈증을 느낍니다. 여기서 갓 태어난 가치와 규준이 생성됩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가치를 오롯이 긍정하는 순간 그는 순수하게 '예'를 외치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플라톤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움직입니다. 그가 만들어내는 기준은 절대 이성적이지 않고, 이성적이거나 감성적, 야수적입니다. 어떠한 외부적 편견도 없이, 순수히 자신의 기준으로 바라봅니다. 정오라는 시간, 해가 드높이 뜨는 시간에 어린아이는 웃습니다.
산 속에서 글을 읽던 선비 차라투스트라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고통입니다. 항상 고통도 긍정해야겠다 생각하지만, 저 자신은 그럴때마다 회피하려하는 낙타일 뿐입니다. 산 속에서 안식을 찾을 뿐입니다. 이 또한 긍정하고 나아가는 초인, ubermensch가 되고 싶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 사다리를 치우고도 웃고 싶습니다. 스스로는 아직 약합니다. 허무에 사로잡혀 그르치는 경우가 잦습니다. 비단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헤매고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과 같이 이 글을 다시, 두고두고 읽고 암송하려 합니다.
리하르트 바그너와 독일의 민족주의라는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고 부순 니체와 같이, 나도 이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1. 낙타, 데카당
<떼> 몰이꾼은 없지만 전체가 하나의 <떼> 인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원하고,
모든 사람이 같은 사람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냐고요?
자기 발로 정신병자 수용소로 들어갑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0:103
그 어떤 인식의 문제에 대한 모든 회의적, 상대적 태도에의 깊은 ‘불만’은, 사람들이 절대적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던 시대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은 대개 권위 있는 사람들(아버지, 벗, 선생, 군주)의 신념에 무조건 항복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에는 일종의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중략) 교양인의 대부분이 지금도 어떤 사상가에게서 신념을, 다만 신념만을 구하고 있으며,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확실성’을 바라고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감각이 인식을 위한 섬세하고도 충실하고 신중한 기관이 되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고, 또 완전히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우리의 눈으로는 주어진 기회에 가끔 만들어진 일이 있는 형상을 재차 만드는 편이, 어떤 인상의 특이하고도 새로움을 포착하기보다 쉬운 일이다. (중략) 우리의 감각은 새로운 것을 적대시하고 혐오한다. 우리는 체험의 대부분을 상상하고 어떤 사실도 일부러 관찰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2. 사자, 힘에의 의지
무게를 견디는 정신은 이 모든, 무겁기 짝이 없는 무게를 짊어져.
짐을 잔뜩 진 채 서둘러 사막으로 가는 낙타처럼
무게를 견디는 정신은 자신의 사막으로 들어가지.
하지만 외롭기 짝이 없는 사막에서 정신은 탈바꿈을 해.
정신은 사자가 되지.
자유를 움켜쥐어 자신의 사막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거야.
(중략)
정신이 ‘주인님’ 혹은 ‘하나님’이라고 더 이상 부르고 싶어 하지 않는
이 거대한 용이 무엇이냐고?
이 거대한 용은 이름은
<마땅히 너는 OO할지어다!>
하지만 정신은 이렇게 말하지.
내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마!
“나는 OOO를 의지한다!”라고 말하지.
-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1:11, 1:12, 1:14
아! 형제들!
내가 <선량한 사람>들을 부수고
그들의 율법서판을 부숴야 된다고 말해 줌으로써,
인류는 비로소 탁 트인 망망대해로 나가게 된 거야.
(중략)
‘인간’의 본성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인류의 미래’가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어.
항해자가 돼야 돼! 용감하고 끈덕진 항해자가 돼야 돼!
(중략)
조국? 웃기는 소리! 우리는 조국을 버리고 멀리 가는 거야.
우리 아이들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거야!
우리들의 갈망은 멀리, 저 멀리 풍랑보다 더 폭풍같이 휘몰아쳐 가지!
-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56:210, 56:213, 56:216
<인민의 강>이 아니라 <변하여 되어 가기>의 강을 흐르는 자네의 보트,
그 보트에 승객들을 태운 것은 바로 자네 자신이지.
자네의 <가치평가>, 자네의 미덕, 자네의 <선과 악>을 태웠지.
그 승객들에게 빛나는 모습을 부여하고 자랑스런 이름을 지어 준 것도 자네야.
자네와, 자네를 지배하는 의지가 그렇게 했어!
(중략)
자기 자신에 대해 명령할 때조차 그 명령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돼.
자신이 세운 법에 의해서 재판관이자, 처벌 집행자이자, 희생자가 돼야 해.
(중략)
살아 숨 쉬는 생명은
생존보다 높게 <가치평가>하는 것들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어.
하지만 이 <가치평가>는 결국 무엇을 나타내지?
<힘에 대한 의지>, 바로 그것을 나타내.
-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34:9, 34:19, 34:36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다. 짜라두짜는 회의주의자다.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와 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 전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확신은 감옥이다. (중략)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 말참견할 수 있으려면, 오백 가지 확신들을 자신의 발 아래로 굽어보아야만 한다. 위대한 것을 원하고, 그것을 위한 수단을 원하는 정신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자다. 위대한 열정은 확신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주권자임을 알고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3. 어린아이, 초인
하지만 형제들! 한 번 내게 말해 봐.
사자조차 해 내지 못하는 일인데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
맹수 사자가 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지?
순진무구한 것, 쉽게 까먹는 것, 새로운 시작, 장난질,
혼자 굴러가는 바퀴, 스스로 시작되는 움직임, 선선히 대답하는 <네>
이것이 어린아이 아니야?
그래! <신성한 네>가 필요해, 형제들!
창조를 위해선 <신성한 네>가 필요해.
정신은 이제 그 자신의 의지를 원하거든.
세계와 분리된 정신은 이제 그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 거니까.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1:23, 1:24, 1:25
이 다음에 죽게 될 때에, 날 찾아온 죽음에게 이렇게 말할 걸세.
‘그게 인생이었어? 좋은데! 한 번 더!’
친구들!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들도, 나처럼, 죽음에게 말하지 않을 텐가?
‘그게 인생이었어? 짜라두짜 덕분에 좋았거든! 한 번 더!’
-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79:5, 79:6
인간은 매 순간 극복되고, 초인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최고의 현실이 되었다. 이제껏 인간들에게서 위대하다고 불리었던 것은 전부 초인의 밑에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 자기의 공간이 넓다는 점에서, 대립적인 것에도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짜라두짜는 스스로를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최고 유형으로 느낀다. 짜라두짜가 어떻게 초인을 정의 내리는지를 들어보자.
가장 긴 사다리를 갖고 있으며 가장 깊은 심연까지 내려갈 수 있는 영혼.
자기의 내면으로 더없이 뛰어들고, 그 속에서 방황하며 배회할만큼 더없이 포괄적인 영혼
내부의 모든 것이 흐름과 역류, 썰물과 밀물을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영혼.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너희, 내 눈에 맞닥뜨린 최상의 인간들이여. 너희에 대한 내 의혹과 내 은밀한 조소는 : 추측컨대 너희가 내 초인을 악마라고 부를거라는 점이다!
너희의 영혼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초인이 선의를 갖고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는 그가 두려운 존재이리라...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대목을 짜라두짜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단초로 삼아야 한다 : 그가 구상하는 인간 유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한다 : 그 인간은 그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며, 그런 현실에서 소외되지도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그는 그 현실 자체이며, 현실의 끔찍하고도 의심스러운 모든 것을 자기 내부에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야 인간은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