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술, 담배, 노름 그리고 말(馬).
아버지는 노름, 여자, 술, 담배, 그리고 말을 뜨겁게 사랑하셨다. 그중 말(馬)을 특히나 사랑하셔서 말밥을 주기 위해 하루를 멀다 하고 경마장에 가서 돈을 탕진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 후,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돈을 벌어온 적이 없었다. 그는 야바위 팀에서 망을 보는 대장이었다. 야바위 팀은 보통 4-5인으로 구성되는데, 대게 영등포역 길 건너 백조 다방 앞에서 좌판을 벌였다.
야바위 카드를 돌리는 사람과 거간꾼 2-3명, 그리고 좌판에서 멀리 떨어져, 경찰단속을 살피는 자랑스러운 대장 우리 아빠. 그는 여자(백조 다방 백간순이)를 만나기 위해 또는 노름을 하기 위해 엄마를 괴롭히며 돈을 뜯어냈다. 하지만, 아빠와 1남 4녀를 낳고 기르는 동안, 여성성을 잃고 칡 줄기보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엄마는 결코 쉽게 돈을 내어주는 일이 없었다.
응당 그는 엄마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루틴과도 같던, 일련의 과정을 진행시키곤 했다. 일단 술을 먹고, 간간이 담배를 피우면서 취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 뒤 집안 물건 한 두 개씩 부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대피했고, 누나들도 대피했다. 어쩌다 대피가 늦거나, 기습 공격을 당하는 날이면 엄마와 누나는 폭행을 피할 수 없었다. 남자라는 이유로 나는 가장 어렸지만, 집에 남아 그의 술주정과 폭력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나를 한 번도 때리지는 않았다. 1남 4녀라 그런지 ‘귀한 막내아들’인 나를 시정잡배인 그가 시정잡배와 같이 다루지 않았다. 더욱이 나는 항상 우등생이었고, 초등학교 내내 반장을 했다.
반면 엄마나 누나들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인지, 심연 깊숙한 곳 ‘남자’에 대한 기피, 증오가 있어, 나를 귀하게 다뤄주지 않았다. 밥도 안 차려줬으며, 걸핏하면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행사했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했다.
여하튼, 일련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집을 부수고 있는 아버지에게 매달려 울어도 보고, 가끔 찾아오는 동네 아저씨들에게 아빠를 말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기실 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정말 슬퍼서 울었겠지만, 초등 4학년이 되고부터는 울고는 있었지만, 지겨움과 창피함이 더욱 컸기에 연기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 내면의 양심과 자기반성을 기폭 하기 위해, 나는 매우 슬프게 우는 시늉을 하며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다행히 중1 때 돌아가셨다.
난 그의 이야기를 하는 걸 많이 좋아하지 않는다. 미워하고 증오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는 언제나 나의 관심 밖이었다. 그와 나의 연결고리는 ‘결코, 닮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다짐 하나 밖에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공무원 공부를 든든하게 지원해 준다며 자신의 아들을 독려한 동기 아버지를 봤을 때나 한두 번 정도,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며 슬펐던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를 닮지 않기 위해, 공부도 잘했고, 책도 많이 봤고, 태권도도 열심히 했다. 더구나 그림까지 어머니를 닮아 잘 그렸기에, 항상 교내 미술 최우수상을 받았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 선생님의 종용으로 미대진학까지 고려했을 정도였다.
나는 중학교 때, 이미 성공을 맛본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닮지 않으려는 노력이 일찍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외탁’한 나의 얼굴과 181cm에 달하는 키 때문에 우리는 외모적으로도 닮지 않았다. 그에 더해 나는 말(馬)과 노름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거울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아래 치열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치아 하나가 안쪽으로 심각하게 밀려들어가 있었다. 아뿔싸! 어디선가 많이 본 치열이었다. 그렇다. 내가 그렇게 닮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의 살아생전 치열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고들빼기(가풀막) 김치 류의 쓴 음식과 육사시미, 육회 류의 생(生) 음식을 사랑하는 식성.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심하게 닮아 있었다.
난 요즘 들어, 관심 없던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발가락이 닮았네.’ 때문도 아니고,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돼서, 지천명을 앞두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도 가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증조부는 20살에 형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임실 전투 등에서 목숨을 걸고 관군과 맞서 싸우셨다. 그런 와중에 끝까지 추격해 오는 관군을 피해, 고향을 떠나 타향에 숨어들어 피신의 삶을 사셨다. 만약, 몇 십 년간 지속된 추격이나 집요한 색출과정에서 군이나 경찰에 잡히셨다면, 목숨을 잃거나 옥고를 치르셨을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지 못했을지 몰랐다. 응당 나의 조부는 이런 집안 배경 때문에 마땅한 공부를 하지 못하셨고, 결국 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멸문을 넘어, 생무식자 집안이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영특했다고 고모들이 말해줬다. 하지만, 가정형편상, 분위기상 그는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커서 노름쟁이, 주정뱅이, 야바위 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2020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5조]에 의거 공식적으로 국가기관에 의해 유족등록이 되었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의 역사를 알고 집안의 빈곤과 친인척의 무학(無學)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적어도 다른 아버지들처럼 가족 생계는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이런 일련의 이해와 치아와 식성이 닮았다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근자, 나는 아버지에게 조금 관심이 생겼다.
거두절미하고 어쨌든 그는 내 아버지였다. 그가 차마 몰라서, 할 줄 몰라서 살아생전 못했던 안타까운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내게 남은 생 동안 그를 대신해, 하고 갈 예정이다.
내게 삶을 준 사람이면서, 나의 사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준, 나의 아버지.
그의 사랑 한 번 받아본 기억이 없지만, 그가 문뜩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