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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의 아침 - 2 (미국)

사바나에서 먹는 사바나의 아침은 어떨까?

by 닐바나


사바나의 아침


‘Savannah, Mathew’s’라는 이름이 적힌 레스토랑으로 들어섰고, 안쪽으로 들어서자 벽돌과 목재로 이루어진 실내가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식당 안은 여전히 북적였습니다. 저마다 여유로운 주말의 브런치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그 풍경만으로도 이 도시가 얼마나 느긋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성적이고 올드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반려견과 함께 식사를 즐기는 커플, 가족끼리, 연인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모습. 그 장면들 하나하나가 ‘사바나의 아침’이 어떤 느낌인지 조용히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우리 일행이 주문한 메뉴는 감자튀김을 곁들인 오믈렛과 프렌치토스트였습니다. 미국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익숙한 메뉴였지만, 어둡지만 감성적인 실내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사바나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것만으로도 음식의 맛은 한층 더 깊어졌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많은 음식을 접하다 보니 이제는 딱히 기억에 남는 음식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 음식의 본연의 맛보다 그 음식을 즐겼던 분위기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점입니다. 사바나에서의 브런치는, 그런 생각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해 준 시간이었습니다.


물류의 중심지 “사바나 항”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천천히 리버사이드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이 도시가 왜 항구 도시로 불리는지, 그리고 왜 수많은 화물이 이곳을 거쳐 가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 강변이었습니다. 사바나강을 따라 정박한 거대한 선박들과 철교처럼 뻗은 탑 브리지, 그리고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지나가는 컨테이너선들. 한 도시가 지닌 산업의 리듬을 강물 위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사바나 항구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대서양 연안의 무역항입니다. 1730년대, 이곳이 처음 조성됐을 무렵에는 농산물과 면화가 주로 오갔고, 식민지 시절과 남북전쟁을 거치며 남부 경제의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해왔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첨단 산업과 자동차, 반도체 관련 부품까지 오가는 물류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조지아주와 사바나 일대에 많은 한국 기업들의 투자가 집중되면서 한국발 화물도 이 항구를 통해 활발히 드나들고 있습니다. SK온은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세웠고, 현대자동차는 브라이언 카운티에 대규모 전기차 공장을 건설 중입니다. LG이노텍, 한화 Q셀 같은 기업들도 이 일대에 기반을 두고 있어, 사바나는 그야말로 ‘한국 부품들이 가장 자주 들르는 미국 항구’가 된 셈입니다.

그렇게 항구 앞에 서서 컨테이너선이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신입사원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저는 외자구매 파트를 맡고 있었고, 늘 해외에서 부품이 납기일보다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생산 부서들의 독촉에 멘붕을 겪던 나날이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해질 때면, 거가대교 중간에 있는 휴게소에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곤 했죠. 지나가는 컨테이너선을 보며 “혹시 저 배에 우리가 주문한 부품이 실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기대를 하며 말입니다. 그때의 저는 바다 위 컨테이너선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제는 그 배들을 바라보며 사바나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 걸 보니 시간도 많이 흘렀고, 제 마음속 풍경도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습니다.


출장과 여행 사이 그 어딘가…


여행의 마지막 밤, 우리는 리조트형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총 다섯 명이 함께한 여행이었기에, 숙소는 넉넉하고 쾌적한 공간을 갖춘 리조트 형태로 예약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는 수영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대서양의 기운이 스며든 저녁 공기가 부드럽게 감돌았습니다. 럭셔리한 시설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처럼, 이 리조트는 조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가족들이 소리 없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떠들썩한 호텔과는 또 다른, 일상에서 잠시 빠져나온 사람들이 모여 조용히 힐링을 누리는 공간이었지요.


출발 전날, 현지 한인 마트에 들러 고기와 김치, 각종 장을 잔뜩 준비해 왔습니다. 아무래도 미국식 음식에 지쳐가던 우리의 입맛은 한식으로 정화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커다란 식탁 위에 고기와 채소를 정갈하게 차려 놓고, 아이스 잔에 시원하게 따른 술을 함께 곁들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평균 연령 40을 훌쩍 넘긴 아저씨 다섯 명이 모여 앉아, 회사 이야기, 가족 이야기, 그리고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나누며 밤이 깊어졌습니다.


비즈니스를 위한 만남으로 시작된 관계들이었지만, 일 외의 모든 것을 선 긋고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까운 것 아닐까—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건 관계 속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밤, 사바나의 조용한 숙소에서 나눈 술잔과 대화는, 출장의 연장이 아닌, 인생의 쉼표처럼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하며…

사바나에서의 이틀은 짧았지만 꽤 많은 장면을 마음속에 담아둘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아쉬움이 남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거리에서 마주친 독특한 다인용 자전거 펍으로, 사람들이 직접 페달을 밟으며 도시를 돌아다니는 이 색다른 투어는 사바나의 여유로운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언뜻 보기엔 우스꽝스럽지만, 그 속에서 맥주 한 잔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다음에 다시 온다면 꼭 한번 저 자리에 앉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기대했던 일출입니다. 이른 새벽, 대서양을 마주한 해변에 나가보았지만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풍경은 짙은 구름에 가려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분명히 흘렀고, 해는 어딘가 떠올랐을 텐데 그 찰나의 순간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괜스레 아쉬웠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출은, 결국 못 본 일출이 되었지만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면, 그날은 맑은 하늘 아래, 사바나의 아침을 조금 더 완전하게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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