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시티의 감성과 물류 허브로서의 사바나를 느껴보다
지금 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이 아닌 여행으로 이곳에 오긴 쉽지 않지만, 출장으로는 1년에 몇 번씩 오게 되는 곳입니다. 이번 출장은 짧고 빠르게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인생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듯, 한국에서 출발한 화물을 받아 작업을 진행해야 하지만, 화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탓에 기존 일정보다 일주일을 더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컨테이너는 언제쯤 들어오는지 물류사 홈페이지를 뒤적이다가 문득 오랜만에 ‘사바나 항구’를 지도에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서배너(Savannah)’가 맞지만, 우리말 영어 발음으로는 자연스럽게 ‘사바나’라고 부르게 되지요.
‘사바나’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 개그콘서트 전성기를 이끌던 심현섭 씨가 리드하던 코너, 바로 사바나의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이죠. 그 프로그램에서의 ‘사바나’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 지대를 의미합니다(Savanna).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열대 지역에 펼쳐진 그 평원은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곳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려는 ‘사바나(Savannah)’는 미국 조지아주에 위치한, 철자가 다른 또 다른 사바나입니다. 이곳은 식민지 시대부터 형성된 유서 깊은 정착지이자, 지금도 미국 남동부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출장지에서 예기치 않게 생긴 일들 덕분에, 문득 떠오른 사바나의 기억을 이 글에 담아보려 합니다.
왜 하필 사바나?
2024년 1월 즈음의 출장입니다. 여느 때처럼 빠르게 귀국하고 싶었지만, 계속되는 문제로 출장 기간은 결국 3주로 길어졌습니다. 첫 주 주말은 시차 적응과 여독을 푸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2주 차 주말쯤엔 ‘그래도 미국에 온 김에 어디라도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지 직원과 대화하던 중 사바나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우리 화물 사바나로 받잖아요. 화물 받는 것도 구경할 겸, 한번 가보세요. 거기 가면 좋은 브런치 집들도 많아요.” 그렇게 사바나로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머무르고 있던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사바나로 가기 위해선 남쪽으로 차를 약 4시간 30분 정도 달려야 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대도시인 샬럿을 지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 콜롬비아를 통과한 뒤, 최종적으로 조지아주의 사바나에 도착하는 경로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4시간 30분은 서울에서 부산을 오가는 거리이기에 꽤 먼 거리처럼 느껴지지만, 미국 사람들에겐 이 정도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거리인 듯했습니다. 실제로도 현지 직원들은 차량으로 6~7시간이 넘지 않으면 비행기 대신 차를 이용한다고 하더군요. 미국에서의 운전은 그리 어렵지 않은 편입니다. 우리나라 신호 체계가 대부분 미국에서 온 것이기도 하고, 차선 자체가 넓어서 운전 자체는 쾌적한 편입니다.
하지만 고속도로 중간에서 사고가 난 구간을 지나게 되었고, 그 사고 처리를 지켜보며 한국과는 또 다른 점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같았으면 금세 수습되고 정리가 되었을 테지만, 미국에서는 거의 도로 위에서 1~2시간 가까이 정체가 이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려견을 데리고 나와 소변을 보게 하고, 어떤 사람은 차 밖으로 나와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습니다.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이런 불편함을 그저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한국이었으면 도로공사에 항의 전화를 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 많았을 텐데 말이죠. 한국인에겐 불편함일 상황이, 이들에게는 여유가 되는 것. 이런 마인드 차이가 미국인들이 더 여유 있어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상보다 시간이 훌쩍 더 걸리긴 했지만, 갇힌 차 안에서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바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올드시티 감성을 느끼다
사바나는 미국 조지아주 동쪽, 대서양과 맞닿은 연안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1733년, 영국인 제임스 오글소프에 의해 계획도시로 조성된 이곳은 미국 남부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중 하나이자, 식민지 시대부터 무역과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해 왔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아, 지금까지도 18세기와 19세기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바둑판처럼 정돈된 도로 구조와 크고 작은 광장들, 그리고 곳곳에 드리운 스페인 이끼가 먼저 떠오르는, 조용하고 낭만적인 항구 도시입니다.
처음 올드시티에 들어섰을 때, 감성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깔끔하게 보존된 붉은 벽돌 건물 사이, 낡고 녹슨 간판 아래에 멈춰 선 오래된 벤츠 한 대는 묘한 힙함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반질반질하게 닳은 철제 간판, “50센트에 열쇠를 만들어 드립니다”라는 오래된 문구, 그리고 그 옆에 그려진 화살이 박힌 붉은 하트까지. 이곳이 과거와 현재 중 어디쯤에 있는지 잠시 헷갈릴 만큼, 도시 전체가 시간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서 있는 듯했습니다. 오래된 듯하지만 감성적인 색상의 거리에는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과 벤치에 기대어 쉬는 이들, 그리고 도심 속 고요함을 방해하지 않는 소박한 간판들이 이어집니다. 신생 국가인 미국 안에서, 이렇게 유럽의 오래된 감성을 품은 도시가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 깊었던 풍경은 거리 위로 드리워진 스페인 이끼였습니다. 굵은 나뭇가지에서 늘어져 내리는 회색빛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시각적으로도 강한 인상을 남겼고, 사바나 특유의 습하고 느긋한 공기와 묘하게 어울렸습니다. 사람들은 나무 그늘 아래를 천천히 걸었고, 어디선가 브런치 냄새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장시간 운전으로 인해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그 향기를 따라 자연스레 한 브런치 가게로 들어섰습니다. 사바나의 아침을, 진짜 사바나에서 맞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