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2(중국)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토 나오는 남천문 통과기

by 닐바나
홍문을 지나 중천문으로
홍문을 통과할 땐 서로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홍문은 말 그대로 붉은 문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이 빨간색과 노란색이니, 입구를 붉게 칠해 놓은 것도 그 영향이겠지요. 홍문을 통과한 시각은 대략 오후 3시경, 아직까지는 저를 포함한 일행들의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함께 걷다 보니 관계가 한층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등산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딱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천국의 계단.” 지금까지 헬스장에서 타던 머신도 같은 이름이었지만, 이곳에 와보고 나니 앞으로는 더 이상 그걸 천국의 계단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홍문에서 시작해 정상부인 남천문까지 이어지는 약 7시간의 코스는 온통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략 7,000에서 7,800개 사이의 계단이 있다고 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태산 여행을 준비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 점은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단한 체력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대륙의 소황제와 자본주의 풍경

계단을 오르며 바라보는 중국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섭니다. 길가 곳곳에는 앞서 말했던 지팡이와 물, 음료를 파는 상점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상의를 탈의한 중국 어린이가 땀을 흘리며 걸어가는 모습에서는 이질적인 중국의 기세가 느껴집니다.

너희 죽은 거 아니지??


우리는 부지런히 오르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 태산의 동물들은 돌 위에 몸을 뉘이고 있습니다. 순간 죽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평온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곳이 삶의 터전인 그들에게는 늘어져 있는 것이 하루의 과업인 듯합니다. 부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등산로가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곳곳에 설치된 수많은 쓰레기통과, 그 쓰레기를 매일같이 짊어지고 내려오는 직원분들 덕분이었습니다. 사람도 숨이 찰 만큼 가파른 길인데, 거대한 포대를 메고 묵묵히 내려가는 모습을 보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풍경을 바라보며 계단을 오르기를 약 한 시간 반, 드디어 해발 약 800미터 지점, 중간 기점인 중천문이 우리를 맞이해 줍니다.


무념무상으로 이겨내야 하는 남천문 등반

홍문에서 중천문까지는 대략 1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중천문에 올라서야 비로소 산의 정상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얼굴 부기도 초반에 비해 한 30%쯤은 빠진 것 같고, 그동안 쌓인 업보를 땀으로 내려보내는 느낌입니다. 중천문에서 잠시 쉬어가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직까지는 다들 괜찮아 보이지만, 남은 구간이 이른바 '마의 구간'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발걸음을 다시 옮깁니다. 오르막 벽면에는 붉은 글씨로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의 산을 오르다 보면 종종 마주하게 되는 익숙한 광경입니다.


산 중턱의 KFC는 참을 수 없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올라가던 중, 갑자기 눈앞에 KFC 간판이 나타납니다. 태산 중턱에 켄터키라니, 이건 상상도 못 했던 전개입니다. 우리는 태산엔 아무것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타이안 역 근처에서 먹을 걸 바리바리 싸 왔건만, 역시나 더 자본주의적인 중국입니다. 이미 2~3시간은 걸은 상태, 치킨의 유혹은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이걸 참아낼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유혹도 참아낼 수 있겠죠. 결국 우리는 KFC에서 주문을 쏟아내듯 해치우고, 다시 등산을 이어갑니다. 처음으로 깨어 있는 동물을 마주합니다. 눈을 반쯤 뜬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꼭, 옴팡지게 자다 일어난 표정입니다. 우리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이 친구는 온몸에서 평온함이 묻어나옵니다. 그 모습에 묘한 역설을 느낍니다.

십팔반… 이름 잘 지은거 같아요… 레알 천국의 계단



등반 시작 약 3시간 30분, 드디어 남천문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남천문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의 계단 경사도는 가히 예술입니다. 진짜 '천국의 계단'이란 이런 느낌일까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발을 옮기는데, 그 순간 눈앞에 나타난 표지판. “십팔판(十八盘)”이라고 한글로도 쓰여 있습니다. 길이 800미터, 수직 고도 400미터, 석돌 계단 1600개. 설명만 읽어도 난이도가 피부에 와닿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간은 생각이 사치입니다. 오직 무거워진 다리를 다음 계단으로 올리는 데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오를 수 없습니다.

여자친구 분께 잘하세요…


그 와중에 한 여성이 남자친구의 손을 끌며 이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 모습에 ‘신녀성’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칩니다. 오르면 오를수록 다리는 무거워지고, 머릿속 잡생각은 점점 사라집니다. 잡생각과 인생의 무게가 다리로 내려앉는 느낌. 그리고 또 한 번, 얼굴의 부기가 빠지며 날카로운 턱선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쯤 되면 등산은 체중 감량 프로그램이자 마음 수련입니다. 도저히 못 하겠다 싶은 순간, 서로를 응원하며 마지막 돌계단을 기어오르듯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천문. 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가 밀려옵니다. “그래, 이게 내가 등산을 하는 이유였지.” 그렇게 우리는 태산의 상징, 남천문을 통과합니다.

드디어 정상 입구인 남천문!!!

남천문을 통과한 시각은 오후 7시 16분경, 홍문에서 출발한 시간이 오후 2시 30분쯤이었으니 대략 5시간 정도를 등반한 셈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구간은 7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지만, 모두 사전에 체력 훈련을 열심히 해 온 덕분인지 휴식도 짧게, 페이스도 빠르게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잠깐 숨을 고르며 남천문에 대한 설명이 적힌 표지판을 바라보다가, 영화 속 명대사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를 떠올리며 장난을 쳐봅니다. 체력도 회복되고, 농담이 나올 만큼 여유도 생긴 순간입니다. 남천문을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함께 걸어온 길을 떠올리며 서로의 노고를 격려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keyword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