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꼭 내 아이가 재능이 있어야 하는가. 재능없는 아이도 있어야 현실적이
“엄마 재능이 뭐에요?
“하느님이 주신 것, 태어날 때부터 주신거야. 태어나는 아가한테 가지고 세상에 나가라고 주시는 선물이야.”
“그럼 왜 저는 선물 안주셨어요.”
애석하게도 내 아이는 하느님에게 재능을 선물 받지 못했다.
모진 애미는 ‘자는 아이 옆에서도 말을 가리라’는 육아서의 바이블을 무시하고 늘 “우리 애는 무재능이야, 노재능, 재능이라곤 1도 없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갈 무렵, 자기는 무삼 모든 분야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엄마의 말이 무언지 감을 익히고 있었다.
첫 번째 무재능은 태권도였다.
대한민국이면 태권도, 남자는 태권이지.
구시대적 발상으로 똥 오줌 제대로 가리기 시작한 5세(나무라지말자, 아이는 일반적이지 않다. 늦게 가릴수 있다)에 나는 동네 태권도장에 아이를 끌고 갔다.
“도복이 공짜야”
“너는 무도인이야. 번개맨같아(당시 최고 인기 캐릭터는 EBS번개맨이었다)”
라는 감언이설로 아이를 꼬득이고
5세 아이는 유아체육을 시키라는 관장에게
“나는 돼지엄마다. 몸매가 돼지이기도 하지만 입김이 세고 아이들을 끌고올 자신이 있으니 내 아이는 태권도로 편입해다오”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태권도에 입성했다.
동네 아이중 가장 빨리 태권도를 시작한 내 아이는 빠른 기세로 띠를 갱신하기 시작했다.
흰띠 흰띠 흰띠 흰띠, 노랑노랑노랑노랑, 무려 십팔단계도 넘는 띠의 향연을 시작했다.
내 아이가 느리다고는 단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동네 최연소 태권소년은 잘때도 도복을 입을 정도로 태권도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7세가 됐다. 유행처럼 번진 태권열풍에 동네 아이들의 대부분이 태권도에 등록했다.
이미 빨강띠 소지자인 7세 최고봉 무도인인 내 아들은 또래를 줄 세우고 기합을 넣어가며
태권능력자로 자리매김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동년배 친구들은 흰띠, 파랑띠, 갈색띠, 신라시대의 골품제도와도 같이 단단하다는 그 띠의 십팔단계를 사뿐히 즈려밟고 빠르게 월띠 하기 시작했다.
7세 막바지에 동네 친구들과 함께간 국기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가문의 영광인 만큼 삼촌과 친지들까지 초청한 그 자리에서 수백명에 이르는 1품 승급심사에서 우리 아이는 단연 튀었다.
정말 수백명의 아이 중 유독 못했다. 눈에 띄게 못했다.
도련님은 한숨을 쉬며 ‘형수가 왜이렇게 빡쳐하는지 알겠다’고 말해 나의 불타는 가슴에 등유를 콸콸콸~
이렇게 태권도의 무재능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3품까지 무삼히 아이를 독려하며 태권도에만 6년을 쏟아부었다.
가장 오래된 도장의 터줏대감이지만 대회에 한번도 나가지 못한 내 아이는 배운지 1년만에 구 대회에서 상을 받은 다른 친구들을 보고 질문했다.
“왜 하느님은 나한테는 재능을 안주셨어요?”
두 번째는 인라인이었다.
‘남자는 바퀴지’.
매주 바퀴를 둘러매고 아이와 씨름한지 4년차에 선생님은 절필을 선언하는 소설가처럼
절바퀴(?)를 선언하시며 은근히 선수반 입성을 원하는 나에게 단호하게
인라인은 취미로 하자고 권유하셨다.
세 번째는 피아노였다.
분명히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한번도 안쉬고 5년을 다녔는데 더 이상의 언급은 생략하겠다.
그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다. 바이올린, 그림..등등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취미를 권유했다.
오해는 마시라.
1~2년 해보고 결정한 것도 아니며 심지어
피아노, 바이올린, 그림 모두 지금까지 그만두지 않고 ‘취 미 로’ 하고 있다.
그리고 내 아이는 수영을 시작했다.
그나마 두각을 나타냈던 종목이었다.
그런데 수영 실력에서 두각이라기 보다는
수영 강사들이 내 아이의 출중한 신체조건에 주목했다.
수영에서는 또래보다 큰 키가 재능이라고 말하는 선생님에게 꽂힌 나는
수영 선수가 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선생님의 자기의 말을 저주하고 있을지언정 나는 열성적으로 아이와 수영을 했다.
월수금 반에서 화목반까지 등록하며 매일 수영을 가자
선생님은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말던 큰 키는 재능이니까, 큰 발은 재능이니까.
처음 교육장 대회에 출전하겠다고 말했을 때 선생님은 크게 놀랐다.
‘경험삼아 가보세요’라는 그의 말은 뒤로 하고
매달권 진입을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나를 만류햇다.
‘저 런’ 아이가 나가는 대회가 아니라고
스타트대에 서보지도 않은 아이들은 출발 신호에 놀라 물에 떨어진다고...
물에서 건져나오는 애들을 숱하게 봤다고...
빨래가 될지언정 도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스타트 연습을 할 수 있는 강사를 찾아 라인을 잡고 스타트 연습을 따로 했다.
대망의 대회날 내 아이는 교육장대회를 첫 대회경험으로 삼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구청장배 등 작은 사설대회가 많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런 곳에서 대회 경험을 쌓고 교육장 대회를 나가는 모양이었다.
알리없는 나는 첫 대회로 교육장을 선택했다.
첫 대회에서 50미터를 처음으로 가 보는 내 아이는 라인의 길이에 놀라고
무수한 관중이 응원하는 소리에 기가 질렸다.
나는 아이에게 계속 말했다.
“이거였어. 하느님이 너에게 주신 재능이 수영이었어. 처음 주신 재능이니까 우리 진짜 잘해보자. 끝까지만 가면 돼. 끝까지만 가면 성공이야”
한 여름 한국체육고등학교의 50미터 수영장은 진공상태의 찜통더위였고
처음 경험하는 대회에서 내 아이와 나는 ‘완주’를 목표로 삼았다.
스타트대 위에 내 아이가 섰을 때 나는 주저앉앗다.
‘내 욕심이 저 아이를 저 높은 곳에 올려놨구나’
출발 부져가 울리고 내 아이는 예상대로 늦게 출발했다.
평영으로 25미터를 넘어설때까지 나는 내 아이의 경기를 보지 못했다.
무지한 나의 욕심 때문에 아이를 150m깊이 물속에 쳐 넣은 심정이었다.
눈물콧물을 흘리며 우는 바람에 내 아이의 경기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별안간 목소리를 높이는 남편덕에 정신이 들었다.
내 아이가 조에서 1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물속에서 달려가는 내 아이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작은 어깨를 부지런히 접어가며 평영으로 완주하려는 내 아이의 재능이 보였다.
내 아이의 재능은 ‘노력’이었다.
자기가 찾은 첫 번째 재능이라고 믿고 달려온 내 아이의 진짜 재능은 노력이었다.
내 아이는 첫 대회에서 조1등을 했다. 물론 전체에서는 3등.
수영을 제대로 시작한 지금 생각하면
교육장 대회는 작디 작은 대회이고
매번 대회를 나갈때마다 더 잘하는 친구를 만나게 되는
내 아이는 ‘우물안 개구리’라는 단어를 몸으로 채득하게 됐다.
저절로 겸손함을 배우게 되는 수영으로의 도전은
30초간의 짧은 경기로 등수가 갈리는 극한의 긴장감과
앞 종목을 망쳤어도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다음 종목에서 매달을 따는
극한의 마인드 컨트롤을 안겨줬다.
수영을 시작하고 내 아이는 저절로 인내심을 배웠다.
나이, 성별을 막론하고 선수반에서의 서열은 오로지 초로 결정된다.
29,30,31초 초대로 줄을 지어 한바퀴를 돌면서 자기 초를 지켜내지 못하면
푸쉬업을 하는 이 시스템은 내 아이에게 정직한 노력과, 극한의 인내심을 길러줬다.
여전히 전국에서는 열손가락에 들까말까한 등수지만
내 아이의 수영은, 내 아이의 인생 기록에서 첫 번째 재능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느님에게 받은 최고의 재능, 노력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