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부터 지금껏 버리지 못한 충동적 버릇이 하나 있다. 툭 하면 노트를 사는 버릇이다. 자랄 때는 어머니로 부터 노트를 다 쓰지도 않고 또 샀다고 꾸중을 듣곤 했는데 이젠 아내로 부터 같은 소리를 듣고 있다. 퇴근을 하니 아내는 그동안 사모은 크고 작은 나의 노트들을 쌓아두고는 버릴건지 말 건지 결정하라고 한다. 대부분의 노트가 면의 일부만 사용하고 공란이 많이 남은 노트들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왜 자꾸 쓸데없이 노트를 사느냐는 소리를 듣는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문구점만 가면 나도 모르게 노트코너를 서성이곤 하니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버릇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만년필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만년필 튜브를 채울때마다 잉크를 생각으로 바꾼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그게 어떤 느낌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이처럼 다른 것보다 문구류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어릴적엔 친구가 일제 샤프연필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모두의 부러움을 샀는데 지금은 너무도 다양한 필기구들이 필감을 뽐내는 세상이다. 나 역시 노트보단 덜하지만 필기구에 대한 욕심도 있다 보니 문구에 대해 한 지나친 집착을 반성하게 된다.
노트를 새로 구입하면 그 하얀면이 그렇게 매혹적일 수가 없다. 뭔가를 채워두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초등학교때는 온 나라가 물자절약 운동을 펼쳐 학생들의 노트도 반으로 접어 사용하게끔 권장했지만 요즘은 노트도 자유로운 생각의 흐름이 중요하다며 사치스럽다 싶을 정도로 면을 넓게 사용하라는 주장도 있다. 사실 노트 한 권을 다 채우기란 녹녹치가 않다. 예전엔 노트마다 제목을 따로 붙여 사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 권에다 이런저런 내용을 다 적어버린다. 분류를 한다는 자체가 성가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 종류는 늘 사용하는데 사무실 책상위에 놓아둔 업무용 대학노트와 늘 가지고 다니는 핸드북 스타일의 노트이다.
야구의 신이라는 김성근 감독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그는 늘 손바닥 크기만한 노트를 들고 다녔는데 선수들과 경기에 대한 꼼꼼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집에는 그간 기록했던 야구 노트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기록을 통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꼼꼼한 기록의 부작용도 없지는 않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때는 안종범 수석의 꼼꼼한 수첩기록이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고, 내가 알던 어떤 임원분은 평생을 기록하고 노트하는 것을 습관으로 했었는데 임원이된 후에는 기록을 잘 안남긴다기에 이유를 물으니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의사결정이 기록으로 남을까 싶어서라고 했다. 가끔 검찰 압수수색 관련 뉴스를 볼 때면 컴퓨터와 모든 기록물들을 상자에 가득 담아 가는 모습을 보는데 저걸 다 뒤지면 웬만한 증거는 다 튀어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노트를 사모으는 나의 고질병은 요즘엔 어느정도 고쳐지긴 했다. 그게 참 이상한 계기인데 헤밍웨이도 사용했다는 몰스킨이라는 노트를 사용하면서 부터이다. 일반 노트가격보다 가격이 서너배가 비싼데도 이게 무슨 허영인지 그 노트만 고집하게 된다. 국내 가격이 비싸 반 값으로 영국에서 직구하는데 배송까지 거의 한 달이 걸린다. 그럼에도 이 노트에 대한 이상한 집착성향은 내가 보기에도 특이하긴 하다. 그래도 일년에 두세 권 사용하는데 나를 위해 그 정도 투자는 하자라며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