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용범 Mar 09. 2021

116. 오늘만 생각한다면

별로 대단할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꾸준히 성실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의외로 공평해서 학창시절  자리에서 존재감 없이 지냈던 친구들도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무언가로 자기 밥벌이는 하고 있는 법이다. 강한 것이 살아 남는다는 말은 이제 살아 남은 것이 강한 것이라는 말로 바뀌는  같다. 결론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하찮은 바이러스 형태의 코로나도 처음에는 동물의 몸에서 살아가다 환경이 어려워지자 인간의 몸에서도   있게 변화하니 이처럼 강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명체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하겠다. 아니 살아남는다는 말이 너무 비장해 보이면 그냥 산다라고 해도 된다. 살아남는 것의 현재진행형이 산다는 것이니까.    

그러면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무엇일까.
 몸은 유기체로써 끊임없이 호흡하고 먹고 마셔야 한다.  기능이 원만하게 돌아가는 것이 산다는 것이다. 이는  몸이 살기 위해서는 공기든 음식이든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며 받아들인 것은 형태를 달리해 다시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산다는 것의 기본적인 형태이다.

호흡하는 공기야  노력없이 얻을  있지만 먹고 마시는 음식물은 내가 달리 구해야 한다. 원시시대로 돌아갔다면 직접 나무 위에 올라가 열매를 따거나 다른 동물이라도 잡아야 하지만  만년동안 지내오면서 인간의 일은 정말 세세하게 나누어졌고 개인은 전체 과정  일부에만 관여해도 먹거리는 해결되는 수준이 되었다. 이리보면 산다는  대단한  같지만 숨쉬고 먹고 마시는 것이다. 다만  좋은 것을 먹고  먹고  먹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는  가지  본능이 있다. 개체보존의 본능과 종족보존의 본능이다. 개체보존의 본능이 먹고 사는 일이라면 종족보존의 본능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히 살아가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리처드 도킨슨이 ‘이기적 유전자에서 언급한  처럼 인간의 몸이란 유전자를 운반하는 기계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독신이 늘어나거나 결혼해도 아이를 놓지 않는 경향은 인간의 본능  하나를 버린 것이라 여겨져  이상하긴 하다.

가끔 영상으로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의 사냥을 본다. 사자의 무리들이 사냥감을 먹고 있노라면 주위에는  하이에나나 독수리떼가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사자들이 배불리 먹고 나면 남은 고기는 그들의 몫이다. 사자는 자신의 사냥감에 대해  이상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은 다르다. 자신이 먹고 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굶주리는 같은 인간에게 선뜻 건네주기를 꺼린다.  그럴까를 생각해  적이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때문일거란 생각을 해보았다. 비록 오늘은 배불리 먹었지만 내일은 먹을  없을 수도 있으니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옆에서 굶어죽어가는 모습을 보더라도 내일의 나를 위해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의 사고회로 가운데 내일이라는 개념을 없애 버리면   평화롭고 살기좋은 세상이  것도 같다. 아니면 욕심이란 것을 버리지 못해 오늘  많이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살벌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내일이라는 개념 없이 오로지 오늘 하루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이 궁금하긴 하다. 생각난 김에 오늘   실험을   생각이다. 오직 오늘이라는 시간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이 어떨지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114. Are You Korea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