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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용범 Mar 14. 2021

121. 승부와 상관없다면

자신의 평생을 바쳐 한 가지 일에 전념했건만 어느 순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났을 때 느끼는 심경은 어떠할까. 그것도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 때문이라면 말이다. 가끔 이세돌 9단의 근황이 궁금하다. 그는 인공지능과의 바둑 대결에서 유일하게 1승을 거둔 인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국을 이기지는 못했다. 바둑은 흑백의 돌이 사각의 반상에서 치열하게 사활을 겨루는 승부의 세계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명확한 세계라는 것이다. 이세돌은 그 바둑의 세계에 12세부터 입단해 오직 한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이제 은퇴를 했지만 바둑은 그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했던 영역이었을 거다.  


가수 장기하는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산문집에서 인공지능을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어느 날 인공지능이 자신의 취향을 고려해 추천해 주는 음악을 들으며 너무도 일치한다고 여겨져 섬뜩함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이미 많은 작곡가들이 유료의 작곡가 사이트에 가입해 악기 소리, 비트, 수많은 샘플 등을 다운받아 작곡을 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면 머지않아 창작의 영역에서도 인공지능이 만든 결과물이 인간의 것을 능가하는 시대가 올 것 같아 음악 하는 자신의 우울한 속내를 드러냈다.


자, 이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나. 이세돌은 알파고에게 지고 나서 더 열심히 해서 알파고를 이기고 말겠다는 마음을 내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었다면 다시 한번 도전의 마음을 내었겠지만 자신과는 다른 영역에 있는 존재였기에 바둑의 세계에서는 인공지능이 최강자임을 인정하고 끝냈을 것이다. 그러면 이세돌은 바둑을 그만두어야 할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다른 관점에서 바둑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승부를 떠난 세계이며 순수한 바둑 그 자체의 세계이다.


인간에게는 돈벌이나 승부의 세계를 벗어나면 의외로 순순한 열정이나 재미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근대 과학의 거장 아이작 뉴턴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학적 업적을 칭송하자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평했다. 그는 자신을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조개껍질을 줍는 어린아이 정도에 비유하고 만다. 한 분야의 거장들은 자신이 탐구하는 어떤 세계를 알면 알수록 스스로가 대단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는 속성이 있는 것 같다.


장기하는 인공지능이 음악의 창작 분야에 까지 들어와 인간의 작곡과 편곡 능력을 초월할 날이 머지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한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는 그 상황을 자신이 좋아하는 서핑에 빗대어 이렇게 마무리했다.


‘서퍼는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먼지에 불과하다. 부표나 지푸라기와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서퍼는 바다 위에서 즐겁다. 바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면서도 작게나마 나름의 역할을 하며 재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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