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과제를 하며 인간의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운명이란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노력과 합리적 결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도 싶다. A.I. 와 로봇이 우리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온 세상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오늘의 운세를 보고 자신의 별자리와 사주팔자를 보고 있다.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일을 이룬 사람에게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었다고 하고 중간에 뜻이 꺾여 낙담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 또한 당신의 운명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제우스의 저주를 받은 시지프스가 있다. 그의 형벌은 언덕 아래에 있는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것인데 문제는 아주 힘겹게 정상에 올리고 나면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져 산 아래에 처박히고 만다는 것이다. 그의 형벌은 그 의미 없는 일을 영겁의 세월 동안 계속해야 할 운명이라는데 있다. 내가 시지프스가 되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이렇게 힘들여 올려봤자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지겠지.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정말 의미가 없는데 아, 정말 괴롭다’는 생각만 들 것 같다. 그런데 시지프스의 위대함은 힘겹게 올린 바위가 굴러 떨어진 상태에서 다시 그 바위를 올리기 위해 언덕을 터덜터덜 내려가는 그 발걸음에 있다. 그것이 그의 자유의지이다. 운명이 비록 정해진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바위를 다시 올리기 위해 내려가는 그 발걸음에서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운명이란 게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나의 삶을 수동적으로 살고 말 것인가. 그건 아니다.
2007년 12월 태안에서는 최악의 원유유출사고가 있었다. 아름다운 태안 바닷가가 순식간에 시꺼먼 기름때로 싸여 전문가들조차 생태회복에 수십 년이 걸릴 거란 절망적인 예상들만 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모두가 절망하던 그때 여학생들 몇몇이 쪼그리고 앉아 바닷가 바위의 기름때를 천으로 닦기 시작했다. 절망하고 분노하던 지역 사람들에게 그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저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의미가 있었다.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 일이 전국적인 자원봉사로 확대되고 생태복원까지 수십 년이 걸릴 거라던 바닷가는 이제 완벽한 복원을 이뤄내 국제환경단체로부터도 인정받는 아름다운 해안이 된 것이다. 누군가 그것이 운명이라고 할 때 인간의 자유의지는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극복하는 그 과정도 운명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운명을 대하는 인간의 위대함은 운명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내 할 일을 멈추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대학원의 과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작은 성찰의 시간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