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부산 부모님 댁을 갔다가 올라왔다. 80대의 연세에도 정신이 맑고 건강하심에 늘 감사한 마음이 크다. 나도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 탓인지 아버님의 모습을 뵈면 한 남자의 일생이 압축적으로 느껴져 마음이 짠해진다. 아버지의 당당하고 거칠 것 없어 보이던 젊은 시절 모습을 알고 있기에 검버섯과 주름진 얼굴을 한 왜소한 노인의 모습이 가끔은 낯설기 때문이다. 나도 저렇게 늙어 가겠구나 싶다. 두 분은 인생이 참 짧다는 말을 하시지만 그 짧은 인생 안에 많은 것들을 이룬 분이셨다. 대한민국의 80대 노인들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청소년기에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지금은 스마트 폰과 인공지능 시대라는 특이한 경험을 하고 계신 분들이다. 그분들의 자녀들이 386세대들이다. 독재타도를 외치며 정권에 돌멩이를 던지는 아들 딸들에게 너희들이 배를 곯아 봤냐며 호통치시던 분들이셨다. 386세대였던 그 아들도 이제 우리 사회에서 은퇴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어제는 아버님이 나에게 너무 빨리 은퇴한다는 말씀을 하시기에 아버님은 언제 은퇴하셨냐고 여쭈어 보았다. 헤아려 보니 거의 지금의 내 나이셨다. 둘이서 그냥 웃고 말았다. 당신의 자식들은 항상 어리게만 보이시나 보다.
그런데 어제의 부모님 댁 방문은 흐리고 비가 왔던 날씨 탓인지 좀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코로나 백신 접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두 분은 접종대상이 아니라고 하셨다. 몰랐었는데 백신 접종에도 나이의 상한선이 있었나 보다. 이제 죽어도 되는 나이라고 나라에서도 인정하나 보다고 하신다. 주변 친구들의 죽음은 일상이 되었고 작년에는 동생분까지 세상을 떠나시다 보니 이제 죽음에 대해서도 그리 낯설지 않으신 듯 보인다. 아내는 은퇴하고 나면 부모님 집에서 지내보면 어떠냐고 한다. 이제 살 날도 얼마 안 남으셨는데 큰 아들이 곁에서 함께 지내는 것도 두 분에게는 좋은 추억거리가 되실 거라는 말이었다. 일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 관직을 물러 날 때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곁에서 모신다는 핑계를 대기도 하던데 이건 자연스레 물러나는 셈이니 못할 것도 없겠다 싶다. 그러고 보니 내가 독립하여 두 분의 곁을 떠난지도 32년이 되었다. 당시 두 분은 50대로 지금의 내 나이셨는데 어느새 80대 노인들이 되고 말았다.
돌아오는 여정에 비행기를 탔다. 오랜만에 오르는 하늘길은 마음마저 산뜻했지만 아래에 짙은 구름들이 깔려 지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위로는 해가 떠 있고 아래로는 양털 같은 구름의 모습만 보인다. 지난 이틀간의 여정이 좀 담담했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 두 분의 모습에서 앞으로 다가올 나의 미래를 보아서일까.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2차 대전과 광복을 경험했고 한국전쟁을 겪으셨다. 굶는 것이 일상이었던 당신들의 배고픔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 했고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들 교육만큼은 시켜낸 분들이셨다. 다행히 살아생전에 이 나라의 당당한 모습을 보시는 게 마냥 좋으신지 감사할 일들이 참 많다고 하신다. 큰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은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지는 법이다. 어쩌면 내 부모님의 마음의 근육은 나보다 훨씬 강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