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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용범 Mar 27. 2021

134.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

아아 누구인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아는 그는


유치환의 <깃발> 중에서


그 나라 언어를 모르고 외국에 나가면 두려움과 답답함을 느낀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이방인이 되어 사람들과 간판, 주변의 눈치를 보는 어린아이가 되고 만다. 같은 말을 쓰고 문자를 공유한다는 것은 우리라는 동질감을 만들어 내지만 달리 보면 다른 무리들에 대해 배타성을 지니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과연 인간보다 침팬지의 지능이 못할까. 고정된 긴 유리관 안에 땅콩 한 알이 있다. 침팬지는 물을 부어 땅콩을 떠오르게 했지만 같은 나이의 인간 아이에게는 그런 지능이 없었다. 적어도 어릴 적 지능을 보면 인간이 침팬지보다 뛰어난 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지구상의 강자가 될 수 있었던가. 공감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엄마가 한 곳을 바라보고 손으로 가리키면 아이는 엄마와 눈을 마주치다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이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침팬지와 차별화된 능력이라고 한다. 주변의 동료가 연필칼에 베이면 그의 아픔이 나에게도 전해져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그 통증이 정말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게 공감능력이다. 이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같은 괴물이다.


올림픽 경기의 시상식을 볼 때면 드는 생각이 있다. 단지 천 조각이 하나 올라갈 뿐인데 왜 저들은 저토록 감격의 눈물을 짓고 있는가. 선수뿐만이 아니다. 관중석의 사람들도 TV를 보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허접한 천 조각이 깃발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천 조각이 아닌 것이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과 감정을 나누기는 비교적 쉽다. 눈을 마주하고 말도 하고 먹을 것을 함께 먹으며 감정을 나누면 된다. 하지만 모르는 낯선 사람들과는 어떻게 정서를 공유할 것인가. 여기에 상징이 개입된다. 천 조각에 무늬를 그려 공동체의 상징으로 정하기도 하고 막대기 두 개를 십자가로 만들어 영혼을 구원할 상징으로도 정한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이라는 것을 붙여 그의 상징으로 삼으며 원과 세 개의 막대를 구성하여 벤츠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상징은 그 자체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간들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전혀 다른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들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고 모두의 상징이 되어 힘이 생기는 과정들이 신기하다.


유치환 시인도 그것을 알아차렸나 보다. 허공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그는 이렇게 탄성을 짓는다.


아아 누구인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아는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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