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머님을 저 세상으로 보낸 후배가 있다. 빈소가 지방인 데다 코로나 상황이라 조문을 못했기에 차나 한 잔 하자며 불러냈다. 울적해 보이던 후배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니 어머님이 요양원에 3년 정도 계셨고 코로나 이후부터 방문도 허용되지 않아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을 휴대폰 영상으로 뵈었다고 한다. 현 상황에서 요양원의 노인들은 가족과의 만남도 제한되고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 게다가 임종 상황에서도 소수의 인원만 출입이 허용되어 한 인간이 세상을 떠나는데 가족들과 눈인사도 못하고 가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집으로 모셔오는 것도 여의치 않다. 자녀들도 모두 생업을 가진 상황이라 요양원에 갈 정도의 만성질환을 지닌 노인을 모셔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요양원은 현대판 고려장이 되고 말았다.
많은 노인들은 밤에 자다가 조용히 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고령의 노인들은 만성질환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치매까지 걸린 상태에서 돌아가신다. 각자의 생활에 바쁜 자식들에게 요양원은 부모를 떠맡기는 마지막 대안이기도 하다. 요양원을 가본 적이 있다. 지금도 노인들의 쾡한 눈을 마주한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분들에게 하루의 의미는 밥을 세 번 먹는 것외에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방금 본 사람도 누군지 자꾸 되묻기도 하고 떡 한 조각 때문에 옆의 노인과 심하게 다투기도 한다. 요양원에서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 하지만 거의 유치원 수준의 놀이 정도이다. 노인들은 그것을 따라 하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우리나라의 요양원은 자식들 대신 그들의 부모를 떠맡아 마지막까지 돌보는 시설이 되었다. 병원이라는 곳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여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 목적이지만 요양시설은 수용 그 자체가 목적이다.
아내는 비교적 활동적인 내가 늙어서 요양원에 있는 모습을 보면 참 불쌍할 것 같다며 인생 길지 않으니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것 많이 하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나는 기분이 좀 묘하다. 하고 싶은 것 많이 하라고 하니 좋긴 한데 노후를 요양원에서 보낸다는 생각은 안 해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그 또한 현실적인 이야기다. 내가 80-90대 노인이 되었을 때 나의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어디 있으며 내 정신은 여전히 맑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엉뚱한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종교 지도자들도 인간이니 질병의 위험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만일 김수환 추기경이나 성철 스님 같은 분들이 말년에 심한 치매를 앓고 있고 횡설수설하는 말들을 쏟아낸다면 대중은 그분들이 평생 펼친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실제로 수년 전 어느 스님에게 비슷한 내용을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 스님의 답변은 명쾌했다.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보는 것이라며 그의 과거 가르침이 과거도 옳았고 현재도 옳다면 지금 하는 소리는 헛소리로 보면 된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결국 한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나도 나이 들면 어느 요양원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치매에 걸려 횡설수설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양원의 그 노인들처럼 떡 한 조각으로 옆의 노인과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때의 문제이다. 그 노인은 지금의 나와는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이다. 지금의 나는 지금의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을 살아야 한다. 내가 존재하면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니 말이다. 현존(現存)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