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이라는 소주가 있다. 이름과 글자체를 신영복 교수가 지었다 해서 유명해진 소주이다. 처음처럼이란 말은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첫 마음을 계속 이어간다는 다짐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인데 그만큼 첫 마음을 지속시키기 어렵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딸아이가 컴퓨터 코딩을 배운다고 했을 때 만만치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있었다. 대학시절 코딩을 접한 적이 있었기에 그 과정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배운 프로그램 언어는 포트란과 베이직으로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봄직한 언어이다.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게 문제 해결의 짜릿함도 있지만 들어 갈수록 늪속을 헤매는 것 같아 일찌감치 때려치운 경험이 있다. 그래서 처음 코딩을 대하는 아이의 의욕을 보고는 얼마나 갈까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는 퇴근을 하니 딸아이가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표정으로 코딩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주위 사람들은 웬만큼 알고 있는 것 같고 강사는 평균 수준에 맞추어 진도를 빼는데 수업 따라가기가 힘들다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너무 풀이 죽은 모습이라 약간의 조언을 해 주었다.
첫째, 일단 잘하려는 생각을 내려놓을 것
무언가를 할 때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그들을 비교대상으로 삼으면 처음의 순수했던 의욕과는 달리 스스로 스트레스 주는 일이 되고 만다. 게다가 처음 배워보는 코딩을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는가. 뭔가를 길게 오래 하려면 일단 잘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둘째, 반복해서 그 수업을 들어도 됨
학원 수업의 장점은 정해진 기간 안에 진도를 빼주는 것만은 확실하니 처음 수업 듣고 이해가 안 되면 다시 한번 더 듣는 방법도 있다. 두 번 듣게 되면 처음보다는 이해가 빠를 것이고 두 번 들어도 좀 부족하다 싶으면 세 번 들으면 더 이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는 것인데 배움에 대한 처음의 호기심만 유지된다면 시간이 걸린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라고 했다.
셋째, 지금의 진도부터 시작할 것
학창 시절 헌 책방에 가보면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이라는 대입의 바이블 같은 책을 보게 된다. 헌책방에 있는 대부분의 책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앞에는 밑줄도 그어져 있고 열심히 한 흔적이 있지만 뒤로 갈수록 하얀 면이 많다. 아이가 이해가 안 되었던 앞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이미 배운 것을 복습하고 현재의 진도와 병행한다기에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공부량이 많아져 또 한 번 실망하기 쉽다. 그냥 지금의 진도에 맞게 예습과 복습 위주로 따라간다는 생각으로 가는 게 현명하다고 했다. 지나친 기대나 의욕은 실망을 안겨 준다. 게다가 뒤로 갈수록 앞부분은 자연스레 이해되는 면도 있으니 처음부터 다시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였다.
내 이야기를 듣던 아이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진 것 같다. 생소한 분야에 처음 발을 들이는 마음은 설렘이 있지만 점점 알아 갈수록 ‘이 길이 아닌가 보다’라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때 중요한 것이 조급함을 버리는 것이다. 배운다는 즐거움을 유지하는데 가장 큰 장애 요소가 조급함이다. 딸아이가 코딩 공부를 얼마나 지속할지는 모르겠다. 설령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이 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도 의미 있다고 본다. 내가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