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장생활의 3분의 2를 지방에서 보내고 뒤늦게 서울에 올라온 경우이다. 지방 근무에 비해 역시 서울이구나 싶을 때가 주변에 명문대나 유학파가 꽤 있음을 알게 될 때이다. 그중에는 지방에서는 눈에 안 띄던 서울대 출신의 직원들도 가끔 보인다. 자연스레 그들에게는 관심이 쏠리는데 학창 시절 공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학교의 스타들인 전교 1,2등의 귀착점은 늘 서울대였고 그 학교에 합격한다는 것은 수험생이나 학부모들의 큰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이력은 그들의 직장 생활에서도 주변의 주목을 받는 면이 있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서울대 출신 직원들과 근무하며 느낀 점이 몇 가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하고 일은 평균 이상으로 하지만 상사의 말일지라도 지적을 잘 수용하지 않는 면이 있다. 특히 주변 직원들과의 사교성은 좀 떨어지는 것 같고 일을 역동적으로 수행하기보다는 좌고우면 하는 시간이 많아 답답함도 좀 느꼈다. 다만 그들에게 별다른 간섭 없이 자율권을 최대한 부여하고 기한을 정해 결과를 요구하면 오히려 그게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았다.
엊그제는 우수 사원으로 선정된 서울대 그것도 법대 출신의 직원이 저녁을 쏜다기에 코로나 시국이라 4명이 조를 맞추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마주 앉은 그에게 대체 공부를 어떻게 했기에 서울대 법대를 들어갔느냐고 물었다. 그 자리에는 올해 고3의 딸을 둔 아버지도 있었기에 그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겠다는 듯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수줍은 듯 그냥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통독을 많이 했다고 한다. 시중의 모의고사 문제집을 모두 사서 여러 번 풀어보니 시험의 패턴이 잡히고 그게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 것 같다는 말이었다. 책을 좀 읽는 나로서는 좀 깊이 있는 질문을 했다. 통독이란 게 밑줄 그어가며 읽는 식이냐고 하니 그게 아니라 그냥 눈으로 읽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자기도 밑줄 그어가며 읽었는데 나중에는 그 밑줄이 책의 대부분을 긋는 것 같아 중단했다며 단 밑줄을 딱 한 번 긋는데 책의 첫 구절이나 제목에 밑줄을 긋는다고 했다. 다른 뜻은 아니고 무엇에 대해 알아보자는 스스로의 목표를 정하는 의미라고 했다.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두 번 읽으면 좀 더 잘 알게 되고 반복 횟수가 많아지면 더 알게 되는 식이었다. 결국 책을 끝까지 여러 번 읽었다는 의미였다.
지난주에는 전직 차관 출신의 사외이사를 만날 일이 있었다. 몇 가지 보고를 드리며 은연중 느낀 점은 과거의 영광에 상당 부분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서울대를 나왔 건 전직 차관 출신이 건 과거의 영광에 오래 머물면 현재가 불만족스러울 것 같다. 예전에 서울대 출신의 직원이 늦게 소주 한 잔 하며 했던 말이 있었다. “예전에는 주어진 일만 잘 해내면 늘 칭찬받고 다음 자리는 주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중년에 넘어오면서 이게 아닌데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혼란스럽기도 해요.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걸로 치면 적어도 이 자리보다는 좀 더 잘 되어 있어야 하는데.” 나도 술이 취해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대강 이런 이야기를 해 준 것 같다. ‘일을 잘한다는 판단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장 생활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니 그런 데서 뭔가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직장생활을 30년 정도 해보니 인생은 서울대를 나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더라는 것이다. 오히려 서울대 출신이라는 게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면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나의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