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주변 나라들을 생각하면 강한 자는 전략이 필요 없다는 걸 느낀다. 그들은 하고자 하는 대로 상대에게 강요하면 된다. 하지만 약한 자에게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국은 OLED, QLED 디스플레이 기술이 세계 제일이다. 그런데 업계에서는 이들 기술유출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 같다. 바로 중국 때문이다. 그들은 넘쳐나는 자금력으로 기술자들에게 10배가 넘는 임금 수준을 제시하며 이직을 권하는가 보다.
일제시대 종군 위안부 문제로 인한 한일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이슈화 된 시점은 한국의 국력 수준과 무관하지 않다. 적어도 70년대나 80년대에 종군 위안부 문제로 한일 간 갈등을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에 더 많은 차관을 요구하였고 옆집 딸이 일본 에 시집간다고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 남자들에게 시집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은 국제사회에서 더 통용되는 말이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우리는 대만에 일방적인 국교 단절을 통보했었다. 중국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그 전에는 같은 반공국가로서 형제라는 단어까지 쓰던 양국이었다. 당시 한국에 있던 대만 유학생들은 우리의 조치에 항의하며 형제국가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고 눈물의 시위를 벌였었다.
어릴 적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교내에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상황에서 보낸 50-60대는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하는 사고를 체득하며 성장하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분단 상황에서 한반도 주변에는 면적으로 치면 남한보다 100배 큰 중국과 140배 더 큰 러시아가 있고 한때 2차 대전을 일으켜 중국과 동남아까지 진출해 제국의 꿈을 가졌던 경제대국 일본이 있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대한민국이 버틸 수 있었던 힘은 개인보다 가족이나, 회사, 국가를 우선하는 공동체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 의식 저변에는 같은 말과 글을 쓰는 민족이라는 유대감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공동체 의식은 우리의 중요한 핵심 전략자산이었다.
요즘 조금 혼란스러운 것이 있는데 개인과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다. 우리라는 의식이 자리 잡으려면 구성원들 수준이 비슷하거나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도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 평범한 회사원이 재벌 회장과 손을 잡고 우리 한 번 잘해보자라는 말은 어째 좀 이상하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공동체들은 지금 위기에 빠진 것 같다. 그것은 가족, 회사, 국가를 포함한다. 가장 큰 이유로는 구성원 간 격차가 심화되고 있어서다. 세대차이, 소득격차, 계약직과 정규직, 성별 차이, 서울과 지방의 차이 등 우리의 공동체 속에는 정말 많은 차이들이 산재해 있고 그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개인이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없다면 중국에서 10배의 임금을 더 준다는데 안 갈 이유가 무엇인가. 넘사벽의 차이가 무서운 이유는 그로 인해 차별이 일어나고 차별이 심한 공동체는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것은 곧 국가의 위기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해도 괜찮다는 식의 헤게모니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지금은 개인과 공동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한 시기이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없어진 개인이 굳이 공동체를 위해 역할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제 우리 사회의 개인들은 너무 똑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