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타인이 있을까.자신의 배우자나 부모라고 해도 한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면에서 인간의 외로움은 본질적인 외로움이다. 이를 ‘존재적 외로움’ 또는 ‘실존적 고독’이라고 하는가 보다. 어떤 이는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 속에 머물기도 하고 알콜이나 유흥에도 빠지지만 인간의 존재적 외로움은 그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더 이상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이해 받기를 기대하지 않을 때 잠자던 자유로운 영혼이 꿈틀댄다. 이제부터는 그를 둘러싼 틀에서 점점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나는 자연인이다’ 처럼 사는가 하면 꼭 그런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얽매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부터 벗어나 자신을 남 보듯이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어차피 모두에게 이해받기가 불가능한 수준이라면 그냥 나라도 이해시키는 편이 낫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은 항상 홀로 서 있는 인간이다.’라고 극작가 입센은 말했지만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감옥이 아니라 울타리인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문이 있어서다. 그 울타리라는 것은 관습, 법률, 상식 등 규범의 틀도 있지만 가족, 회사, 조직 등 관계의 틀도 있다. 이 강력한 틀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예측가능한 오차 범위내에서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20대는 취업을 해야 하고 30대는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해야 하고 40대는 뭘 해야 하고 등등 보이지 않는 세상관념의 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존재적 외로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 좀 자유롭기로 했으면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산다.’는 말들을 한다. 이것도 생각해 볼 문제인데 주변 여건들은 개인이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방법이 없지는 않다. 스파이나 게릴라가 되는거다. 옆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사회적 규범에 맞추어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직장은 내가 시간과 노동을 제공한 댓가로 돈을 주는 곳이라 정의하고 선을 그어 두는 것이다. 그 이외 시간들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하며 경험의 영역을 넓혀가는 거다. 이것을 한 마디로 ‘안정된 자유’라고 표현해 본다. 처음 내 블로그 이름이 ‘안정된 자유인’ 이었던 이유다. 하지만 이것도 다 개인의 행복을 지향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행복한 자유인”이라고 고치긴 했다.
안정을 포기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거기에 머물지도 않는다. 어쩌면 내 삶의 지향점은 ‘자유를 통한 행복 누리기’ 정도로 정의해 본다. “나의 자유로움을 그들이 모르게 하라!” 세상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을 곱게 보지 않는다. 그러니 조용히 혼자서 누려라. 그 영혼의 자유로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