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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먼저 명함부터 만들다

by 장용범

명함을 하나 만들었다. 회사의 명함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새로운 직업의 이름을 명함에다 넣었다. ‘출판 에이전트 OOO’ , 5월 초까지 들었던 ‘외서기획’ 강의로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직업의 세계를 알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출판 에이전트’ 또는 ‘저작권 에이전트’의 세계였다. 전 세계의 책을 서칭하고 그것을 번역해 국내서 출판하거나 국내 저자의 책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해외에서 출판한다. 아니면 국내에서 책을 내고자 하는 사람의 책을 출판한다. 그렇다고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기획이란 업무가 낯설지도 않아 어떤 끌림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내년 말이 은퇴인데 이참에 회사를 하나 만들어 볼까라는 재미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획이란 업무는 직장생활 동안 시장개척, 프로모션, 이해 관계자들을 조율하는 작업 등 익숙한 영역의 업무였다. 분야만 다르지 그 흐름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은퇴 후에 하려는 일이 글쓰고 여행하고 책 읽는 일인데 출판 기획이라는 직종과 크게 벗어나지도 않아 보인다. ‘외서기획’ 강의를 들으며 받아든 강사의 명함이 ‘저작권 에이전트’였다. 적어도 이 세계는 파고들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럼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엉뚱하게도 명함을 하나 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내가 하는 일을 대외에 선언하는 의미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명함 파는 것은 너무도 간단했다. ‘오 마이 프린트’라는 인쇄 관련 앱을 휴대폰에 설치 하니 기본 디자인이 여럿 나온다. 그 중 하나를 골라 텍스트만 바꿔 주면 끝이다. 지난 30여년 간 나를 규정했던 회사의 명함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내 명함을 하나 디자인 해 본 것이다. ‘출판 에이전트 OOO’ 나의 직업을 이름앞에 새기니 뭔가 허전하다. ‘아, 회사 이름이 없어 그렇구나’ 그렇다면 회사 이름을 하나 만들어야 겠다. 뭘로 할까 고민하다 그냥 ‘글 쓰는 사람들’이라 정해 본다. ‘배달의 민족’, ‘용감한 형제들’ 처럼 요즘 트랜디한 회사 이름을 본떠 만들어 보았다. 그렇게 나는 명함상으로 출판 에이전시 ‘글 쓰는 사람들’의 대표가 되었다. 회사의 형태는 차차 고민해 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나중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의논해 볼 일이다. 아직은 이름 뿐인 회사지만 서서히 채워 나가면 될 일이다.


자, 이제 나의 직업과 회사 이름을 정해 명함에 넣었으니 뭔가를 해야 한다. 우선 출판 마케팅과 기존 시장에 관해 배우자.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사업 설명회를 열어 회사의 실체를 만들어 가고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시장과 마케팅의 가능성을 구상하고 시장에서 테스트해 보자. 회사를 만들어 사람을 모으는 게 아니라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관련 작업을 하다 보니 새로운 일을 도모하게 되었고 그러면 우리 회사를 하나 만들어 볼까로 발전하는 역발상의 프로세스이다.


몇 가지 여건 덕분에 나는 스타트업 하기에 꽤나 괜찮은 조건을 갖춘 것 같다. 우선 인생 2막의 은퇴가 얼마 안 남았다(1막은 사회진출 준비기간이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감 같은 것도 없는데 그동안 꾸준히 불입했던 연금이 나올테니 그 안에서 어떻게든 생활은 될 것이다. 그런데 은퇴 후 남은 30여년의 시간을 글쓰고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지만 뭔가 재미도 있고 의미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 늦게 글쓰기에 재미를 들여 문예창작 대학원엘 진학했는데 내 직장 경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영업 마케팅과 접목할 부분이 의외로 많아 보인다. 돈은 천천히 벌려도 좋다는 느긋함이 있으니 그간 함께 글을 썼던 동아리 회원들과 계속 교류도 하고 사업을 하는 그런 구상을 가져 보았다. 대학원은 학기가 끝나면 졸업이지만 이렇게 사업체를 세워 목적성 있게 운영 한다면 재미와 의미를 갖춘 작업이 될 것 같아서다.


또 일을 하나 벌여 볼 참이다. 보통 준비가 되고서 명함을 파는데 명함을 파고 준비를 하는 거꾸로 프로세스로 진행해 본다. 이것저것 점점 할 일이 늘어나고 있어 흥미롭다. 먼저 지른다. 그리고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내용을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