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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상실의 아픔에 대하여

by 장용범

살다 보면 얻는 것도 있지만 상실의 아픔을 겪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은 손실회피편향이라는 것이 있어 얻은 것의 가치보다 잃어버린 것의 가치를 더 크게 느끼게끔 되어 있다. 우리는 긍정적인 일보다 부정적인 일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만있으면 2등은 한다는 말도 있듯이 무언가를 하려고 시도하다 잘 되면 다행이지만 안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애초부터 시도하지 않는 것으로 선택하게 된다. 조직 내에서 아무리 적극적으로 도전하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를 두고 수만 년동안 진화되어 온 인간의 합리적인 감정 선택이라고 한다. 원시인이라면 처음 마주한 대상에 대해서는 경계심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을 내는 것이 살아남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맛있게 생긴 버섯을 보고서 먹고 죽을지도 몰라라며 경계했던 사람들이 맛있을 거야 라며 덥석 먹었던 사람보다는 생존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화생물학자들은 현대인들을 아스팔트 위의 원시인이라 부른다. 현대와 같은 물질문명의 발전은 불과 수백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수만 년에 걸쳐 진화되어 왔기에 환경을 대하는 인간 마음의 부조화는 어쩔 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상실의 경험은 왜 아프게 느껴지는가? 이건 좀 더 깊숙이 들어간 인간 마음의 탐구이다. 머리로는 언젠가 떠나리라는 것을 알지만 막상 이별을 맞이하게 되면 낯선 경험이 되어 슬픔이 봇물 터지듯 밀려온다. 이를 두고 한용운은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 이렇게 적절히 표현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상실의 아픔을 표현한 시이다. 몸이 아픈 사람이 통증의 원인을 안다면 적어도 해결의 가능성이 보인다. 심리적 상실의 경험도 그러하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은 나의 잘잘못 여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집착에서 온다.’ 혼자 사는 어떤 여인이 15년간 키웠던 애완견을 잃고서 느끼는 상실의 아픔에 대해 법륜 스님은 그 원인을 ‘집착’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아픔은 인간의 망각 기능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테지만 지금 당장 괜찮아지려면 대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방법도 있다고 하셨다.


범부 중생에게는 알면서도 잘 안 되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왜 집착을 하는가? 좋으니까 집착한다. 사람들은 왜 상실의 아픔을 겪는가? 좋은 것을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 집착을 내려놓는가? 과거의 것보다 더 좋은 집착의 대상을 만났을 때이거나 집착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세상에는 집착할 만한 대상이 없다는 것까지 받아들인다면 그는 깨달은 사람이 되어 세상을 허허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