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에 천주교 성지가 있다. 정식 명칭은 서소문 역사공원이지만 구한말 많은 천주교인들이 그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아 참수를 당했다는 으스스한 곳이다. 오후 무렵 머리도 묵직해서 바람이나 쐴 겸 그 공원을 거닐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순교비 앞에 발길이 멎었다. 참 많은 이름들이 순교비에 새겨져 있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목숨일 텐데 저들에게 그 귀한 목숨마저 버리게 한 믿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냥 십자가만 밟고 지나가도 살려주겠다는데 차마 그것을 하지 못해 자신의 목이 달아났던 사람들이다.
자신의 신념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평소에는 먹고사는 것에 급급했던 인간이라도 한 번 자신의 신념이 바뀌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다른 동물의 세계에서 신념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종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믿음이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사의 여러 갈등 가운데 종교 갈등만큼 심각한 것도 없나 보다. 너와 내가 믿음이 다르니 너는 나의 적이라는 논리. 제대로 된 종교라면 창시자가 그렇게 옹졸한 마음을 내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추종자들은 너와 나의 편을 갈라 저토록 철저하게 배척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자신의 믿음이나 신념을 스스로 의심하기란 쉽지 않다. 의심은커녕 주위에서 아무리 그거 잘못되었다고 해도 믿음은 더욱 강화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수용하기 힘든 믿음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위험한 존재다. 자신만이 올바르고 주변은 모두 그릇되었다는 맹신에라도 빠지게 되면 그가 어떤 험악한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서소문 역사공원의 순교비를 보며 금지된 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국가가 저지른 엄청난 폭력도 느꼈지만 고결한 믿음과 맹신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