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집을 나와 이제 막 문을 연 카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과제도 할 겸 가능하면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평소와는 달리 시청 주변 중심가로 들어갔다. 주중에는 꽤나 번잡한 곳이지만 주말에는 오히려 조용한 곳임을 알고 있었다. 한참을 과제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 무렵이 되었다. 문득 생각나는 벗이 있어 연락을 취했다.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친구, 나 지금 지리산이야. 지금 제다 작업(차를 만드는 작업)하고 있어”라고 하기에 오늘 보기는 어렵겠다 여겼는데 “마무리 중이니까 서울에 가면 한 다섯 시쯤 볼 수 있겠다”라고 했다. 때가 점심때인데 지리산에서 출발해 다섯 시에 볼 수 있겠다는 말이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약속을 잡았다.
오후에 집에 들러 피곤함에 못 이겨 잠시 잠이 들었다. 어느덧 시간이 다섯 시가 되고 있어 연락을 취하니 벌써 서울이라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구례에서 KTX를 타고 올라오는 상황이라 충분히 다섯 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제야 KTX가 구례까지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정도면 서울과 지리산도 멀다고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자주 만나는 신촌의 찻집 ‘라오 상하이’에서 보기로 했다. 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첫 발을 들인 곳이니 이 곳에 출입 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나중에는 라오반(사장)이 ROTC 후배임을 알게 되어 더욱 친근해진 곳이기도 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할리 오토바이 모임을 이끄는 고향 선배님으로 일찍이 면을 텄던 분이었다. 오랜만에 선배님과 함께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친구가 다른 일행과 함께 왔다. 누군가 궁금했는데 나와 잘 맞을 것 같아 소개할 겸 데리고 왔다고 했다. 라오반은 오랜만에 온 나와 친구를 위해 최근 운남에서 들여온 차를 선보인다. 홍차, 숙차, 생차까지 마시고 나니 배가 꿀렁거릴 정도였다.
저녁은 내가 내기로 하고 배달 주문을 했다. 찻집의 별실에서 중국음식과 고량주를 시켜 오랜만에 만남의 회포를 풀었다. 암벽 등반을 한다는 새로 소개받은 벗도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니 더욱 각별해졌다. 이렇듯 취향이 같은 사람들은 빨리 친해지는 면이 있다. 생각난 김에 경주의 스님에게 안부 인사차 연락을 드렸다. 해인사에서 불교 관련 모임을 마치고 경주로 가는 길이라며 우리네 모임을 내심 부러워하셨다. 6월 중 친구와 함께 경주에 내려가기로 하고 통화를 끝낸다. 어느 정도 손님들이 뜸해지자 라오반도 합류하니 흥이 더해진다. 초저녁부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며 좋은 벗들과 맛난 음식, 차와 술 그리고 라오반의 대금 소리까지 흘러드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일요일의 저녁이 지나갔다.
주) 2017년 중국 운남 트레킹으로 맺어진 인연들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