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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감동 할 수 있는 능력

by 장용범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의 무게는 달라진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인공지능이 했다고 치자.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이 이 말을 인용하면서 출처를 ‘인공지능 알파고’ 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느낌이 들 것인가. 전 세계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딥러닝이라는 기술로 순식간에 처리하는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이기에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뛰어난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별 감흥이 안 생기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의 결과라기 보다는 여러 빅데이터 속에 찾아낸 정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인공지능과 인간의 능력 겨루기 같은 게임은 의미가 없다. 결과가 이미 나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공지능의 데이터 처리 능력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영역에서 경쟁을 한다는 건 확고한 어떤 이유가 없는 한 어리석은 짓이다. 이제 우리는 감성과 감동의 영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 하고 아름다운 대상을 보며 감동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인공지능이 따라 올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라고 봐야 한다.


어쩌면 지금의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여유롭고 풍요로운 시대일지도 모른다. 배분의 문제이지 먹거리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전 인류를 덮쳐도 1년 안에 백신을 만들어 내는 의학기술도 가지고 있다. 나노공학이라고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적용될 기술을 개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은 신기하다는 정도이지 감동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오히려 거친 숨결을 몰아쉬며 산을 오르다가 바위 틈에서 보게 되는 한 포기 들꽃이 더 감동스러울지도 모른다. 이렇듯 신기하다는 것과 감동스럽다는 것은 분명 다른 영역이다.


‘내가 못 갚은 닭 한 마리 빚을 갚아주게’라는 말을 일상에서 들었다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당장 마셔야 할 독배를 손에 든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하면 좀 달리 느껴진다. 사이코패스가 무서운 이유는 정서적인 공감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보면 인공지능은 싸이코패스의 끝판왕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분야에만 힘을 쏟았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는 인간의 감정마저 뇌에서 일어나는 신경의 작용으로 보고 분석하는 작업까지 하고 있다. 마음이란 뇌 속에 있고 사랑이란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정의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건 웬지 재미 없어 보인다.


그런데 감동하는 것도 연습이 좀 필요하다. 감동은 정서적인 영역인데 연습이 뭐가 필요하냐고 하겠지만 좋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좋은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주 접하고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감동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예술가의 표현 감성이 필요하다. 글과 사진, 그림과 음악 등 어떤 것이든 좋다. 그것이 미래사회 인간의 경쟁력이다. 인공지능은 감동하지 못한다. 오늘 내가 무언가에 감동이 느껴진다면 미래에도 통용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