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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그러라 그래

by 장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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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한 권 주문했다. 가수 양희은의 ‘그러라 그래’라는 제목의 책이다. 예전 ‘라디오 스타’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개그우먼 박미선 씨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면서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소연하는 상대가 가수 양희은이라고 했다. 그녀는 박미선이 한참 넋두리를 늘어놓으면 가만히 듣다가 마지막에 자신에게 꼭 해 주는 말이 ‘그러라 그래’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방송을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그러라 그래’라는 말에는 묘한 매력이 있어 보였다. 아침에 눈만 뜨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여러 관계들로 우리의 일상은 채워지고 있다. 옛말에 나무는 가만있고 싶지만 바람이 가만 두지 않는다는 말도 있듯이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주변의 일들이나 상황이 참 많다. 그럴 때 ‘그러라 그래’라는 말 한 마디면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 문제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마음마저 정화되는 느낌이 들 것 같다. ‘그러라 그래’의 원조 양희은 씨가 같은 제목의 책을 내었다고 하니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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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부터 이어지는 수요일 저녁 행사가 ‘러시아 인문강좌’이다. 작년에는 오프 강좌도 드문드문 있었지만 올해는 줌을 통한 온라인 강좌로만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한국 법조인 최초로 러시아 연수를 다녀와 지금은 러시아 법학회 모임을 이끌고 있는 현직 판사분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배심원제에 대한 설명과 참심원제, 국민참여재판의 차이를 비교한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정작 그분의 특이한 이력에 눈이 갔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지만 법조인이 된 이유가 답이 없는 것 같은 인문학의 모호함 보다는 법이라는 명료함에 끌린 때문이라 했다. 공감이 갔다. 나 역시 매사에 답이 없는 모호함을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모호함을 싫어하고 문학 장르에 관심이 없던 내가 대학원 전공을 문예창작 분야를 선택했다. 왜 일까? 세미나의 다른 참석자가 인공지능 시대에 판사라는 직업의 미래에 대해 질문하자 그분은 대체 가능성도 있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변호사라는 직업은 살아남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었는데 그 이유로 자신의 의뢰인이 비록 죄를 지은 것 같더라도 변호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데 이는 인공지능이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란다. 그 말은 결국 명료함의 가치는 인공지능에 밀려나지만 모호함의 가치는 계속 유지될 거라는 전망처럼 들렸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인생 3막에 문학이라는 콘텐츠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기도 하다. 결국 그 선택마저도 명료함을 추구하는 내 성향이 기여한 공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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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선생, 편집국장을 맡아줬으면 해”

오후에 지역 문인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 달 문학 행사에 작품 한 점 내라는 말씀과 함께 임원진으로 들어와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언젠가는 제안하시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시기가 좀 빨리 온 것 같다. 잠시 생각하다 그냥 맡기로 했다. 나로서는 문학 콘텐츠라는 새로운 분야에 입문해서 여러 선배 문인들과 교류하는 기회로 삼으면 될 것 같다. 명료함을 찾아 지금껏 왔는데 이제는 인문과 문학이라는 모호함을 추구하는 나를 보니 인생은 역시 명료함 보다는 모호한 거라는 생각도 든다. 양희은의 “그러라 그래”라는 말은 누가 뭐래도 나는 나의 길을 뚜벅이처럼 가겠다는 혼잣말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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