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원했던 일이기도 하지만 요즘 들어 직장 밖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글쓰기와 대륙이라는 관심 영역을 설정하고 활동을 이어가다 보니 관련 사람들과의 만남도 점점 늘어나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어느 분야든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고 같은 관심사를 가진 터라 대화가 흥이 난다. 게다가 이런 류의 모임들은 사람들의 직업군도 다양해서 각자에게는 일상이지만 상대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직장 사람들과는 일에 관한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모임의 사람들과는 자유로운 주제로 부담 없이 소통할 수 있어 좋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와인 있는 독서모임이었다. 새로운 회장의 제안으로 낮에는 남산을 돌고 저녁에 모이는 것으로 하여 시간이 자유로운 사람들은 남산까지 돌고 왔고 직장인들은 저녁에 참석을 했다. 모임 장소는 NGO단체 ‘희망 레일’이 있는 충무로의 한 건물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한 여성분이 자신은 이곳 충무로에서만 40년을 지내고 있다며 말씀을 이어 가셨다. 서울의 충무로는 인쇄와 영화 제작으로 특화된 지역인데 그분이 출판업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사뭇 흥미롭다. 군사정권 시절 학생운동으로 수배령이 내려지자 집에는 못 들어가고 아는 선배가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잔 일을 도와준 게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출판기획사를 운영하는데 40년 넘게 할 수 있는 밥벌이를 안겨 주었으니 군사정권에 고맙다고 해야 하나라며 웃으신다.
인생은 참 묘하게 풀리는 면이 있다. 수배령이 내려진 여학생이 잉크와 기름 냄새 찌든 인쇄소 구석에서 잡일을 도와주고 있을 때 그 일이 한 평생 자신이 몸담게 될 일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분은 모임 장소를 제공해 준 NGO 임원분에게 ‘저 형이 꿈 많았던 여대생을 정치이념 써클로 이끈 장본인’이라며 눈을 흘기셨다. 머리 희끗한 여성이 ‘형’이라 부르는 호칭이 예사롭지가 않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인생이다. 오늘 내가 걸려 넘어진 돌부리가 있다면 나의 선택은 두 가지다. 계속 누워 있을 건지 아니면 다시 일어 날건지. 하지만 나의 선택에 따라 돌부리의 의미는 달라지게 된다. 계속 누워 있다면 돌부리는 걸림돌이 되고 말지만 다시 일어난다면 그 돌은 디딤돌이 된다. 한때 인쇄소 구석에서 아무런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 여학생은 이제 대한민국 인쇄 1번지에서 40여 년의 세월을 거친 출판사 대표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