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모른다고 없는 게 아니다

by 장용범

나에게 러시아는 늘 관심의 대상이다. 9월부터 시작된 러시아 인문강좌도 이제 마지막 강의를 남겨두고 있다. 어제는 러시아 공사를 역임했던 박종수 공사의 러-북 관계에 대한 강의였는데 평소 생각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 보면 북한과 중국이 훨씬 긴밀한 관계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가 거의 동맹 수준으로 맺어져 있다는 말씀이었다. 20년 넘게 러시아 관련 외교를 현장에서 담당했던 박 공사의 강의는 생생한 현장감이 있었다. 오늘은 어제 강의를 리뷰도 할 겸 몇 가지 정리해 보기로 한다.

지금 북한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 금수산 궁전에 보관하고 있다. 그 미이라 관리라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인데 북한의 기술로는 불가하다. 한 주에 한 번 시체가 있는 수조의 물을 갈아주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은 시체를 닦아 주어야 한다. 이 일을 누가 하고 있는가. 바로 러시아 과학자들이다. 북한 체제 유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러시아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시진핑과는 4번의 회동을 했고 푸틴과는 단 한 번을 만났을 뿐이다. 그렇다면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더 긴밀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겠지만 모르는 말씀이다. 러-북 관계는 푸틴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정은을 만난 이후 과거의 동맹관계를 복원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한-미 동맹처럼 종이 위에 사인한 동맹관계가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서로에게 신뢰를 주는 동맹이다. 종이 위의 동맹은 언제든 휴지조각이 될 수 있지만 신뢰로 맺어진 동맹은 그렇지 않다. 러-북 관계가 그런 관계이다.

우리는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러시아를 배제하고는 한 발자국도 진척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중국이 북한에 아무리 많은 원조를 하더라도 북한은 고마움을 못 느낀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세워졌을 때 중국은 국공내전 상태였다. 모택동과 장개석은 중국의 지배권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김일성은 조선의용군 2개 사단을 보내어 피를 흘려가며 중국 공산당을 지원했다. 북한은 자기들이 없었다면 중국의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어려웠다고 본다. 그러고 보니 나도 기억이 난다. 한국전쟁 때 중국은 국공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나라 전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지원군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의 지원 요청을 받은 모택동은 모든 참모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며 강행했다고 한다. 게다가 모택동의 아들은 한국전쟁에서 전사까지 했다.

북한의 핵개발은 1946년도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핵무기 생산능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북한의 체제보장 요구를 거절한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라고 한다. 믿을 건 우리의 힘 밖에 없다는 것이겠지. 여기에는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적극 관여하고 있다. 북한이 이제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탄까지 갖추고 나니 이제야 미국은 북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협상에 응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었다면 한반도 상황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전개되었겠다는 아쉬움이 있는 대목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러시아는 북한이 공격을 받는 상황이면 군사개입을 할 것이다. 나진지역에는 3개의 부두가 있는데 2개는 중국에 조차했고 나머지 한 개는 러시아가 조차 중이다. 그런데 그 부두에는 러시아의 배가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러시아의 군사항으로 봐야 한다. 러시아는 극동함대의 부동항을 북한의 나진에 두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요란한 중국, 미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그저 잠잠할 뿐이다. 우리는 러시아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러시아는 이미 우주무기에서는 미국을 앞섰고 시리아 내전을 통해 210종의 신형무기를 시험했다고 시인한 바 있다. 지금 세상은 미중 패권전쟁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러시아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영토가 유럽과 아시아를 걸쳐 있는 러시아의 존재는 엄연한 현실이다. 서방에서 좋아하는 러시아의 지도자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정작 러시아에서는 나라를 망친 최악의 지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우리의 시선은 미국의 시각으로 러시아를 보고 있다. 이 얼마나 편협된 시각인가.

강의 끝무렵 질문을 하나 드렸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현 정부는 너무 무능한 것 아닌가. 교류와 통일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당연히 러시아와 더 긴밀해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공사님의 답변은 이러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정책의 실권자들은 대부분 미국 유학을 다녀온 친서방 정서의 사람들이고 북방 전문가들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 부분이 본인도 안타깝다. 박종수 공사의 마지막 말씀이 마음에 남는다. “내가 모른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러시아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