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괜히 차를 가져왔다 싶었다. 최근 코로나 4단계 격상으로 부쩍 도로에 차가 많아지긴 했다. 4차선에서 3차선으로 바꾸어야 집으로 갈 수 있는데 늘어진 차들은 빈틈을 주지 않는다. 내 뒤를 따르던 차는 우회전 차선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길을 내라고 빵빵거리고 있다. 그래 이것도 나의 길인가 보다며 집 방향과는 전혀 다른 광화문으로 가고 만다. 이왕지사 이 길로 들어섰으니 그냥 두어 시간 쉬어나 갈까 싶다. 주차요금을 부과 않는 건물 앞에 차를 세워 두고는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주변이 대부분 사무 빌딩들이라 저녁의 카페는 한산했다. 도로는 막히지만 한산한 빌딩 속 작은 카페에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져본다. 꺼내 든 책은 유현준의 <공간의 미래>이다. 하고 싶은 건축설계 일을 하기 위해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사람이다. 건축설계는 그만큼 밥벌이가 안 되는가 보다. <알쓸신잡>으로 그의 인문적 성찰을 알고 있던 터라 별 거부감 없이 고른 책이었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유려한 문체에 인문과 건축, 도시계획의 해박한 지식까지 이 시대의 지성인으로 인정하고 싶은 사람이다. 몇 장을 넘기니 어느 한 구절에 시선이 멈춘다.
“획일화가 되면 가치판단의 기준은 정량화가 된다.”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어쩜 이토록 멋진 문구를 만들 수 있을까. 도시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에서 나온 한 마디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다양성은 획일화에 묻혀 숨 쉴 공간이 없긴 하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된 획일성에 암묵적인 압력을 받고 있다. 남자라면 입시 준비를 거쳐 스무 살이 되면 대학에 가야 하고 2학년을 마치고는 군대에 간다. 복학 후 남은 2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취업을 한다. 이제부터 자동차를 사고 결혼 후 아이를 하나, 둘 낳을 즈음 내 집 마련을 한다. 뭐 대략 이런 그림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런 획일성도 무너지고 있긴 하다. 대학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다 보니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비교우위가 되지 못하고 취업 환경이 어렵다 보니 청년 백수가 넘쳐난다. 스스로 자립이 안 되니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아예 결혼을 기피하는 비혼 족도 늘어난다. 어렵사리 결혼을 했다 쳐도 딩크족이라 하여 아이를 갖지 않기도 하고 이혼율의 급등으로 돌싱의 가능성도 도사리고 있다. 직장은 상시적인 구조조정의 위험이 있다 보니 언제 직장을 나와야 할지 모른다. 이제는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외부 환경 때문에라도 다양성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중산층의 일반적 거주 형태인 아파트의 구조는 단순하다. 아파트 이름만 다를 뿐 30평형대 아파트는 방 3개, 거실과 화장실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방문하는 집이라도 대략 구조가 그려진다. 이런 거주형태의 획일성은 아파트 화폐를 만들어 낸다. 오직 어느 위치의 얼마짜리냐가 중요한 차이점이 될 뿐이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목동 근처에 집을 구하려고 중개사무소를 돌아다닌 적이 있다. 당시 중개 사무소의 단지 설명에 여기는 내가 살 곳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내용이 이러하다. 목동 아파트 단지는 주변부와 중심부로 나누는데 주변부는 낮은 평수, 중심부는 높은 평수로 구성된다. 주변부에 사는 사람들은 중심부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쓴다. 심지어 아이들 조차 몇 단지에 사느냐로 어울리는 무리가 달라진다는 말에 가뜩이나 경쟁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질려버린 기억이 있다.
정해진 시간 퇴근길에 집으로 향했지만 차선 확보의 경쟁에서 밀려나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는 내 모습도 하나의 다양성이란 생각이 든다. 모두가 서로 퇴근하느라 저토록 경쟁을 하는데 먼저들 보내드리고 나는 좀 쉬어간들 어떠하리. 여덟 시쯤 카페를 나서니 도로는 막힘 없이 뻥 뚫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