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올림픽 이후 일본과 한국의 현주소를 비교하는 글이나 영상을 자주 접하게 된다. 잘 나가던 일본이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잃어버린 30년을 맞은 반면 한국은 그 사이 격차를 꾸준히 좁혀 최근에는 여러 경제 지표면에서 일본을 추월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는 내용들이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여자배구 한일전이 주목을 끌었듯이 일본은 우리에게 언제나 극복의 대상이었고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떠올리게 하는 불편한 이웃 나라인 셈이다. 나라와 나라의 비교도 이렇듯 신경이 쓰이는데 개인이 다른 타인에게 느끼는 비교는 더 말해 무엇할까.
인간에게 비교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고 하지만 사실 불편한 요소가 많은 게 사실이다. 만일 학교에서 시험도 없고 성적도 없는 제도가 도입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공부를 즐길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비교는 참 피곤한 인간의 본능이다. 누가 뭐래도 과거 30-40년 전에 비해서는 모두가 잘 살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우리는 상대적 비교에 의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교에는 언제나 ‘나’와 ‘남’이 있다. 그리고 그 상태에 따라 낫다, 못하다, 같다의 세 가지에 놓인다. 늘 ‘남’보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비교를 통한 괴로움의 원천이다. 지금 내 지갑에 돈이 10만 원 있다 치자. 상대방의 지갑에는 100만 원이 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상대방이 나보다 돈을 더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니라 내 지갑의 돈을 더 늘리는 게 핵심이다. 관점을 나에게 돌려야 한다는 말이다. 비교란 잘 지내는 나의 인생에 ‘남’이 훅하고 들어온 상황이다.
비교는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질 때 일어난다.
첫째, ‘나’와 ‘남’이 있어야 한다.
‘나’의 눈으로 ‘남’을 보는데 그 기준은 언제나 내가 정한 것이다.
둘째, 비교의 대상이 있다. 그런데 일부분만 본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의 직장만이 비교의 대상이지 그 속에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인간관계는 어떤지 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가 다니는 직장만이 비교의 대상이다.
셋째, 과정은 안 보이고 결과만 보인다.
그가 대기업에 들어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고 지금의 결과만이 비교의 대상이다. 만일 그 과정을 본다면 저렇게까지 해서 큰집 머슴이 될 필요가 있을까 싶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50대쯤 되면 밀려나는 직장 아닌가.
그러면 비교로 인해 괴롭기 싫다면 비교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
좀 이상적인 상황일지 모르지만 비교의 마음이 일면 ‘나’라는 에고를 내려두고 비교의 대상만 유심히 살피는 방법이 있다.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전체적인 과정을 보게 되면 결과만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그래, 너 거기까지 가느라 참 고생했겠다’ 싶을지도 모른다. 비교는 나보다 잘 난 사람 앞에서는 열등감을 못난 사람 앞에서는 우월감을 느끼는 감정이다. 열등감은 우월감의 다른 모습이다. 크다 작다, 많다 적다, 높다 낮다로 볼게 아니라 비교의 대상에서 ‘나’를 지우게 되면 내가 보는 대상은 오직 대상 그 자체로 남게 된다.
<참고: 전현수 박사의 마음테라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