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생신날 모처럼 부모님과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내년 은퇴를 앞둔 큰아들에게 당신의 은퇴시기를 되짚어 보시더니 비슷한 시기였음을 확인해 주셨다. 아버님은 은퇴 후 30년이 지났지만 노후를 정말 잘 보내고 계신다. 평생을 함께 하는 아내가 곁에 있고, 자녀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잘 살고 있으며, 당신의 건강도 큰 이상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셨으니 이보다 좋은 노후가 있을까 싶다. 만일 나의 은퇴 후 30년 지난 모습이 지금의 내 아버님과 같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 같다.
어머님은 80대의 연세에 만학도를 위한 학교에 다니시는데 지금의 학교 생활이 무척 만족스럽다며 이 나라가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어머님은 허리에 긴 칼을 찬 일본 경찰이 집안의 놋그릇을 징발하려고 들이닥친 일을 기억하셨다. 그 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다양한 한국의 현대사를 거쳐 오셨으니 지금의 80대 노인들은 한국의 살아있는 역사책이라 해도 될 것 같다. 건강한 노인들의 특징으로 부지런하고 긍정적이며 배움을 즐긴다는 얘기가 있는데 내 어머님을 뵈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두 분의 말씀을 듣고 있자면 기적이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그저 이루어진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제는 노인으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계시지만 이 땅의 80대는 슈퍼맨의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일제시대부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분 한 분의 경험이 귀한 역사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칠기삼이라는 말도 있지만 세상살이는 자신의 능력은 일부만 작용하고 나머지는 어떤 큰 흐름이 있는 것 같다. 지금껏 내 힘으로 잘 살아왔다 여겼는데 그건 정말 큰 오만이고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돌아보면 어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운 좋게 적절한 선택을 해왔고, 도움이 필요할 때 예상 못했던 누군가가 나타나 도와주고는 이내 사라지기도 했다. 주변의 여건들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럭저럭 지금껏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면 내 힘으로 무언가를 했다기보다는 누군가 덕분에 살았던 것 같다. 그게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 때문인지 타고난 사주팔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세상은 나의 능력이나 힘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니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따뜻해지고 여유로워지는 것 같다. 모처럼 내려간 부산에서 두 분을 뵙고 내 부모님은 인생을 참 잘 살고 계심을 새삼 느끼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