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을을 찾아 간 한 방송 리포터가 어느 노인에게 잘 사는 법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노인은 “잘 먹고, 많이 돌아다니고, 걱정하지 말고”라고 했다. 우문이었지만 현답을 하셨다. 언제나 우리의 관심은 잘 사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는 잘 죽는 법에 대해서도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람이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데 죽음에 대해서는 겪어선 안 될 사건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다. 한 대기업 회장은 쓰러진 후 거의 코마 상태에 있었지만 현대 의술은 거의 6년을 숨은 쉬도록 할 수 있었다. 어릴 적엔 집안 어른들의 초상을 거의 집에서 치렀다. 당시 집안 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부모님과 함께 조문을 갔는데 분주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풍경은 아주 낯선 풍경이 되고 말았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은 익숙한 자신의 집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죽음이 임박하면 일단 병원으로 옮기고 사망하면 병원 빈소에서 장례절차를 치르고 만다. 어느새 장례식장은 병원의 큰 수입원이 되고 말았다.
급격한 고령화 사회로 진행되다 보니 유품정리사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죽음은 가족들이 둘러앉아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맞이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고독사라 하여 혼자 살던 사람들의 쓸쓸한 죽음도 제법 되는 것 같다. 소설가 소노 아야코는 고독사에 대해 ‘고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남은 사람들의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했다. 혼자 죽었다고 반드시 고독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란다. 어쩌면 힘든 세상을 떠나며 오히려 편안했을지도 모르는데 남은 흔적들을 보고 고독사 했다고 섣불리 이야기할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차라리 죽음이 편한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우리는 대부분 살고 싶어 하고 살아 있는 것은 좋은 것이라 당연시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병마에 시달리는 육체의 고통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삶이 그리 좋은 것이라면 자살이 왜 있으며 안락사를 법으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왜 일어나겠는가. 점점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고 많은 노인들이 치매와 같은 만성질환으로 요양병원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국민건강보험의 상당한 비율이 노인들의 요양병원에 지급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죽음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 같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 인식 전환 없이는 유례가 없다는 한국의 초고령 시대를 대처하기가 무척 어려워 보인다. 이제 한 인간의 죽음은 오직 병원에서만 맞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근래의 일이다. 예전 병원의 역할은 더 이상 조치할 게 없으면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환자에게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오늘날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한이 없다. 그 권한은 오직 의사와 남은 가족들이 가질 뿐이다. 이제 삶과 죽음 사이에 병원이 개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의술은 점점 발전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더 모르게 되었다. 모르면 두려워지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