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편리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작가 조승연이 했던 말이다. 편리하다는 것과 편안하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정말 편리한 인프라가 많이 갖춰져 있는 것 같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고 보니 우리의 통신, 의료, 교통, 복지 등의 각종 인프라는 그간 부러워만 보였던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좋아 보인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은 있지만 일상이 이만큼이라도 굴러가는 것은 발전된 온라인 마켓과 택배의 물류시스템이 받쳐주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며 편안하게 잘 살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왜 세계에서 가장 편리한 인프라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편안한 삶은 살지 못하는 것일까. 조승연 작가가 프랑스 유학시절 살았던 방에는 600년 된 서까래가 있었는데 프랑스 친구들이 그것을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부동산 거래 시에도 600년 된 서까래가 있는 집이라고 하면 가격대를 더 높이 쳐 준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관점에선 좀 이상하다. 그 정도의 집이면 벌써 재개발이나 재건축으로 근사한 새 건물이 들어서야 할 것 같아서다. 그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와 좀 다른 것 같다.
나에겐 등산화가 하나 있다. 구입한 지 20년은 족히 된 것 같다. 운동화를 신고 산을 오르다 발을 접질린 후 다시 등산화를 꺼내 신었는데 걷던 중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신발의 바닥을 살피니 밑창이 닳아 접착 부분이 반쯤 떨어져 나가 있었다. 이제 이 등산화를 버릴 때도 되었다 싶었지만 좀 아쉬웠다. 밑창만 닳았지 발은 참 편한 등산화였기 때문이다. 새로 등산화를 사는 게 당연했지만 먼저 밑창 교체 수선비를 알아보았다. 거의 새 신발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밑창을 교체하기로 했다. 이유는 편안함과 그 등산화에 대한 일종의 의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록 20년 된 낡은 등산화였지만 나와 함께 국내뿐 아니라 중국 운남 트레킹과 5,000 미터가 넘는 설산을 함께 오른 등산화였다. 그 등산화에 얽힌 나의 정서는 단지 밑창이 떨어졌으니 새로운 등산화로 교체하는 것에 묘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아내는 이런 나를 지나친 감성이라고는 했지만 내가 그리 느껴지는 것을 어쩌랴.
편안함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주관적 정서이기에 새롭고 편리하다는 것만으로는 대체될 수가 없다. 또한 나와 정서적 교감이 이루어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나이 들수록 편안함을 느끼는 대상은 기존에 가진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익숙함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편리하고 첨단기술이 일상화된 나라에 살고 있지만 행복도가 낮은 이유는 좀 더 편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 더 편안해져야겠다. 그것은 눈을 외부로 돌려서는 찾을 수가 없고 나의 관심이 내면으로 향할 때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