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원 과제에 허덕이고 있다. 수술 후 한 주일 간 휴가를 내었지만 마감일이 임박하고 밀린 기말 과제에 하루하루를 빡세게 돌리고 있는 중이다. 가까운 카페에 가서 하면 좋은데 코로나 단계 격상으로 그도 여의치 않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집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는 중이다. 어제는 과제명을 보며 대략 난감함을 느꼈다. “하보경의 밀양북춤을 감상하고 느껴지는 바를 서술하시오.” 유튜브에 나오는 10분도 채 안 되는 춤을 몇 번을 돌려보아도 조선시대 농부 복장으로 북 메고 춤추는 장면만 나오는데 나의 느낌을 서술하기가 영 쉽지 않다. 한 마디로 나의 느낌을 서술하자면 ‘무거운 북을 메고 춤을 잘 춘다.’ 이것을 느낌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접하긴 하다. 이런 류의 과제를 몇 개 접하고 나니 슬슬 짜증이 났다. 그림을 앞에 두고 ‘감상을 서술하시오.’라고 하는데 ‘그림 잘 그렸네.’라는 게 감상평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제 춤을 보고 또 보고 대체 이걸 보고 내가 뭘 느끼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생각은 엉뚱하게도 무언가를 본 느낌을 글로 표현하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로 흘러가고 말았다.
우리는 무언가를 볼 때 좋다 싫다는 감정을 느낄 경우가 있다. 이때 누군가 왜 그런 느낌이 들었냐고 물으면 그나마 답이 좀 가능하다. 나의 느낌이 호불호로 갈렸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번 과제처럼 크게 관심이 없었던 북춤이란 것을 보게 하고는 느낌을 적으라고 하니 당황스러운 것은 아닐까. 이것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그냥 북을 메고 추는 춤이구나 는 것 밖에는 느껴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주제는 A4 한 장을 채우는 것도 금방이지만 어떤 주제는 단 한 줄 쓰기도 버거울 때가 있다. 왜 그럴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북춤을 전수받는 문하생이었다면 북춤에 대한 감상평이 술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과제로 접하기 전에는 북을 메고 추는 춤을 단 한 번도 관심 있게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짧은 시간의 북춤을 보고 감상평을 적으려고 하니 어찌 서술이 되겠는가. 알지 못하니 보이는 것은 그냥 조선시대 평민 복장의 한 사람이 북을 메고 춤을 추는 행위만 보이는 것이다. 쥐어짜듯 감상평을 적어내긴 했지만 전혀 엉뚱한 화두만 하나 잡은 셈이다.
느낌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작업이다. 느낌이란 것은 우뇌가 작용하는 감성적 영역이고 글이란 것은 좌뇌가 작용하는 어느 정도 논리적 영역이 포함된다. “난 네가 좋아.”라는 남자의 감성적 멘트에 여자가 “내가 왜 좋아?”라고 물었다 치자. 여기에 “응, 네가 안정된 공무원의 직업이고, 키가 170센티의 늘씬한 몸매에 얼굴도 그만 하면 됐고, 집안도 보니 네 부모님 재산이 많은 것 같아 만일 너랑 결혼을 하게 되면 좀 얻을 게 있어 보이네.”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 여자가 좋은 이유는 확실하지만 아마도 두 사람은 결별할 것 같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이유도 깔려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긴 하다. 내가 북춤의 진정한 감상평을 적으려면 그것을 아는 게 먼저일 것이다. 북춤을 알지 못하니 그냥 어떤 한 사람이 북 메고 양 손으로 공중을 흐느적거리고 있다는 것 밖에는 보이지 않았건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나 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더라.’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싶다면 먼저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 북춤 감상문을 적으며 드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