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라는 말은 편리하면서도 참 허무한 말이다.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약속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만나자. 나중에 식사 한 번 하자, 나중에 갈게 등등. 우리는 숱하게 많은 동사에다 나중에를 붙인다. 하지만 그 ‘나중에’에 갇힌 동사들은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쉽게 풀려 나지 못한다. 나중에 먹자하다가 식사를 거르기도 하고, 나중에 하자 하다가 일의 때를 놓치기 일쑤다. 인간 심리의 미루는 본성은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것 같다. 일단 하긴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것이 나중에의 달콤한 유혹이다.
요즘엔 되도록 나중에라는 말을 안 쓰려고 한다. 나중에 식사 한 번 하자 할 때는 아예 상대와 날짜를 잡기도 하고, 나중에 하자고 할 때는 되도록 달력의 스케줄에 반영하려고 한다. 나중에라는 가짜 일정을 진짜 일정으로 만들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은 달력에 반영해 스케줄화 하는 것인 것 같다. 다른 할 일이 많다면 몇 월에 한다는 식으로 대강 일정이라도 잡아 본다. 나는 대략 이 정도 수준에 머물렀는데 어떤 이는 ‘나중에’로 미루는 사람들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상품화시켜 감탄을 자아낸다. 미룬다는 의미를 지닌 Miroo라는 스마트폰 일정 프로그램은 미룬 일, 할 일, 완료라는 세 파트로 나뉘어 있는데 할 일을 미룬다로 넘기면 정확하게는 아니어도 대략 일정을 잡도록 되어 있었다. 하도 기발해서 유료 앱이지만 하나 설치했다. 역시 세상에는 고수가 많은 법이다.
Miroo에 올라간 나의 나중에 리스트를 보았다.
가까이는 대학원 기말 과제, 업무상 미룬 일들도 있지만 멀리로는 작가로서의 활동, 강연, 유라시아 대륙 여행, 동북아시아 민간 NGO 활동 등도 보인다. 멀리 미룬 나중에라는 항목을 보니 은근 기분이 좋아진다. 하루하루를 보면 큰 진척이 안 보이지만 그나마 방향성은 있으니 가까운 나중에가 달력에 반영되어 행동으로 옮겨지면 멀리 있는 나중에로 언젠가는 도달하겠지라는 위안을 가져본다. 나중에라는 습관적인 유혹도 활용하기 나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