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 사서 하는 고생은 놀이다

by 장용범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약간 어폐가 있는 말이다. 어떤 일을 ‘사서 한다’는 것은 자발성이 전제되어 있으니 뒤에 따르는 고생이라는 부정적인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구한말 고종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하는 서양인들을 보고는 ‘저렇게 힘든 건 머슴들에게나 시키지 뭐하러 직접 하느냐’고 했다 한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면 분명 고생하는 모습이긴 하다. 헬스장에 가면 필수적으로 있는 트레드밀(러닝머신)도 19세기에는 죄수들을 고문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고 보니 그 모양새가 고문 도구 같기도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스로 올라 가면 운동, 억지로 올라 가면 고문이 되는 건가. 요즘 아내로부터 ‘사서 고생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주말이지만 평일보다 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다. 대학원 기말 과제 작업과 스스로 가입한 몇 군데 단체의 내부 일을 맡다 보니 연말 행사와 일정을 소화하느라 역동적으로 보내고 있다. 그런데 몸은 바쁘지만 마음은 즐거우니 이건 사서 하는 고생이 아니라 재미를 누린다는 말이 맞겠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고 만다.


일요일에는 ‘에듀테크 콘텐츠 크리에이팅’이라는 이름도 한참 긴 줌 워크숍에 참여했다. 2학기에 이-러닝 기반의 교육 콘텐츠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신청한 타 학과 과목이다. 아무래도 이과에 가깝다 보니 다른 학과생으로는 내가 유일한 것 같다. 주제가 흥미롭다 ‘가상현실과 미래교육’, ‘이러닝 기반의 온라인 교수 학습 사례’로 현업의 기업체 대표들이 진행하는 실감 있는 수업이었다. 교육계에 서서히 도입되고 있는 가상현실 기반의 콘텐츠 시연 영상을 보니 이건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MR(혼합현실) 기반의 기술들이 장차 메타버스로 모이고 있다 하니 미래의 교육현장이 흥미로울 뿐이다. 하지만 이들 기술은 조금 먼 이야기이고 코로나 시대의 현실적인 콘텐츠 제작 툴은 따로 있었다. 줌이나 유튜브 정도만 알고 있는데 현장에서 사용되는 툴들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퀴즈식으로 교사가 문제를 내면 학생들의 응답을 바로 집계하여 보여주기도 하고 3D로 대상을 돌려보기도 한다.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지만 학생들의 수업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기발한 방식들이 돋보인다. 많은 툴들이 있지만 그래도 자주 쓰이는 것으로는 줌을 비롯해 nearpod, mentimeter, padlet, kahoot, gather town, articulate 360, teachermade 등이라는데 처음 듣는 것들이다. 새로운 것들은 아니고 기존에 있었던 툴들이지만 코로나 이후 급성장하고 있다 한다. 역시 수요가 공급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한 장님 거지가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다. 옆에는 동냥 그릇과 도와달라는 문구를 쓴 골판지가 있다. ‘I Am Blind. Please Help.’ 사람들이 가끔 동전을 주긴 하지만 대부분은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지나가던 한 여인이 멈칫하더니 도와 달라는 그의 골판지 글자를 바꾸고는 사라졌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장님 거지에게 자꾸자꾸 돈을 주는 것이었다. 그녀가 바꿔둔 글은 이랬다. “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가 몸담고 경험하는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나의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세계의 말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필요하다. 30년 넘게 써왔던 직장의 언어가 마무리 질 즈음 나는 이제 다른 세계를 꿈꾸고 그곳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는 중이다. 새로운 카톡 문자가 하나 들어왔다. 12월 18일 동해북부선 연결 착공을 기념하는 한러 음악회에 같이 가자는 문자이다. 이번 행사는 강릉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시에 열기로 했나 보다. 그간 남북철도 연결을 위해 애쓰던 희망 레일의 사업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기꺼이 함께 가겠노라고 했다. Change Your Word, Change Your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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