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무이자 할부 가능하신데 할부로 하시겠습니까?” 전화기 너머로 상담사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년 마다 갱신하는 자동차 보험 상담 중에 결제방법 선택 시 나온 옵션이다. 잠시 망설이다 “아뇨, 일시불로 해주세요.” 당장 다음 달 청구될 적지 않은결제 금액이 부담이지만 그래도 그게 낫겠다 싶었다. 할부를 좋아 하지 않는다. 매월 무언가를 부담하는 의무감이 싫어서다. 그래서 휴대폰을 바꿀 때도 현금으로 지급하다 보니 사전에 준비가 좀 필요하다. 하다 못해 1년 짜리 작은 적금이라도 들어 만기 금액을 들고 가는 편이다. 언젠가 아내에게 은퇴하면 신용카드를 없애고 체크카드나 현금으로 살겠다고 했더니 불안하지 않겠냐고 한다. 좀 오래 되었지만 한동안 그리 산 적도 있어 그런 생활이 낯설지는 않다. 카드 없이 사는 삶은 돈을 지출하는데 어느 정도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 적어도 돈이 수중에 얼마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해서다. 그런 압박감이 싫어 카드 결제를 하지만 언제나 월급날에 맞춘 결제날이 되면 어김없이 싹 뽑아가는 모습이 얄밉긴 하다. 오죽하면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란 노래까지 있겠는가.
사실 신용카드라곤 하지만 그건 대출카드이다. “한 달 있다 갚을 테니 지금 고기 좀 먹을게요’와 다를 바 없는 얘기다. 호기롭게 카드를 내밀었는데 ‘손님, 카드 정지로 결제가 안 되는데요’라는 소리를 들으면 얼굴이 달아오르며 당황하게 된다. 단돈 10원 이라도 미결제액이 남아 있으면 인정사정 없이 정지되는 게 신용카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런 민망한 상황도 돈 벌 기회로 삼는 은행은 ‘리볼빙 제도’란 걸 두어 빚에 또 빚을 쓰게 만든다. 그리보면 신용카드는 빚을 지면서도 사람을 당당하게 만드는 이상한 포장효과가 있다. 초기엔 카드 광고도 많았는데 카드로 결제하는 것을 꽤나 멋있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건 광고일 뿐이다. 신용카드로 10만원 결제하는 것과 지갑에서 현금 10만원을 꺼내어 결제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마음이 느끼는 부담감은 엄청 다르다. 그래서 돈을 모으려면 현금으로 생활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많이 버는 것 같은데 늘 부족한 느낌이 든다면 먼저 신용카드를 없애는 것 부터 추천한다. 그래야 돈 쓰는 것에 긴장감도 생기고 지출의 조절도 가능하다. 내가 신용카드를 처음 만든 것은 은행에 입사하고 부터였다. 지점에 발령 받아 인사차 갔는데 카드 담당자가 알록달록한 가입 신청서를 건네기에 신청서 디자인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 후 은행에서 연체관리 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채무자들이 카드 대금을 갚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들을 보며 은행의 하는 일이 빚을 쓰라고 할 땐 언제고 돈을 왜 안 갚냐고 닥달하는 모양새가 참 이중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까지 기억나는 한 채무자가 있다. 길가에서 붕어빵을 팔던 아주머니 였는데 신용카드 연체대금을 대출로 전환해 일시에 갚게 했지만 그 대출마저 연체 하기에 또 독촉을 하게 되었다. 요즘은 은행도 연체관리 업무를 아웃소싱 해 일선 행원의 부담이 덜 하지만 당시엔 지점에서 직접 상환을 독촉하는 시스템이었다. 내가 하도 독촉을 해대니 나중에는 얼굴만 봐도 서로 웃는 사이가 되었는데 하루는 나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어디라고 했더니 그럼 퇴근 길에 자기 한테 들러 매일 수금을 해 가라고 했다. 자신은 그런 목돈을 단박에 갚을 길이 없으니 매일 벌어들이는 수입에서 조금씩 갚아 가겠다고 했다. 그 후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나는 퇴근 길에 그 아주머니에게 들러 하루 벌어들인 돈을 털어가는 이상한 은행원이 되고 말았다. “많이 버셨어요?” 헐, 이게 무슨 은행원이람. 결국 그렇게라도 다 받아내긴 했지만 당시 연체 관리 업무를 하며 빚을 제때 갚지 못한 사람들이 쩔쩔매는 모습들을 보며 느낀 바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대출받는 것을 참 싫어한다. 그런데 신용카드도 분명 대출인데 이름을 너무도 잘 지었다. 신용카드라는 이름은 금융회사의 속임수일 뿐 정확한 명칭은 ‘급전카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