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유쾌했던 저녁 모임

by 장용범

대화가 재미있었다. 본격적인 유라시아 평론의 웹진 출발을 앞두고 편집 방향에 관한 추가 논의를 위해 이루어진 저녁자리였다. 일을 할 때면 자주 부닥치는 문제가 있다. ‘무엇을 하자’는데는 의견이 잘 모아지지만 ‘어떻게’에 대해서는 이견이 생기게 마련이다. 오랫동안 영업에 몸담았던 탓인지 글을 읽는 독자들이 줄어드는 현 상황에서 웹진 그것도 평론이라는 분야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질까 싶어 우려를 표했지만 미국과 서방 위주의 편협된 국내 언론시장에 러시아에 관한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룰 잡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게 중론이었다. 집필진은 크라스키노 포럼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유라시아 전문가들은 제법 있었고 김 교수님의 러시아 현지 인맥들도 동원한다는 계획도 내어 놓으셨다. 크라스키노 포럼이 사단법인으로 출발하여 수익사업을 직접 할 수 없으니 별도로 결성한 것이 유라시아 평론 협동조합이다. 사업영역을 출판과 강좌 등 문화사업이 주를 이룰 것인데 그 출발이 웹진 발간이었다. 정치, 경제 등 너무 딱딱한 내용만 있어서는 흥미를 잃을 것 같아 내가 제안한 현지 언론이나 잡지 등의 기사를 저작권이 문제 되지 않을 정도로 인용하자는 의견이 수용되어 내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러시아어도 부족한 내가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건 갈수록 발전하는 AI 번역기 때문이었다. 전문을 인용하는 수준이 아니므로 번역기를 돌려 내용을 파악하고는 콘텐츠를 작성한 뒤 전문가이신 김 교수님께 감수받는 수순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러시아에 관한 국내 언론 인프라가 워낙 없는 상황이라 그 작업도 제법 의미 있을 것 같다.


김 교수님은 이번에 출간했다며 ‘똘스또이와 함께한 날들’이란 책을 건네셨다. 교수님은 한국과 소련이 국교를 맺을 때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신 분으로 국내의 몇 안 되는 러시아 전문가로 활동하고 계시다. 러시아와 대륙에 관심이 큰 나로서는 김 교수님과의 인연이 참 소중하게 여겨진다. 연세가 60세 정도 되시는데 저리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 공부하고 저술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에너지가 부럽기도 하다. 이번에 편집국장을 맡으신 박 PD님은 오랫동안 몸담았던 KBS에서 곧 정년을 맞으신다. 앞으로 시간 여유도 있으실 테고 과거 기자 생활을 한 경험도 있어 편집 국장직은 자연스레 박 PD님에게 돌아갔다. 요즘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하셨다는데 고충이 많다며 푸념은 하셨지만 재미있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김 교수님의 책이 화제가 되었다. 박 PD께서 자신은 똘스또이에 대해 안 좋은 기억밖에 없다며 일화를 소개하신다. 자신의 중학시절,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도 소설만 읽고 있는 아들에게 잔뜩 화가 난 부친께서는 읽고 있던 책을 냅다 뺐아 얼굴에 던지고는 ‘이놈아, 지금 네가 시험을 앞두고 ‘복활’이나 읽고 있을 때냐’며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병용되던 시절이라 보통 ‘복’이라 읽히는 한자 復가 ‘부’로도 읽힘을 모르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복활(復活)’책은 마당에 던져지고 머리는 얼얼했던 기억만 있어 똘스또이에 대한 감정이 영 안 좋다 시기에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공부는 뒤늦게 하셨다지만 어릴 적 라디오 듣고, 소설을 읽던 그 감성이 그분을 PD라는 직업으로 이끈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책 표지를 여니 교수님께서 적어두신 글에 잠시 눈이 머문다. ‘장 OO 작가님에게, 크라스키노 포럼과 유라시아 평론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교수님의 친필 글이 감사했던 것은 내가 따르는 분에게서 내가 작가로 인정받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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